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이인문 - 강산무진도

從心所欲 2020. 8. 4. 14:12

이인문(李寅文, 1745 ~ 1824 이후)은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이자 같은 도화서(圖畫署) 화원으로 서로간의 친분도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인문은 문인화풍과 화원풍의 필치를 모두 체득하여 이를 혼합한 특유의 화풍을 이룩하였고 산수, 포도, 영모(翎毛), 도석인물(道釋人物)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특히 송림(松林)을 즐겨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많은 호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한 것을 보면 ‘늙은 소나무와 흐르는 물’이 있는 풍경을 진정으로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인문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견본담채, 24.3 x 33.6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문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지본담채, 29.0 x 36.5cm, 호암미술관]

 

김홍도와 이인문보다 약 25년 아래인 신위(申緯, 1769 ~ 1847)는 자신의 시집인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서 이인문에 대하여 이렇게 읊었다.

“선대의 임금을 모시던 화원 가운데 묘수로 그대와 늙은 단원을 꼽았더니

눈에 스쳐가는 아지랑이 구름인 양 단원은 보이지 않고

도인(道人)만 화실에 앉아 여전히 세상에 있네.

도인은 팔십 평생을 티끌 세상에 머물렀어도

늙은 솔 흐르는 물과 같은 몸을 잘도 키워왔구나.

그림 속의 수척한 얼굴은 응당 자신을 그린 것이려니

저기 상대하는 이는 또 무엇 하는 사람일꼬.“

▶도인(道人) :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

 

글로 미루어 김홍도와 이인문은 그 당시 궁중화가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실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뒷날의 유재건(劉在建, 1793 ~ 1880)도 308명에 달하는 위항인의 전기(傳記)를 모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구불구불 치솟은 가지와 시원하고 짙푸른 잎은 기세가 당당하여 정말 소나무와 같았다. 사람들은 이인문을 신필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김홍도와 이인문은 모두 산수화, 인물화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김홍도가 선구적으로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그렸던 데에 반하여, 이인문은 풍속화보다는 관념적인 산수인물이나 정형산수를 즐겨 그렸다.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송하한담’이라는 주제가 이인문이 즐겨 택했던 소재였다. 이인문은 필묵의 기량을 바탕으로 이런 관념적 산수화에 더 원숙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당대에는 기량이나 격조 면에서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었으면서도, 지금 김홍도에 비하여 이인문의 인지도가 낮은 것은 독창성에서 김홍도에 뒤진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우리 것으로서의 미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개성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인문은 조선 회화사에 길이 남을 대작이자 걸작을 남겼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이다.

이 그림은 비단 횡권(橫卷)에 그려졌는데 두루마리 속의 그림 부분의 크기만 해도 그 길이가 무려 8m 56cm에 달한다. 조선에 거의 유래가 없다고 할만한 대작이다.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5개의 비단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견본수묵담채, 43.8 x 856.0cm, 국립중앙박물관]

 

장황(裝潢) 겉면 제첨(題簽)에 ‘강산무진도’라는 그림 제목이 쓰여 있지만 이인문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붙인 제목은 아니고 후대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강산무진도>는 처음부터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깎아지른 기암절벽 사이사이까지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소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인문답게 수많은 소나무도 등장한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1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2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3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4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5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6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7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8번]

 

그림은 처음에는 나지막한 산과 고요한 강줄기로 시작하여 점차 왼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난해진다. 그에 따라 산세를 묘사하는 준법도 달라진다. 이렇게 다양한 동양화의 준법이 총동원된 그림도 드물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그림에는 부벽준과 미점준을 포함한 각종 준법이 사용되었다.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준법의 구사를 통한 산세의 묘사와 아주 작고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꼼꼼한 묘사가 어우러져 시선을 옮길 때마다 어느 한 곳도 지루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라고 한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9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10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11번]

 

들여다볼수록 그림 속의 산과 괴석, 건물들이 정겹기 보다는 많이 낯선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하여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과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조선의 산과 조선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경치를 그린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는 그림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순히 ‘중국적인 그림’이라고만 보고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자연 본연의, 인간 본연의 심상을 반영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겠다.”라고 평했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12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13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오른쪽에서 14변, 마지막 부분]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마지막 인장 부분 확대]

 

이인문의 낙관 오른쪽과 위에 김정희(金正喜) 백문방과 추사진장(秋史珍藏)이라는 주문방이 있어 한때 추사 김정희가 간직했던 그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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