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진재 김윤겸 - 영남기행화첩 2

從心所欲 2020. 10. 16. 17:55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태종대(太宗臺)> 지본담채, 29.6 x 46.1cm]

 

1740년에 제작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태종대는 동래부의 남쪽 30리 되는 절영도의 동쪽 바닷물이 돌아가는데 서쪽에 돌다리가 하나 있어 놀이 오는 사람들이 겨우 통할 수 있다”고 했는데 김윤겸의 그림에도 바위 사이로 얼기설기 짜놓은 사다리 모양이 보인다. 태종대는 부산 영도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는 구릉 지역으로, 파도의 침식으로 형성된 100m 높이의 해안 절벽과 울창한 해송, 기암괴석이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루어 예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부산의 대표적인 명승지였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가 순행하다 이곳의 절경에 취해 활을 쏘면서 즐긴 것에서 유래되어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어지는 화첩의 그림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居昌)의 <송대(松臺)>, <가섭암(迦葉菴)>, <가섭동폭(迦葉衕瀑)>, <순암(蓴巖)>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안음현(安陰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1767년에 안의현(安義縣)으로 고을명이 바뀌었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부터 1796년까지 현감을 지냈고, 관아재 조영석(祏)도 1738년부터 1743년까지 현감을 지냈던 고을이다.

 

안의현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여러 갈래의 산줄기에 둘러싸인 산간분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변 계곡의 산수가 빼어나 예로부터 영·호남 최고의 명승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예전에는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동천(洞天)이라고 불렀는데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란 의미도 있다. 안의현에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하여 화림동(花林洞), 원학동(猿鶴洞), 심진동(尋眞洞) 등 영남에서 손꼽히는 동천이 세 군데가 있었다. <송대>, <가섭암>, <가섭동폭>, <순암>은 모두 원학동(猿鶴洞)에 속해있다.

원학동의 범위는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시작하여 진동암(鎭洞巖)을 거쳐 위천면의 수승대(搜勝臺)에 이르고, 다시 갈천동(葛川洞)을 거쳐 계곡 상류의 사선대(四仙臺)에 이르는 공간을 통틀어 말하는데 지금의 월성계곡 지역이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안음현 지도 속의 안의삼동(붉은 색)과 지금은 수승대(搜勝臺)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수송대((愁送臺).초록색]

 

[1871년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수록된 안의현 지도 속의 안의삼동]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송대(松臺)> 지본담채, 30.4 x 41.7cm]

 

송대(松臺)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의 사선대(四仙臺)를 가리킨다. 길이 5.5km의 월성계곡 상류 계곡 가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바위가 4층으로 포개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준길(宋浚吉, 1606 ~ 1672)이 월성동에 은거했다 하여 송대(宋臺)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으나, ‘송대(宋臺)’라는 명칭은 문헌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송대(松臺)로 불리게 된 것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노닐던 곳에 후학들이 대를 쌓고 사당을 짓고 소나무를 심어 주위에 소나무 숲이 울창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림 오른쪽에 층층이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는 바위가 송대이다.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가섭암(迦葉菴)> 지본담채]

 

거창군 위천면 금원산의 중턱에 있던 고려 중기나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자이다. 석굴을 법당으로 사용한 석굴사원의 형태로 유지되어 왔으나 자세한 연혁이 전하지 않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전하는 유물로는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있다.

 

[가섭암지(迦葉庵址) 마애여래삼존입상(磨崖如來三尊立像). 동굴 바위에 새겨진 고려 시대 불상, 보물 제530호, 문화유산채널사진]

 

[1736년 ~ 1767년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 수록된 안음현 지도 속의 가섭암]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가섭동폭(迦葉衕瀑)> 지본담채]

 

가섭동폭(迦葉衕瀑)은 가섭암(迦葉菴)으로 가는 길의 폭포라는 의미로 보이는데 금원산 인근 유안청계곡(儒案廳溪谷)의 유안청폭포를 그린 것이다. 유안청계곡은 조선 시대 유생들이 공부하였던 공부방인 유안청(儒案廳)이 인근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폭포의 이름도 그때부터 바뀌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안청폭포는 1폭과 2폭, 두 개의 폭포가 있는데 그림은 길고 완만한 바위 자락을 따라 물살이 빠르게 내려가는 제2폭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순암(蓴巖)> 지본담채, 30.4 x 41.7cm]

 

거창군 북상면 창선리 월성 계곡 중상류 지점의 장군바위와 그 아래의 순암, 분설담(濆雪潭)을 압축하여 그린 것이다. 바위벼랑이 순암(蓴巖)인데 순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분설담은 물이 쏟아지면서 부서지는 모양이 마치 눈이 흩날리는 것 같다는 작은 소(沼)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