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23 - 무이구곡도

從心所欲 2020. 12. 26. 15:48

병풍 제작의 확산과 함께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되던 무이구곡도도 병풍으로 제작되었다. 병풍으로 제작되는 무이구곡도는 두루마리 형식에서 옆으로 펼쳐지던 풍경들이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구성이 변하게 된다.

 

[소치 허련<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병풍> ,10폭 병풍, 지본수묵, 병풍: 175 x 370cm,  국립광주박물관]

 

허련(許鍊)이 남종화풍으로 그린 이 병풍은 마지막 폭에 무인(戊寅)과 소치칠십일지년(小癡七十一之年)이라는 관지가 있어 1878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첨절제사, 정산군수(定山郡守) 등을 지냈지만 구한말의 독보적인 초상화가로 더 잘 알려진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도 여러 점의 무이구곡도를 남겼다.

 

 

[채용신 <무이구곡 10폭병풍>, 지본채색, 병풍: 191.4 x 604.0cm, 국립중앙박물관]

 

위 <무이구곡 10폭병풍>은 제일 처음에 무이구곡 총도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아래의 병풍 또한 특이하게 무이도가 10수를 거꾸로 써넣었다.

관직을 그만둔 이후 직업화가로 살면서 항일지사 최익현(崔益鉉)과 김직술(金直述), 의병장 임병찬(林炳贊)과 기우만(奇宇萬), 한일합방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긴 채 자결했던 황현(黃玹) 등과 같은 우국지사들의 초상을 그렸던 채용신은 1915년 일제가 경북궁에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건물을 훼손하자 이에 대한 울분으로 이 병풍의 무이도가 시를 거꾸로 썼다고 전해진다.

 

[<채용신필 무이구곡도십폭병(蔡龍臣 筆 武夷九曲圖 十幅屛)> 中 1,2폭,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필 무이구곡도십폭병> 中 3,4폭,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필 무이구곡도십폭병> 中 5,6폭,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필 무이구곡도십폭병> 中 7,8폭,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필 무이구곡도십폭병> 中 9,10폭, 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까지 무이구곡도의 소비계층은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들에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화원 화가와 문인 화가, 그리고 무명(無名) 화가에 이르는 폭넓은 층에서 무이구곡도가 그려지면서 그 소비계층도 서민층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대중화의 단계를 거치며 민화(民畵)로 이어지면서 상상력이 가미되어 전통의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양식으로 그려졌다.

 

[<무이구곡도 10폭 병풍>, 144.5 x 491.5cm, 국립민속박물관]

 

[위 <무이구곡도 10폭 병풍> 중 1 ~ 3폭 그림부분]

 

[<무이구곡 10폭 병풍>,  국립민속박물관]

 

[위 <무이구곡 10폭 병풍> 중 1 ~ 4폭 그림부분]

 

[<무이구곡도 10폭 병풍>, 각 폭 107.3 x 41cm, 국립민속박물관]

 

[위 <무이구곡도 10폭 병풍> 중 1 ~ 4폭 그림부분]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속대백과사전(국립민속박물관), 석지 채용신의 1915년 作 《무이구곡도》 10폭 병풍에 관한 연구(정경숙. 2016. 미술사와 문화유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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