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21 - 평생도 1

從心所欲 2020. 12. 22. 05:25

평생도(平生圖)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일생을 통해 겪을 수 있는 부귀영화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돌잔치인 초도일(初度日)부터 시작하여 혼례, 과거 급제, 관직 진출과 출세, 부부가 해로하여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회혼례(回婚禮)까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대부가 누릴 수 있는 평생의 중요한 사건과 의례를 담는다. 그러나 평생도는 기록화가 아니라 길상적 요소를 담은 일종의 풍속화이다. 이러한 평생도는 18세기 후반 풍속화의 발달과 더불어 탄생한 화제(畫題)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하는 평생도 중에서는 김홍도(金弘道) 작품으로 알려진 <모당 홍이상공 평생도(募堂 洪履相公 平生圖)>와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傳 金弘道筆淡窩洪啓禧平生圖)>가 유명하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 ~ 1615)은 선조와 광해군 대에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 1703 ~ 1771)는 영조 때에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고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했지만, 사후에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주범으로 지목되고 그의 두 손자가 정조를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관작이 추탈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높은 관직에 오른 공통점이 있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는 8첩 병풍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병풍에 있는 관지를 근거로 김홍도의 1781년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19세기에 제작된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는 돌잔치, 혼례식, 응방식(應榜式), 한림겸수찬(翰林兼修撰), 송도유수도임식(松都留守到任式), 병조판서시(兵曹判書時), 좌의정시(左議政時), 회혼식(回婚式)의 여덟 폭으로 되어 있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견본담채, 제1폭 초도호연(初度弧筵), 화면 75.1 x 39.4cm, 국립중앙박물관]

 

돌의 한자식 표현이 초도일(初度日)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전통의 돌잔치 풍습에 대하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일생의례사전』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돌에는 아이에게 돌 빔을 지어 입히고 잔칫상을 차려 돌잡이를 하는 것으로 생후 1년이 되었음을 기념한다. 돌 빔은 이전까지 입던 흰색 위주의 옷에서 벗어나 원색 옷감으로 화려하게 만들고, 쓰개에서부터 신발, 장신구에 이르는 일습을 모두 갖추어 입힌다.

돌날 아침에는 삼신상(三神床)을 마련하여 아이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가족이 모여 미역국과 쌀밥을 나누어 먹는다. 또한, 가까운 친척과 지인을 초대하여 잔치를 여는데, 이때 돌상 위에 활과 화살, 책과 붓, 쌀과 돈, 실타래, 가위와 자 등 성별에 따라 다양한 물건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가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 돌잡이를 한다.

아이를 위한 돌상에는 돌잡이 물품과 더불어 여러 가지 음식을 차린다. 그릇 가득 담은 긴 국수 가락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흰쌀로만 쪄낸 백설기는 아이의 순진무구함과 티 없이 맑은 신성함을 상징한다. 돌상에는 반드시 수수로 둥근 경단을 빚어 팥고물을 묻힌 수수팥떡을 올리는데, 이는 붉은색 팥이 잡귀를 몰아내고 아이의 액을 물리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돌 이후로 아이가 열 살 혹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매해 생일상에 수수팥떡을 올리는 것 역시 이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그러나 후손이 귀한 가문에서는 오히려 아이에게 해가 된다 하여 돌잔치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2폭 혼인식(婚姻式), 국립중앙박물관]

 

흰 말을 탄 신랑이 신부를 친영(親迎)하여 신랑의 집으로 가는 행렬의 모습이다. 혼인식 장면으로는 대례가 거행되는 대례청(大禮廳)의 광경이 그려지기도 한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3폭 응방식(應榜式), 국립중앙박물관]

 

응방식(應榜式)은 과거급제한 주인공이 악사와 재인(才人)을 앞세워 풍악을 울리며 사흘 동안 스승과 친척을 방문하는 삼일유가(三日遊街)를 뜻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광경이 주로 그려졌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4폭 한림겸수찬(翰林兼修撰), 국립중앙박물관]

 

한림(翰林)은 조선시대에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인 예문관(藝文館)의 정7품 관직인 봉교(奉敎)와 그 아래의 대교(待敎), 검열(檢閱)을 가리키는 말이며 수찬(修撰)은 정8품인 대교(待敎)의 예전 명칭이다. 한림(翰林)은 모든 초임 관리들이 선망하는 청요직(淸要職)의 하나였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5폭 송도유수도임식(松都留守到任式), 국립중앙박물관]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6폭 병조판서시(兵曹判書時), 국립중앙박물관]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7폭 좌의정시(左議政時), 국립중앙박물관]

 

5폭부터 7폭은 순탄하면서도 성공적인 관직생활을 뜻하는 그림들이다. 5폭은 개성의 유수(留守)로 발령받아 임지로 가는 모습, 6폭은 외직(外職)을 마치고 한양에 돌아와 병조판서가 되어 바퀴가 달린 초헌(초軒)을 타고 행차하는 모습, 7폭은 삼공(三公)의 하나인 좌의정이 되어 밤늦도록 국사를 돌보다가 달밤에 퇴근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여기에 등장하는 관직이 실제 홍이상이 지냈던 관직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평생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생도에서는 모든 사대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유수(留守), 관찰사(觀察使), 판서(判書), 의정(議政) 등의 높은 관직 중에서 2 ~ 3가지를 골라 그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평생도가 누군가의 일생을 기록한 기록화가 아니라, 장수, 입신양명, 부귀, 다남(多男) 등 사대부의 이상적인 인생 복록에 대한 염원을 시각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8폭 회혼식(回婚式), 국립중앙박물관]

 

회혼식(回婚式)은 해로(偕老)하는 부부의 혼인 60돌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에서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61세 생일을 의미하는 회갑(回甲),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해를 뜻하는 회방(回榜)과 함께 이 회혼(回婚)을 장수를 축하하는 3대 잔치로 꼽았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평생도는 이 <모당홍이상공평생도>병풍의 내용 구성과 도상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김홍도가 그렸다는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傳 金弘道筆淡窩洪啓禧平生圖)>는 <모당홍이상공평생도>와 구성과 도상에 차이가 있다.

약칭 <담와평생도>는 현재 6폭으로 전하는데, 그 내용은 삼일유가(三日遊街), 수찬행렬(修撰行列), 평안감사부임(平安監司赴任), 좌의정행차(左議政行次), 치사(致仕), 회혼례(回婚禮)로 되어 있다. 본래는 여기에 돌잔치와 혼인식이 들어가 여덟 폭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79년 말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작품이다.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傳 金弘道筆淡窩洪啓禧平生圖)> 6폭 병풍 중 삼일유가(三日遊街), 견본채색, 77 x 38cm,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 6폭 병풍 중 수찬행렬(修撰行列),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 6폭 병풍 중 평안감사부임(平安監司赴任), 국립중앙박물관]

 

여기에는 개성유수 대신에 평안감사를 골랐다. 개성유수는 비록 근무지가 한성이 아닌 개성이라 지방관처럼 보이지만 편제상으로는 외직(外職)이 아닌 경관직(京官職)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 있는 사람은 권력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출세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어차피 지방관으로 한번 나갔다와야 한다면 진짜 지방으로 가는 것보다는 개성유수로 나갔다오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는 생각에 개성유수가 선호되었었다. 하지만 ‘평양감사도 지 싫으면 그만’이라는 옛말에서 알 수 있듯이, 평양감사 또한 지방관으로서는 꽤나 인기가 있던 자리였다. 홍계희의 실제 관직 경력과 평양감사는 역시 연관성은 없다.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 6폭 병풍 중 좌의정행차(左議政行次),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 6폭 병풍 중 치사(致仕), 국립중앙박물관]

 

치사(致仕)는 관리가 70세가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던 제도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당상관으로 치사하는 경우 예조에서 매달 고기와 술을 급여하였다고 한다. 병풍 속의 치사(致仕)는 집의 후원에서 벗과 가족과 어울려 한가하게 지내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가 누리는 노후의 여유로움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회혼례다.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 6폭 병풍 중 회혼례(回婚禮), 국립중앙박물관]

 

순탄한 관직생활로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며 당상관 이상의 높은 벼슬을 하고 70세 이상 장수하였다 하더라도, 60년 넘게 부부가 함께 해로하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다. 그래서 결혼기념일을 중시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도, 혼인 60주년의 회혼만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회혼례는 자녀들이 해로한 부모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현하고, 당사자는 부부가 해로하면서 이룬 다복한 가정과 번성한 자녀들에 대한 기쁨과 보람을 친척과 친지들에게 자랑하는 의례였다.

 

 

 

참고 및 인용 : 한국일생의례사전(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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