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36 - 평양성도(平壤城圖) 3

從心所欲 2021. 3. 15. 16:13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1-2폭의 능라도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능라도(綾羅島)는 대동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예로부터 비단 천을 펼친 것과 같이 아름답고 물 위에 뜬 꽃바구니 같다는 칭송을 들으며 비록 8경에는 들지 않지만 평양의 또 다른 형승(形勝)으로 꼽혀왔다.

뒤에 보이는 전금문(轉錦門)은 북성의 남쪽 문이다. 외부 객들이 내성에서 북성을 찾을 때는 배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금전문을 통해 북성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3-4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 내성의 북쪽 지역이다. 앞에 보이는 장경문(長慶門)은 평양성 내성의 동북문이고 뒤쪽의 칠성문(七星門)은 북문이다. 칠성문에서 성곽을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3폭 맨 끝쪽에 기자릉(箕子陵)이 있다.

 

[<평양성도(平壤城圖)> 中 기자릉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기자(箕子)는 은(殷)나라의 성인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동쪽으로 도망한 끝에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의 주인공이다. 고려 중엽 평양에 기자묘(箕子墓)를 찾아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기자동래설은 꽤 오랜 기간 우리나라에서 통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재는 상고사연구의 진전으로 그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잘못 와전되었거나 조작된 전설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평양에 있는 유적들은 모두 고려와 조선시대에 설치된 것이다. 당시에도 기자가 실제로 조선에 왔었다는 의미보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기자를 기념하자는 뜻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양을 기성(箕城)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평양이 옛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수도였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는 즉위년에 기자묘(箕子墓)에서 단군(檀君)을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평양성도(平壤城圖)> 中 평안 감영, 국립중앙박물관]

 

4폭 왼쪽 중간에 선화당(宣化堂)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이 보이는데 이곳이 평안 감영이다. 선화당(宣化堂)이라는 이름은 어느 지역에 특정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政廳) 건물의 공통된 명칭이었다. 말하자면 고을의 동헌(東軒)이나 마찬가지다.

포정문(布政門) 역시 모든 감영의 정문에 붙여지는 이름이었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감영,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장경문과 동양대 지역, 국립중앙박물관]

 

장경문 바로 안쪽에는 연못과 함께 오른쪽으로 경사진 언덕지역이 보인다. 연못은 동양지(東陽池)이고 언덕은 동양대(東陽臺)라고 하는데 동쪽에 있어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 주변의 경치 역시 절승으로 꼽혔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3-4폭 아랫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앞쪽의 작은 섬에 백은탄(白銀灘)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백은탄은 능라도와 반월도 사이에 있던 여울을 가리킨다.

먼 옛날 모란봉 꼭대기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무늬를 새긴 크고 웅장한 은종(銀鐘)이 있었는데, 외적들이 쳐들어오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이 종이 저절로 울렸다고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종을 탐내어 군사를 동원하여 종을 빼앗아 가려 하였지만, 그때도 평양 사람들은 미리 울리는 종소리 덕분에 외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후에 평양 사람들은 은종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청류벽 밑 대동강 물속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 신비로운 이 흰 은종을 감추어 두었던 여울이라 하여 백은탄이라 이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장경문 옆 수구(水口)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5-6폭,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맨 위쪽의 2층 누각 건물에는 우양관(又陽關)이라고 써있는데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성의 서문(西門)으로 세웠던 보통문(普通門)이다. 보통문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성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보통문 일대,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보통문(우양관)과 보통교, 국립중앙박물관]

 

성문 밖에 바로 보통강이 흐른다. 보통강 나루터에서 나그네를 떠나보내는 광경 또한 보통송객(普通送客)이라 하여 8경의 하나로 꼽았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대동관, 국립중앙박물관]

 

보통문에서 밑으로 내려오면 중간에 대동관(大同館)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평양에 만들었던 객관(客館)이다. 평양이 경의가도(京義街道)의 요충으로 조선 초부터 중국 또는 우리나라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며 유숙하던 곳이라 다른 공관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웅장하였다 한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애련당, 국립중앙박물관]

 

대동관 앞쪽 대동문과의 중간 즈음에 못과 애련당(愛蓮堂)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연당(蓮塘)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연당청우(蓮塘聽雨)’ 또한 평양8경 중의 하나이다. 연당(蓮塘)은 건물이 아닌 ‘연꽃이 있는 못’ 즉 연못의 의미로, 애련당(愛蓮堂)을 둘러싸고 있는 연못의 연꽃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운치를 8경의 하나로 꼽은 것이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대동문과 연광정, 국립중앙박물관]

 

애련당에서 다시 밑으로 내려오면 평양성 내성의 동문(同文)인 대동문(大同門)과 그 오른쪽에 연광정(練光亭)이 있다. 성문 밖 나루터에는 많은 배와 함께 물가를 따라 곳곳에 빨래하는 여인들이 보인다.

연광정은 고구려에서 평양성을 건설할 때부터 세워진 정자로 제일누대, 만화루 등으로 불렸었다. 평양8경에 이름이 없는 대신 평안도를 대표하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올라있다. 중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주연이 베풀어지던 곳이고 평안도의 3대 누각으로 꼽히던 곳이다.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연회도(平安監司饗宴圖)> 중 연광정연회도, 71.2 x 196.9 cm,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및 인용 : 평양성도(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향토대백과(2008, 평화문제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