우리 옛 그림

가을소리 - 성재수간(聲在樹間)

從心所欲 2020. 10. 9. 11:49

구양자(歐陽子)가 바야흐로 밤에 책을 읽는데,

서남(西南)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에 흠칫하며 듣고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처음에는 비 소리 같더니 바람소리로 변하고,

갑자기 뛰어오르며 부딪치는 것이

마치 파도가 밤에 놀라고, 비바람이 몰려오는 듯 하고.

물건이 서로 부딪혀 쨍그랑거리며 쇠붙이가 울리는 듯하더니,

다시 적에게 다가가는 병사들이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데

호령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였다.

내가 동자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네가 나가 살펴보아라.”

동자 가로되,

“별과 달은 밝고 맑으며, 은하수는 하늘에 있고,

사방에 사람소리는 없는데

소리는 나무사이에 있습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송나라 구양수(歐陽脩, 1007 ~ 1072)의 '가을 소리를 노래하다'라는 <추성부(秋聲賦)>의 앞부분이다. 사나운 가을 바람소리가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도 듯하다.

▶부(賦) : 시 짓는 이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중국 고대로부터의 시 작법

 

성재수간(聲在樹間). 소리가 나무사이에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장승업(張承業)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조선후기의 화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은 이 글귀를 화제 삼아 그림을 남겼다.

 

[안중식 <성재수간도>, 지본수묵담채, 23.5 × 36㎝, 개인]

 

얼핏 보면 마당 나무 앞에 서있는 인물이 그림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문창에 비친 그림자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마당에 서있는 동자나 문창에 비쳐진 그림자는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별과 달은 밝고 맑으며, 은하수는 하늘에 있고,

사방에 사람소리는 없는데

소리는 나무사이에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심부름하는 동자의 입에서 나왔겠는가!

그저 옛 문사들이 경망스럽지 않고 초연한 선비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시 짓고 글 짓는 방법의 하나로 동자를 동원했을 뿐, 실제로 시를 지은 구양수 자신이 밖을 살폈을 것이다. 그렇게 그림 속의 동자와 문창의 그림자를 같은 인물로 보니 그림이 더 한층 운치 있게 느껴진다.

이어지는 시의 뒷부분은 가을에서 느끼는 삶의 감회를 읊었다.

 

나는 가로되,

“허허, 슬프도다. 이는 가을소리로다.

어찌하여 왔는가?“

이는 무릇 가을이 상(狀)을 만듦이로다.

그 색은 참담하여,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은 걷히도다.

그 모습은 청명하여, 하늘은 높고 해는 빛나도다.

그 기운은 싸늘하여 사람의 살과 뼛속을 찌르고,

그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하도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처량하고 슬프다.

울부짖듯 세차게 일어나

많은 풀이 푸르고 성하게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가 울창하여 즐길 만하다가도

풀은 이것이 스치면 색이 변하고

나무는 이것을 만나면 잎이 떨어지니,

시들고 떨어지게 하는 소이(所以)는

바로 이 한 기운이 남긴 매서움이다.

무릇 가을은 형벌의 관리[刑官]이고, 시절로는 음(陰)이로다.

또한 군사를 부림의 상(象)이고 오행으로는 금(金)이로다.

이는 천지의 의기(義氣)를 이름이요,

항상 매서움을 가지고 초목을 죽임으로 마음을 삼도다.

하늘이 만물에 대하여, 봄에 자라고 가을에 결실하게 하도다.

그리하여 그것이 음악에 있어서는

상성(商聲)으로 서쪽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의 음률이로다.

‘상(商)’은 다침을 말하니, 만물이 늙어지면 슬프고 상심하는 것이며,

‘이(夷)’는 죽임이니, 만물이 성할 때를 지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초목은 감정이 없어

때가 되면 날리어 떨어지지만

사람은 동물이고 오직 만물의 영장이라.

온갖 근심이 그 마음을 움직이고

수많은 일이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소모되도다.

하물며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 지혜로서 할 수 없는 바를 근심하는 경우이겠는가.

짙게 붉고 윤택했던 얼굴이 마른 나무처럼 되고,

칠흑같이 검던 머리는 백발 되는 것이 마땅하다.

본바탕이 쇠나 돌이 아닌데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무성함을 다투려는가!

몸을 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또한 어찌 가을소리를 한탄하겠는가?

동자는 대꾸가 없고, 머리를 떨어뜨리고 잠들었도다.

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소리 들려와

나의 탄식을 돕는 듯하구나!

 

아마도 시 속의 동자는 가을바람소리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고개를 떨어뜨린 채 방에 앉아 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중식이 중국 화보풍으로 그린 또 다른 <성재수간> 그림도 있다. 김홍도 역시 같은 소재로 <추성부도(秋聲賦圖)>라는 그림을 남겼는데, 그림에 구양수의 시 전체를 옮겨 적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안중식 <성재수간>, 견본담채 140.5 x 52.8cm, 간송미술관]

 

[김홍도 <추성부도(秋聲賦圖)> 1805년(61세), 견본수묵담채, 56 x 214cm, 1805년, 보물 제1393호, 삼성리움미술관]

 

[김홍도 <추성부도> 중 그림부분 확대]

 

1806년 이후의 김홍도에 대한 행적이 없어 1805년에 그린 이 <추성부도>가 김홍도의 유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세 그림에 대한 반응이 다르겠지만 가야금 명인으로 불리는 황병기(黃秉冀, 1936 ~ 2018)선생은 개인 소장본인 안중식의 <성재수간도>에 깊은 감명을 받아 가야금 곡을 쓰기까지 하였다. 그 내력을 소개한 글을 간추리면 이렇다.

 

【1980년대 어느 날, 가야금 녹음을 하려고 KBS의 한 녹음실에 들어갔다가 녹음기사 방에 걸어 놓은 <성재수간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밤중에 숲 속에 있는 집 마당에서 어느 남자가 나무 가지 사이로 사립문 쪽을 유심히 바라보며 서 있는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을 팔라고 했더니, 녹음기사가 복사본을 어떻게 파느냐고 하여, 대신 다른 그림을 걸어주기로 하고 그 그림을 집으로 가져왔다.

 

<성재수간도>를 집으로 가져오자마자 바로 가야금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을 음악으로 작곡하려면 공간을 시간으로 번역해야 한다. 숲에 바람이 불면 수많은 나무 잎들이 나부끼는 소리 속에 듣는 이가 생각하는 갖가지 소리가 다 들리는 듯이 느껴진다. 따라서 <성재수간도>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기가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마당으로 뛰어나가 사립문 쪽을 유심히 바라보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달빛만 가득한 마당에 바람만 휘몰아치고 있는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 내용에 따르면 이때 황병기선생은 그림의 배경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마당에 서있는 동자를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오인하였다.

 

【그래서 곡 전체를 4부분으로 구성했다. 1장은 달빛 밝은 밤의 숲 속에 있는 집 마당 풍경을 그린 것인데, 신비로운 화음으로 꾸며진 가락으로 고요하게 시작하여 잔잔하게 속삭이는 가락으로 이어진 후, 급속한 템포로 고조되었다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으면서 끝난다. 2장은 사랑스러운 중중몰이 가락이 주인공의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3장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기교적인 악장이고, 마지막 4장은 애절한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하는 진양조 풍의 가락으로 되었다.

곡을 완성한 후 곡명을 ‘밤의 소리’라고 붙였다. 제일 처음으로 집사람에게 들려주었더니, 곡은 좋은데 ‘밤의 소리’라는 곡명이 이상하다고 했다. 아름다운 음악에 왜 하필 ‘밤의 소리’라는 음흉스러운 이름을 붙이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에 들리는 소리이니 ‘밤의 소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설명에 따르면 ‘밤의 소리’와 <성재수간도>, 추성부와의 연관성은 곡의 1장에 한한 것일 수도 있다. 황병기선생이 나중에라도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고 ‘밤의 소리 2’ 같은 곡을 작곡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1장부터 전혀 다른 느낌의 곡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거나 황병기선생의 ‘밤의 소리’는 이후 본인 외에도 수많은 가야금 주자들에 의하여 연주되고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참고 및 인용 : 중국의 명문장 감상(김창환, 2011, 한국학술정보), 안중식의 <성재수간도>(김달진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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