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從心所欲 2020. 9. 9. 10:21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는 화원화가인 한시각(韓時覺, 1621 ~ 1691 이후)이 현종5년인 1664년, 함경도 길주목(吉州牧)에서 실시된 문무과(文武科) 과거시험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두루마리 형태로 된 이 그림의 첫머리에는 ′북새선은(北塞宣恩)′이라는 제목이 예서체로 쓰여 있어 <북새선은도>로 불린다. ‘북새(北塞)’는 북쪽에 있는 국경(國境)이나 변방(邊方)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함경도를 이른다. ‘북새선은(北塞宣恩)’은 이 지역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북새 지역의 백성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의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헌종 4년인 1663년에 함경도에 큰물이 지고 메뚜기의 해가 발생했는가 하면,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고 전염병도 번졌다. 그 다음 해인 현종 5년에도 함경도 단천군(端川郡)에 열병이 번져 38명이 죽고, 갑산부(甲山府)에는 음력 4월에 눈이 내렸다. 또 5월에는 함경도에 굶주린 백성이 1만 1천 8백 43인, 전염병으로 사망한 자가 65인, 병으로 죽은 소와 말이 50여 마리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어 경원(慶源), 안변(安邊), 정평(定平), 단천(端川) 등에서도 전염병으로 37인이 또 죽었다. 당연히 지역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과거 여진족이 살고 몽고가 점령했던 지역이기도 해서 이 지역의 민심이 흉흉하다는 것은 국방과도 연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인데, 정작 당시의 함경도 감사 서필원(徐必遠)은 대사간으로 있던 때에 올린 상소가 빌미가 되어 연일 조정에서 논박을 당하자 이를 해명하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결국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등에서 서필원을 파직시키거나 체직시키자는 소가 계속 올라오자 서필원도 함경감사직을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연달아 올려 결국 체직되었다.

 

조정에서는 일찍부터 이 지역의 민심 동요를 염려하여 현종 5년 2월에, 사간 민유중(閔維重)이 이곳에 ‘근신(近臣)을 보내 민정을 탐문하고 이어 과거를 실시하여 그 쪽 사람들 마음을 위로할 것’을 청하였고, 이에 조정에서 논의 끝에 과거를 가을로 연기하여 치르도록 결정하였다. 실제 과거시험은 그해 음력 7월에 치러졌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이다.

<북새선은도>는 전체가 근 7m에 달하는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으로 안에는 두 개의 그림이 들어있다. 첫 번째 그림은 문무과의 시험 장면을 그린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이다.

 

 

[한시각 <북새선은도> 앞부분과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 견본채색, 전체길이 57.9 x 674.1cm, 국립중앙박물관]

 

칠보산(七寶山)을 비롯한 길주의 산들이 수평으로 줄지어 배경을 이루고, 타원형의 성곽 안쪽에 있는 관아 건물에서는 문과 시험이, 오른쪽 너른 마당에서는 말 타고 활쏘기를 하는 무과시험이 치러지고 있다.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진 산은 구불구불한 윤곽선을 따라 붓을 세워 태점을 찍어 나타내었고, 먼 산은 흰 가루를 이용해 간략하게 처리했다. 산 가운데 삐죽삐죽하게 보이는 산은 길주성에서 40리 떨어진 칼산(刀山)이라고 한다.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부분 확대]

 

《현종실록》에는 이 과거시험을 위하여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을 북도의 시관(試官)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니 건물 안 병풍을 배경으로 책상을 앞에 두고 앉은 이가 과거시험의 총감독관인 김수항일 것이다. 건물은 길주 객사인 웅성관(雄城館)이다. 문과 응시생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그림 앞쪽의 초가건물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인지, 시험지를 낸 뒤 모여 잡담하는 것인지는 구분이 안 된다. 정상적인 과거시험은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하면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2차 시험을 치러야 했지만, 이때에는 특별히 중앙의 시험을 면제하고 이 날의 시험만으로 급제자를 뽑았다. 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한 우대책이었다.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부분]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부분]

 

오른쪽 무과 시험장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사람 형상의 표적을 맞추는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표적 사이사이에 4명씩 앉아 있는 사람들은 판정관이다. 표적에 명중하면 붉은 기를 올리며 징을 치고, 빗나갔을 때는 백기를 올리고 북을 울렸다고 한다.

 

《현종실록》현종 5년(1664년) 7월 21일 기사다.

【함경도 취재(取才) 때의 성적 순위, 합격자 발표 등의 일을 품의하여 정하고자 하였는데, 영상 정태화가 마침 궐내에 있었으므로 상이 불러들이게 했다. 태화와 명하가 상의 앞에서 의논한 다음 문과는 3인만 취하고 무과는 남북도를 합쳐 3백인을 취하되, 문과는 시험 답안지와 성적 순위를 올려 보낸 후, 김수항(金壽恒)은 그대로 머물러 무재(武才)를 시취하고, 합격자 발표가 내려오기를 기다려 함흥(咸興)에서 합격자 발표를 하는데, 사화(賜花)와 홍패(紅牌)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유지(有旨)를 가지고 내려 보냄으로써 사기를 고무시켜 주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화(賜花) : 임금이 문무과(文武科)에 급제(及第)한 사람에게 종이로 만들어 내려준 꽃. 어사화(御賜花).

▶홍패(紅牌) : 국가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발급한 급제증서. 붉은 바탕의 종이에 급제자의 성적(成績), 등급(等級) 및 서명(署名)을 먹으로 적었다.

 

이 기사대로 길주과시에서는 문과 3인, 무과는 무려 300인을 뽑았다. 그리고 과거가 끝난 석 달 뒤인 10월 함흥에서 열린 방방의(放榜儀) 장면을 그린 것이 두 번째 그림인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이다. 방방의(放榜儀)란 합격자를 일일이 호명하여 홍패와 어사화를 수여하는 의식이다.

 

[한시각 <북새선은도> 중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

 

그림에는 행사에 쓰일 홍패와 어사화가 탁자 위에 놓아있는 것은 물론 함흥 성내의 여러 관아 그리고 성 밖의 만세교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다. 방방의 의식은 함경감사가 주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의 함경감사는 서필원의 후임인 민정중(閔鼎重)이었다. 민정중은 이전에 이조참판과 대사성을 지냈다.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 부분]

 

대궐에서 문관은 오른쪽에, 무관은 왼쪽에 자리 잡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에 문과 합격자 3명이 섰고, 왼쪽에 있는 무과 합격자들이 호명되어 어사화와 홍패를 받는 중이다. 문 밖에 있는 열여섯 명은 관아 뜰이 좁아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무과 합격자들이다.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 왼쪽 부분]

 

<북새선은도>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궁중화원을 파견하여 그린 그림이 아니라, 함경도 관찰사 민정중이 개인적 부탁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당시로서는 귀한 채색 고급 안료를 사용하여 대형 기록화를 남긴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한다.

 

[<북새선은도> 중 길주과시 시험관 및 감독관 등 관리명부]

 

[<북새선은도> 중 길주과시 급제자 명단]

 

이 그림은 1913년, 일본인에게서 구입하였으나 그 후로 박물관 수장고에만 있던 작품을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1977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이태호 명지대 교수가 이 그림을 연구하면서 1644년 길주에서 열린 무과 시험과 그해 가을 함흥에서 열린 합격자 발표행사를 그린 것임을 밝혀냈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윤철규(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의 ‘한국미술명작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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