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35 - 평양성도(平壤城圖) 2

從心所欲 2021. 3. 14. 14:40

평양은 조선시대 한성 다음의 제2도시였다. 평양은 조선시대 평안도(平安道)의 군사와 재정을 관할하는 감영(監營)이 있어 물산(物産)이 모이는 중심지였고, 중국으로 오고가는 사행길의 핵심 도시로써 중국과의 국제무역으로 경제유통이 가장 활발한 도시이기도 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평안감사는 조선시대 가장 선망되는 관직이었다. 감사 중에서도 평안감사가 중시되고 선호된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북방의 방어를 위한 국가적 지원이 평안도가 다른 변방(邊方)에 비해 넉넉한 이유도 있었다. 전쟁에 대비한 군비(軍費)로 모아두었던 물자가 전쟁의 위협이 줄어들면서 평안도로 흡수됨으로써 평안도는 조선의 어느 곳보다 재정이 풍부한 지역이 된 것이다. 이러한 평안도의 행정(行政), 사법(司法), 군사(軍事)의 사무를 총괄하고 관할 수령들을 지휘 감독하는 관찰사인 평안감사의 근무지가 바로 평양이었다.

 

평양에는 예로부터 ‘평양 8경’외에도 ‘평양 형승(形勝)’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경치와 명승지가 곳곳에 있었다. ‘형승(形勝)’은 지세와 경치가 빼어나 옛 선조들이 즐겼다는 곳이다. 그런 빼어난 경치에 더하여 평양 기생들의 미모 또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누구라서 평안감사를 마다하겠는가!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면본채색, 163.5 x 377.5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은 일명 서경전도(西京全圖)로도 불린다. 서경(西京)은 고려 시대 평양을 부르던 이름이다. 이 병풍의 병풍차는 청록산수화로 그려졌는데 앞의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보다는 후대인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시나 오른쪽을 북쪽으로 하고 왼쪽을 남쪽으로 방위를 잡아 평양성을 그렸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1-2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북성(北城)과 그 외곽지역이다. 그 유명한 을밀대, 모란봉, 부벽루가 있는 지역이다.

을밀대와 모란봉 일대는 예로부터 명승 중의 절승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을밀대 주변은 높고 낮은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에 둘러싸여 갖가지 나무들과 화초들이 계절 따라 독특한 풍치를 이룬다고 하는데 특히 봄의 을밀대는 ‘을밀대상춘(乙密臺賞春)’이라 하여 평양 8경의 첫째로 꼽혔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을밀대, 모란봉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을밀대(乙密臺)는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의 내성을 쌓으면서 그 북장대(北將臺)로 세운 것으로 을밀봉에 있어 을밀대라고 하였다 한다. 사방이 탁 틔어 있다고 하여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불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숙종 때인 171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을밀대 지역의 축대가 유난히 높아 보이는데 높이가 11m로, 고구려 때 쌓은 것이라 한다.

 

을밀대 맞은편에 모란봉(牡丹峰)이 있다. 병풍차로 보면 일대의 산 전체가 모란봉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산의 이름은 금수산(錦繡山)이다. 금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높이 96m의 최승대(最勝臺)인데 생김새가 마치 피어나는 모란꽃 같다 하여 함박뫼, 모란봉이라 불리다가 점차 산 전체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금수산에는 모란봉 외에도 문봉(文峰), 무봉(武峰)과 같은 이름의 봉우리들이 있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현무문과 선연동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최승대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북장대(北將臺)터였다고 한다. 장대(將臺)는 전쟁 또는 군사훈련 시에 성내의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대장이 자리하는 누대(樓臺)를 가리킨다. 숙종 때까지도 ‘최승대’가 공식 명칭으로 쓰이며 이곳에 자리를 10m 정도 높여 봉화대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란봉 아래에 최승대(最勝臺)라는 누정이 보인다. 1716년에 모란봉 산마루에서 약 60m 가량 내려온 지점에 세운 누정이다. 처음에는 ‘다섯 가지 명승을 구경하는 대‘라는 의미의 오승대(五勝臺)라는 이름이었다가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를 가진 봉우리의 옛 이름인 ‘최승대(最勝臺)’로 바뀌었다 한다.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는 현무문(玄武門)은 평양성 북성(北城)의 북문이다. 현무문 바깥쪽의 선연동(嬋娟洞)은 기생들의 묘지가 있던 곳이라 한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부벽루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북성의 대동강 쪽으로는 부벽루(浮碧樓)가 있다. 부벽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정으로

꼽히던 곳이다. 부벽루는 고구려 광개토왕 때인 393년에 영명사(永明寺)의 부속건물로 세워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영명루(永明樓)’였다. 그러다 고려 때인 12세기 들어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청류벽(淸流壁)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한 누정’이라는 의미에서 부벽루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청류벽(淸流壁)은 부벽루 아래의 절벽 같은 바위들이 아니고 조금 떨어져 있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청류벽과 부벽루,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3폭의 청류벽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부벽루에 올라서면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과 강 건너로 펼쳐진 들판,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보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이러한 풍광을 보고 고려시대의 유명한 시인 김황원(金黃元)은 시심(詩心)을 일으켜, “긴 성벽기슭으로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의 산이 있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이라는 구절을 읊고는 이 글귀 뒤로 더 이상의 시구가 떠오르지 않자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부벽루에서 밤에 동쪽에서 떠오르는 달구경은 ‘부벽완월(浮壁玩月)’이라 하여 일찍부터 ‘평양8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연회도(平安監司饗宴圖)> 중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71.2 x 196.9cm, 국립중앙박물관]

위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의 뒤편으로는 평양성에서 바라보는 대동강 맞은편 풍경이 펼쳐져 있다.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의 산이 있네"라는 시 구절이 딱 들어맞는 듯하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영명사 일대, 국립중앙박물관]

 

영명사(永明寺)는 고구려가 393년 평양에 건설하였다는 9개 사찰 가운데 하나로, 이 지역에는 원래 구제궁(九梯宮)이라는 이궁(離宮)이 있었다 한다. 구제궁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왕궁이며, 기린굴은 동명왕이 기린을 사육하던 굴이라는 전설이 있다.

영명사는 이 이궁(離宮)을 절로 개조한 것인데, 이후 거듭되는 전화로 파괴되어 한때 청류벽 아래에 옮겨지었다가 다시 부벽루 서쪽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고색이 짙은 영명사에 해 질 녘 승려들이 찾아드는 풍경은 ‘영명심승(永明尋僧)’이라 하여 역시 평양 8경의 하나다.

영명사는 청일전쟁 때 소각되어 당시의 칠성각에 영명사의 명판을 달고 있었으나 이마저도 한국동란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참고 및 인용 : 평양성도(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향토대백과(2008, 평화문제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