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32 - 종정도(鐘鼎圖)

從心所欲 2021. 2. 2. 07:45

종정도(鐘鼎圖)에서의 종정(鐘鼎)은 울리는 종과 음식을 삶는 솥[鼎]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중국에서 제례 때 사용하던 금석(金石)붙이의 의례기(儀禮器)를 의미한다. 이러한 고대의 종정(鐘鼎)에는 공적을 송축하는 글이나 사물의 내력을 기록한 글 등이 새겨졌었는데 이를 명(銘)이라고 한다.

은(殷)ㆍ주(周) 시대의 종정의 명(銘)에 쓰인 글자는 고문, 주문(籒文), 대전(大篆)과 같은 한문 자체(字體)로 종정문자 혹은 종정고문(鍾鼎古文)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들 명문(銘文)은 동양 금석학(金石學)의 대상이었다.

 

종정도는 기명도(器皿圖) 또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와 유사하게 고동기(古銅器)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기물의 형태만이 아닌 기물에 새겨진 문자도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진 그림이다. 따라서 회화적 요소 보다는 학문적 요소가 더 중시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동기와 명문 이외에는 다른 회화적 소재들이 그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조선에서 금석학(金石學)에 대한 관심은 숙종(肅宗), 영조(英祖) 대의 실학파 학자들에 의해 큰 관심을 얻었고 특히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종정도는 조선 말기부터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림의 특성상 일반 서민이 아닌 지식인들 사이에 선호되었을 것이란 짐작도 가능하다.

 

[<준이종정도병풍(尊彛鐘鼎圖屛風)>, 견본채색, 병풍 각 폭 242.5 x 34.5cm 화면 각 폭 155 x 29.8cm, 국립고궁박물관(www.gogung.go.kr) ㅣ 창덕6561]

 

각 폭의 화면마다 각각 다섯 종류의 제례용(祭禮用) 고동기(古銅器)를 그렸다. 제기(祭器)에 붉은색, 주황색, 푸른색, 녹색 안료로 채색하였으며 그 위에 각각의 명칭을 써 넣었다. 그리고 제기의 양 옆에는 ‘자자손손영보용(子子孫孫 永寶用)’이나 ‘만년미수 자손무강(萬年眉壽 子孫無疆)’ 등과 같이 기복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각 제기의 명문을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로 적었다.

준이(尊彛)는 고대 중국의 술을 담는 예기(禮器)인 준(尊)과 이(彛)를 가리킨다. 준(尊)은 여러 가지 술잔의 총칭이고, 이(彛)도 술잔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릇의 형태를 구별하지 않고 청동기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종정도에 등장하는 제기(祭器)들은 주로 주대(周代) 이후의 것들로, 실제 왕실 제례에 사용되는 제기를 그렸다기 보다는 고동기가 지닌 기복적 의미 혹은 고동기에 대한 고증학적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종정도는 자수 병풍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병풍 각 폭 177 x 45.5cm, 숙명여대박물관]

 

[<자수 종정도 6폭 병풍(刺繡鐘鼎圖六幅屛風)>, 병풍 각 폭 153 x 44.5cm, 국립민속박물관]

 

[<자수 종정도 8폭 병풍(刺繡鐘鼎圖八幅屛風)>, 병풍 전체 144 x 234cm, 국립민속박물관]

 

아래의 자수병풍은 짙은 색의 공단 바탕에 금색 명주실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수를 놓았다. 다양한 자수기법을 사용하여 입체적인 효과를 내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병풍은 색상배치와 크기, 자수기법의 수준으로 미루어 궁중의 수방(繡房)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병풍 전체 194 x 415cm, 숙명여대박물관]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중 1,2폭, 숙명여대박물관]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중 3,4폭, 숙명여대박물관]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중 5,6폭, 숙명여대박물관]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중 7,8폭, 숙명여대박물관]

 

[<자수 종정도 병풍(刺繡鐘鼎圖屛風)> 중 9,10폭, 숙명여대박물관]

 

옛 글자에 대한 관심은 종정(鐘鼎) 뿐만 아니라 구리거울[銅鏡], 칼, 와당(瓦當) 등에 까지 다양했다. 아래의 <종정와전명임모도 병풍(鐘鼎瓦甎銘臨模圖屛風)>은 종정의 명문과 함께 와전(瓦甎)의 석문(石文)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병풍은 근대 전환기에 서예가이자 전각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강진희(姜璡熙)가 중국의 고대 와당(瓦當)과 고동기(古銅器) 등에 새겨진 금석문(金石文)을 임모하고 자신이 고증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창덕궁 인정전 실내 사진에 이 병풍이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강진희 <종정와전명임모도 병풍(鐘鼎瓦甎銘臨模圖屛風)>, 비단에 먹, 1916년 作, 병풍 각 폭 270.0 x 45.5cm, 국립고궁박물관]

 

서예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조선과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편술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도 와전문(瓦塼文) 병풍을 하나 남겼다.

 

[<위창 오세창필 와전문 종정문 병풍(葦滄 吳世昌 筆 瓦塼文 鐘鼎文 屛風)>, 비단에 먹, 병풍 각 폭 123.5 x 29.0cm,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및 인용 :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