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도(冊架圖)는 서책과 문구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완상용 기물들을 함께 보여 주는 그림이라고 설명된다. 책가도라고 했으니 당연히 책가(冊架) 또는 서가(書架)가 있어야 하지만 책가가 없는 그림도 책가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흔하다.
정조의 어록(語錄)을 수록한 「일득록(日得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좌 뒤의 서가(書架)를 돌아보며 입시한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도 보이는가” 하시었다. 대신들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書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책 끝의 표제는 모두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썼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는 오직 장자(莊子)만을 썼다.”
그리고는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즈음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완전히 나와 상반되니,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대체로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 두기 위한 것도 있다.”】
▶경사자집(經史子集) : 경부(經部), 사부(史部), 자부(子部), 집부(集部)의 준말로서, 동양의 전통적인 도서 분류법이다. 경부에는 사서오경, 사부에는 역사책, 전기문과 관청의 각종 문서, 자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 집부에는 개인의 문집이 포함된다. |
이것은 1791년의 일이었다.
정조가 대신들에게 실제 책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설명한 것을 보면, 정조가 보여준 책가도(冊架圖) 병풍은 당시의 대신들에게도 낯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이라고 한 말에 따르면, 정조가 화가들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가도의 원조는 정조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1784년의 차비대령 화원 녹취재의 문방(文房) 화문(畵門)의 하나로 이미 ‘책가(冊架)’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어 혼란이 생긴다. 또한 그 1년 전에 문방도(文房圖)라는 용어도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지금 문방도로 전하는 그림들은 책가도와 큰 차이가 없다.
이 병풍차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단만수(團萬壽)' 문양이 새겨진 장막 안에 책과 두루마리, 다양한 완상용 기물과 벼루, 필통과 같은 문구류들이 그려졌다. 어찌 보면 기명절지화의 확장판처럼도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그림이라면 정조가 굳이 신하들에게 진짜 책이 아니라고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병풍에는 책가(冊架)에 책만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입체감이 떨어져 보이기는 하지만 얼핏 서가에 책을 쌓아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병풍은 이렇게 책가에 책만 있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지금 전하는 책가도 또는 책거리 병풍에는 책과 함께 다른 기물들이 그려진 것들이 많다.
어쩌면 그것이 이전의 책가도를 그리는 방식이었을 지도 모른다. 기명절지도의 오랜 전통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그런데 정조가 오직 책가에 책만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하여 신하들에게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다.
이형록(李亨祿, 1808 ~ 1883 이후)은 도화서 화원으로 특히 책가도를 잘 그렸는데, 그의 조부와 부친도 모두 화가로 문방(文房)에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 말기의 문인인 유재건(劉在建)은 자신의 문집인 「겸산필기(兼山筆記)」에 “나에게는 그가 그린 여러 폭짜리 문방도(文房圖) 병풍이 있는데, 사람들이 방안에 놓인 병풍을 보고는 서가에 책이 가득 찬 것으로 착각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보고는 속은 것에 어이없어 웃곤 하였다. 그 그림의 정묘한 것이 마치 실물과 같았다.”고 이형록의 솜씨를 칭찬했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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