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24 -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從心所欲 2020. 12. 27. 19:27

무이구곡은 조선의 유학자들 대개가 동경하는 장소였지만 또한 조선의 유학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 궁금증을 다소나마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이구곡도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내내 그려지며 널리 감상되었던 것이다.

 

무이구곡도가 16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온 이후, 수용기인 16세기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이구곡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주희의 삶을 실천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주희를 따라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명승을 골라 구곡(九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 유학자들은 이를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견하여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겼다. 이는 독창적인 조선의 구곡문화가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이구곡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17세기부터 변화가 생겼다. 즉, 무이구곡에 대한 생각은 이전과 같았지만,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머문 현실 공간 속에 직접 구곡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곡의 경영은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견하여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겼다.

 

이러한 조선의 구곡은 이이(李珥)로부터 시작되었다. 율곡 이이는 36세이던 1571년 황해도 고산(高山)의 석담리(石潭里)를 탐방한 뒤 주변의 명소에 구곡의 이름을 붙이고는 장차 이곳에 은거할 뜻을 밝혔다. 또한 한글로 고산의 구곡을 노래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도 남겼다. 그 뒤 율곡은 2년간의 해주 관찰사직을 마친 1576년에 고산구곡으로 돌아와 기거할 거처로 청계당(聽溪堂)을 세웠고, 1578년에는 청계당 동편에 정사를 짓고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고산구곡에서 본격적으로 은거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이이는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실제로 고산에 은거하지는 못하고, 관직의 임기를 마친 뒤 잠시의 휴식을 위하여 때때로 왕래했을 뿐이었다.

 

고산구곡(高山九曲)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17세기 후반기로, <고산구곡도>에 처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이었다. 송시열은 당시 황폐화된 고산구곡을 정비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차운(次韻)한 시를 짓게 한 뒤, 이를 그림과 함께 목판화로 제작하여 보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시열이 이런 계획은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즉,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이이로부터 이어지는 학통(學統)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삼고, 고산구곡을 이이의 학문적 상징 공간으로 부각시키면서 그 위상을 높여, 자신들의 정치적 결속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고산구곡도>를 활용하려 한 것이다.

 

국보 제237호인 <고산구곡시화도 병풍(高山九曲詩畵圖屛風)>은 제작년도가 1803년으로 송시열 사후 100년도 더 지난 때에 제작된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이 의도했던 바가 무엇이었고 그것이 후세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김득신, 김홍도 외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12폭 병풍 中 일부, 견본수묵담채, 1803년, 137.4 × 562㎝, 국보 제237호, 동방화랑]

 

병풍의 제1폭은 선조 때의 문신 최립(崔岦)이 쓴 ‘고산석담기(高山石潭記)’, 마지막 12폭은 송시열의 5대손인 송환기(宋煥箕)의 발문(跋文)인 ‘석담도시발(石潭圖詩跋)로 이루어졌다.

2폭은 서시(序詩)를 회화화한 ‘구곡담총도(九曲潭摠圖)‘로 시작하여 3폭에서 11폭 사이에 9곡을 나누어 그렸다. 총도(摠圖)와 구곡의 그림들은 김이혁(金履爀), 김홍도, 김득신(金得臣), 이인문(李寅文), 윤제홍(尹濟弘), 오순(吳珣), 이재로(李在魯), 문경집(文慶集), 김이승(金履承), 이의성(李義聲) 등 당대의 이름난 화원과 문인화가들이 그렸다. 실경을 직접 사생한 것이 아니라 현부행(玄溥行)이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다른 고산구곡도를 참고해 그린 것이다. 각 그림에는 율곡 이이가 동자를 데리고 소요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각 폭의 상단에는 당대의 서예가로 이름을 얻었던 유한지(兪漢芝)가 예서(隸書)로 쓴 표제가 적혀 있다. 유한지는 김홍도(金弘道)와 교유하면서 김홍도의 그림에 많은 제서(題書)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 아래 상단부에는 이이가 지은 한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와 이를 송시열이 한역(漢譯)한 시, 그리고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서인계(西人系) 기호학파(畿湖學派) 제자들의 화답하는 시들이 김조순(金祖淳) 등 안동김씨(安東金氏) 일문에 의하여 적혀 있다. 화면의 중단에 그림 위 여백에 적힌 글 역시 안동김씨 김가순(金可淳)이 쓴 제시(題詩)이다.

이로 미루어 이 병풍은 안동김씨 가문에서 자신들이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가문임을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제작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이이가 쓴 한글 시는 그림에 적혀있어, 현대적으로 해석한 글로 옮기면 서시(序詩)의 내용은 이렇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터를 닦아 집을 짓고 살게 되니 벗들이 찾아오는구나.

아! 무이(武夷)를 생각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공부하리라.】

 

[김이혁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2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이이가 정하고 이름붙인 구곡은 제1곡 관암(冠巖), 제2곡 화암(花巖), 제3곡 취병(翠屛), 제4곡 송애(松厓), 제5곡

은병(隱屛), 제6곡 조협(釣峽), 제7곡 풍암(楓巖), 제8곡 금탄(琴灘), 제9곡 문산(文山)이다.

 

【일곡(一曲)은 어디인가? 관암(冠巖)에 해가 비친다.

잡초 우거진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원근의 경치가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사이에 술통을 놓고 벗이 찾아 온 것처럼 바라보노라.】

 

[김홍도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3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이곡(二曲)은 어디인가? 화암(花巖)에 봄기운 가득하네.

푸른 물결에 꽃 띄워 들 밖으로 보내노라.

사람들이 경치 좋은 이곳을 알지 못하니 알려준들 어떠리.】

 

[김득신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4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삼곡(三曲)은 어디인가? 취병(翠屛)에 잎이 우거졌네.

푸른 나무 위 산새는 온갖 소리로 지저귀는데,

작은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니 여름 같지 않게 시원하구나.】

 

[이인문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5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사곡(四曲)은 어디인가? 송애(松崖)에 해 넘어간다.

물에 비친 바위 그림자 온갖 빛에 잠겨 있네.

수풀 속 샘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에 겨워하누나.】

 

[윤제홍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6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오곡(五曲)은 어디인가? 은병(隱屛)이 보기 좋구나.

물가에 세워진 정사(精舍)는 맑고 깨끗하기 한이 없다.

이 속에서 학문도 하려니와 달과 바람을 읊으면서 풍류를 즐기리라.】

 

[오순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7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육곡(六曲)은 어디인가? 조협(釣峽)에 물이 넓구나.

나와 물고기는 누가 더욱 즐거운가?

황혼에 낚싯대 메고 달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노라.】

 

[이재로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8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칠곡(七曲)은 어디인가? 풍암(楓巖)에 가을빛 좋다.

맑은 서리 엷게 내리니 절벽이 금수(錦繡)로다.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서 속세를 잊었노라.】

 

[문경집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9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팔곡(八曲)은 어디인가? 금탄(琴灘)에 달이 밝다.

좋은 거문고로 몇 곡을 연주해도

옛 곡조 아는 사람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

 

[김이승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10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구곡(九曲)은 어디인가? 문산(文山)에 한 해가 저물도다.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구나.

사람들은 와 보지도 않고 볼 것이 없다 하더라.】

 

[이의성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11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中 12폭, 견본수묵담채, 동방화랑]

 

여러 화가가 그린 이 병풍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과 남종화풍(南宗畵風)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당시의 회화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국어국문학자료사전(1994,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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