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從心所欲 2020. 8. 7. 09:21

외국에 간다는 것이 아주 특별한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불과 몇 십 년 전 일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몇 백 년 전에도 있었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외국에 간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 중국을 방문한다는 의미였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중국에 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사절단의 공식적인 방문 말고는 개별적으로 왕래한 기록은 거의 없다. 물론 그때도 국경을 통제했겠지만 그보다는 낯선 이국땅을 개별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어려움과 위험이 예상되기 때문에 쉽게 마음 먹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외국여행은 사행단에 끼는 길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약 500회 정도의 중국 사행(使行)이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때는 천자(天子)에게 조공 간다는 의미를 담아 ‘조천(朝天)’이라 하다가, 청나라 때는 연경((燕京)에 가는 일이라 하여 ‘연행(燕行)’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행단은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역관(譯官), 의관(醫官), 화원(畵員) 등의 공식적인 정관(正官) 30여 명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같이 따라가는 ‘종인(從人)’까지 합하면 3백 명 내외의 규모였다고 한다. 이 사행단에 끼어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도 중국을 다녀왔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들의 중국 방문이 꽃길만은 아니었다. 우선 이 여행길은 수백 명이 함께 중국으로 출발해서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조선에 돌아오기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리는 길고 고된 여행이었다. 또한 시대에 따라 중국으로 가는 길도 달랐는데, 중국의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육지를 피해 바닷길로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바닷길에는 항시 조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이런 사행에는 어떻게 하면 사행에서 빠질까 고민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육지로 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도 아니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봐도 생명의 위험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평생 중국 책을 읽고 중국의 현인들을 흠모해온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기회만 된다면 중국에 가서 그곳의 문물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했다. 강세황도 그 중의 하나였다. 1778년, 박제가(朴齊家)가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자 강세황은 박제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중국에 출생하지 못한 것이 한이며,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학자들을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놓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어떻게 날개가 돋칠 수가 있을까."】

 

당시 66세의 강세황은 중국에 한번 가보고 싶은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그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6년 뒤인 1784년 10월, 72세의 강세황은 그 꿈을 이루게 된다. 청 건륭제가 50년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린 것을 축하하는 천수연(千叟宴)에 참석하고 겸하여 중국에 표류한 조선인을 돌려보내준 것에 대한 사례를 위한 사행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가게 된 것이다. 이 ‘진하사은 겸 동지사행(進賀謝恩兼冬至使行)’의 정사는 이휘지(李徽之)였고, 강세황은 부사(副使), 서장관은 이태영(李泰永)이었다.

▶이휘지(李徽之) : 1715 ~ 1785. 이조참의, 홍문관대제학, 규장각제학, 우의정을 역임하였으며 1781년에는 영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1782년에는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784년 중국 사행을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호는 노포(老圃).
▶이태영(李泰永) : 1744 ~ 1803. 홍문관의 종6품 관직인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을 때 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황해도, 경상도, 충청도,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아래는 이때의 사행사 일행의 행적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 민길홍 학예연구사의 글이다.

 

강세황 일행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길에 접한 아름다운 경치를 화폭에 담고, 글로 같이 읊어 시화첩을 제작하였다. 사로(槎路)에서 만난 기이한 세 가지 경치를 담은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과 북경 호수에서 펼쳐진 빙희(氷戱)를 그린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은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의 삼사(三使)가 함께 그림과 시로 사행의 경험을 담은 시화첩으로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이 두 화첩에는 공통된 글자가 있다. 바로 ‘기(奇)’이다. 눈앞에서 목도하는 신기한 장면을 채택하여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압권은 <영대빙희(瀛臺氷戱)>다. 청나라 건륭제의 초청으로 천수연에 참가하게 되었던 강세황 일행은 북경의 호수 한복판에서 벌어진 빙희를 관람하게 되었고, 그 기이한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사로(槎路) : 사행길
▶빙희(氷戱) : 얼음 위에서 펼치는 묘기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 筆「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中 <영대빙희(瀛臺氷戱)>, 각 쪽 23.3 x 13.7cm, 국립중앙박물관]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中 <영주누각(瀛洲樓閣)>, 각 쪽 23.3 x 13.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원형의 도장 “삼세기영(三世耆永)”을, 왼쪽 상단에는 방형의 도장으로 강세황의 자 “광지(光之)”를 새겨 찍었다. 이 시화첩은 가로로 펼쳐 마치 횡권처럼 전체를 연결하여 보아야 전모가 드러나며 본래의 성격을 살필 수 있다. 북해의 백탑(白塔)을 배경으로 한 중해(中海)에 위치한 정자인 수운사(水雲榭) 근처에서 벌어진 빙희연을 4면에 걸쳐 그린 것이다. 웅장한 북경 중남해 얼어붙은 호수의 경치를 담고 있다.

 

[「영대기관첩」中 <영주누각>과 <영대빙희>]

 

1784년 12월 21일 건륭제는 이곳에서 빙희연을 베풀었고, 조선의 사행단 일행도 그 행사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영대빙희”는 조선 사신들이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빼놓지 않고 구경하는 볼거리였다. 빙희는 북방에서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던 만주족의 풍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팔기군의 무예 증진을 위한 풍속이었다. 홍살문 사이로 지나가면서 무관들이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진기한 무예를 선보였다. 삼사는 귀국하여 1785년 2월 14일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2월)21일에는 황제가 영대(瀛臺)에서 빙희를 구경하였습니다. 그날 당일 새벽녘에 신 등이 서화문(西華門) 밖에 도착하였는데, 섬라 사신(暹羅使臣)이 신 등의 다음 자리에 섰습니다. 잠시 후에 황제의 난여(鑾輿)가 나와서 국왕이 편안한가를 물었으므로 신 등이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 등이 걸어서 영대 가로 따라가니, 얼마 뒤에 황제가 빙상(氷牀)을 탔는데 모양이 용주(龍舟)와 같았습니다. 좌우에서 배를 끌고 얼음을 따라가는데, 얼음 위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거기에 홍심(紅心)을 달아놓았습니다. 팔기(八旗)의 병정들로 하여금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신발 밑바닥에는 목편(木片)과 철인(鐵刃)을 부착하고,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앉아서 홍심을 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달리면서 꼴로 만든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섬라(暹羅) : 타이(Thailand)의 예전 이름인 시암(Siam)의 한자음(漢字音) 표기.

 

빙희연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현재 북경 자금성 근처 중해로 불리는 호수다. 북해는 현재 북해공원으로 조성되어 북경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중남해는 현재 후진타오 주석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 일반인들 및 관광객들의 접근은 제한되어 있다. 예전부터 이곳은 황제의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영대빙희”는 강세황뿐 아니라 많은 조선 사람들이 연행록을 통해 기이한 장관으로 소개하였던 볼거리 중의 볼거리였다.

세로가 불과 23cm 정도 되는 작은 그림이지만, 72세의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갈망하며 떠난 사행길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그림을 이어 삼사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이 빙희에 대한 감상을 읊은 시 3수가 실려 있어 함께 여흥을 나누고 있다.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 筆「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中 표지 대제 <영대기관(瀛臺奇觀)> ]

 

[「영대기관첩」中 이휘지 시]

 

[「영대기관첩」中 강세황 시]

 

[「영대기관첩」中 이태영 시]

 

[「영대기관첩」中 <노송(老松)>]

 

[「영대기관첩」中 <석국(石菊)>]

 

북경으로 가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에서 마지막 채비를 점검할 때에도 그는 부채 위에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를 그렸고, 돌아오는 길에도 중국 땅 봉황성(鳳凰城)에서 시험 삼아 중국 종이 위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려 조선의 종이 위에 그린 것과 과연 다른가 비교해 보는 등 붓을 놓지 않는 적극적인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1784년 사행의 결과물인 강세황의 그림들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다양하고 흥미진진하다. 한참을 간절하게 염원하며 기다렸던 사행길. 강세황은 부사(副使)라는 외교적인 중책을 맡고 떠난 사행길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그 생생한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었고, 평생 꿈꿔오던 사행을 드디어 이루어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강세황 <고목죽석도> 부채, 국립중앙박물관]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은 '배를 타고 가는 사행길인 사로(槎路)에서 만난 세 가지 기이한 경치를 담은 첩'이라는

의미다. 구성은 「영대기관첩」과 유사하지만, 각각의 그림과 그 경치에 대한 삼사의 제화시가 나란히 오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분량은 더 많다.

 

첩 첫머리에 내제(內題)로 “槎路三奇” 네 글자를 썼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기이한 경치는 계주(薊州)의 ‘계문연수(薊門烟樹)’, 북경 이화원의 누각 풍경인 ‘서산(西山)’,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묘(이제묘)가 있는 ‘고죽성(孤竹城)’이다.

사행일정 순서대로 하자면, 산해관을 지나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고죽성이 제일 앞이고, 계문연수, 서산의 순서가 되어야 하지만 시화첩에는 실제 여정과 상관없는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강세황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중 표지 대제 <사로(槎路)>, 각 쪽 13.4 x 23.3cm, 국립중앙박물관]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중 표지 대제 <삼기(三奇)>]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중 <계문연수(薊門煙樹)>]

▶계문연수(薊門煙樹)는 계주(薊州)의 성문인 계문(薊門) 지역의 울창한 나무들이 안개 사이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말한다. 계주는 지금의 천진시(天津市)의 계현(薊縣)이다.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중 <서산(西山)>]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중 <고죽성(孤竹城)>]

▶고죽성(孤竹城) : 고죽국은 중국의 상(商)나라가 멸망한 뒤에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설화와 관련된 나라로, 중국의 요서(遼西) 지역에 위치했던 제후국이다. 「요동지(遼東志)」 지리지에 의하면 고죽성은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 <강녀묘(姜女廟)>는 첩의 맨 마지막에 따로 첨부된 그림이다. 강녀묘(姜女廟)는 중국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울음으로 무너뜨렸다는 만리장성 축성공사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의 열녀인 맹강녀(孟姜女)의 묘로, 산해관 밖 남쪽

언덕에 있다고 한다.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중 <강녀묘(姜女廟)>]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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