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34 - 평양성도(平壤城圖) 1

從心所欲 2021. 3. 12. 09:44

현재의 평양과 조선시대의 평양(平壤)은 모두 같은 곳이지만 우리가 갖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지금의 평양은 어딘가 암흑과 공포의 도시 같은 느낌이 앞서지만 조선시대의 평양이라고 하면 대동강이나 부벽루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대개가 말만 들었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우리에게 평양은 이름은 익숙하지만 미궁의 도시다.

 

조선시대의 평양은 조선과 중국을 잇는 사행로의 중심에 있던 도시였다. 영조 때에 조선 각 읍의 읍지(邑誌)를 모은 책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평양을 “서울까지 582리로 엿새 반 거리”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평양의 형세를 “북쪽은 산을 등지고 3면이 물에 막혀 있다”라고 하였다.

 

[평안감사를 지낸 윤유(尹游)가 편찬한 『평양속지(平壤續志)』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1730년]

 

이 그림을 보면 대동강이 평양성 아래쪽에서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이 그림은 위쪽이 서쪽이다. 일반적 지도처럼 북쪽을 위쪽으로 방위를 잡은 상태로 하려면 그림은 아래처럼 바뀌어야 한다.

 

[북쪽을 위로 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사실 이 상태도 정확한 방위는 아니고 그림이 오른쪽으로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야 한다. 실제의 대동강은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약간 기운 상태로 평양의 동쪽을 지나간다. 아래 『해동지도(海東地圖)』속의 평양부(平壤府)와 같은 형태다.

 

[1750년대 초 조선 전국의 군현을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속의 평양부(平壤府)]

 

평양의 동쪽과 남쪽은 대동강이 둘러싸고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흘러 삼면이 물로 막혀 있는 지형이다. 한양에서 평양을 간다면 아래 그림처럼 남쪽에서 영제교를 건너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일명 '십리장림(十里長林)’이라는 백사장 옆의 긴 숲길을 따라 대동강 나루에 도착하여 배로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하여 평양성이 남쪽부터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으로 구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은 고구려가 586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부터 축조되었으나 고구려 멸망 후 황폐해진 것을, 조선 건국 후 다시 쌓았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입어 숙종 때인 1710년에 내성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을 건립하고 이듬해에 다시 30척 높이로 내성의 성곽을 쌓으면서 외성 사이에 중성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동문에서 을밀대로 이어지는 성곽 바깥에도 건물과 성벽이 보이는데 이곳이 평양의 북성(北城)이다.

 

평양성을 그림으로 옮기는 데는 남북 방향으로 길게 화폭을 잡는 것보다는 옆으로 그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작은 평안감사를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1590년에 간행한 『평양지(平壤志)』에 실린 판화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에서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진경산수화와 회화식 지도가 발달하면서 대형 화면에 평양성의 전경(全景)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는 평양성도가 계속 제작되었다. 평양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강과 주변 산천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린 ‘평양성도’ 병풍은 지금 전하는 것만도 수십 점이라 한다. 이들 병풍 형태의 평양성도에서는 평양성이 모두 가로로 길게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평양지도(平壤地圖)>도 그 가운데 하나다. 8폭으로 된 이 병풍은 1871년 이후부터 1888년 사이의 평양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조선 19세기 말, 종이에 색, 각 폭 107.6 × 37.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의 앞쪽 대동강은 8폭에서 서쪽으로 돌아나가 평양성의 뒤쪽에서 흘러나오는 보통강과 만난다. 2폭과 3폭에 걸쳐 그려진 대동강 안의 섬은 능라도(綾羅島)이고 6폭에서 8폭에 걸쳐 그려진 섬이 양각도(羊角島)이다.

옛 그림은 오른쪽부터 보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이 병풍은 예전 한성에서 평양을 찾던 길을 따라 남쪽인 왼쪽부터 보아야 될 듯하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7-8폭, 각 폭 107.6 × 37.5cm, 국립중앙박물관]

 

7, 8폭은 평양성의 외성(外城)이다. 성곽은 돌이 아닌 흙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보인다. 논밭과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것이 눈에 띈다. 7폭 중간에 기자가 살았다는 기궁(箕宮), 기자가 식수로 썼다는 기자정(箕子井) 등이 있다.

8폭 왼쪽 구석의 고갯길이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고갯길을 다 내려올 즈음에 나무 옆에 재송원(栽松院)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달리 건물은 그리지 않았지만 이곳이 역관(驛館)이다. 영제교(永濟橋)를 건너면 평양성과 마주한 십리 숲길을 따라 대동문 건너편의 나루터로 향하게 된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5-6폭, 각 폭 107.6 × 37.5cm, 국립중앙박물관]

 

6폭은 평양성의 중성(中城) 지역이고 5폭부터 내성(內城) 지역이다. 앞쪽에 평양성 내성의 남문(南門)인 주작문(朱雀門)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서문(西門)인 정해문(靜海門)이 보인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3-4폭, 각 폭 107.6 × 37.5cm, 국립중앙박물관]

 

4폭 앞쪽에 평양성의 상징과도 같은 내성의 동문(東門)인 대동문(大同門)이 보이고 그 옆에는 연광정(練光亭)이 위치해 있다. 대동문 넘어 11시 방향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대동관(大同館)으로 중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객관(客館)이다.

대동문에서 1시 방향으로 4폭 중간에 선화당(宣化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선화당(宣化堂)은 조선시대 각 감영에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政廳) 건물이다. 2층 누각인 포정문(布政門)은 감영의 정문으로 일대가 평안감사의 감영이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1-2폭, 각 폭 107.6 × 37.5cm, 국립중앙박물관]

 

2폭은 평양의 북성(北城)이다. 을밀대(乙密臺)로부터 시작하여 U자 모양의 지형을 돌아 건너편의 모란봉(牡丹峰)까지 둘러싸고 있는 평양 북성은 숙종 때 축성된 것이다. 위쪽에 서문인 현무문(玄武門)이 있고 아래쪽이 동문인 전금문(轉錦門)이다. 전금문 안쪽에 있는 영명사(永明寺)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절이다. 원래는 기린굴(麒麟窟) 위쪽에 있었는데 고려 때 기린굴 아래로 이전하였으며 전금문 오른쪽에 있는 부벽루(浮碧樓)는 원래 영명사 범종루(梵鐘樓)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영명사에 승장(僧將)을 두고 승군을 통솔하게 하면서 따로 총섭(總攝)을 두어 평안도의 사원과 승려를 총괄하게 하였다.

 

 

 

참고 및 인용 : 평양성도(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