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37 - 평양성도(平壤城圖) 4

從心所欲 2021. 3. 17. 07:39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5-6폭 아랫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대동문 앞의 나루터가 많은 배들로 꽤나 번잡해 보인다. 사람을 태워 나루를 건너는 배들, 조운하는 배들과 함께 땔감을 가득 실어 나르는 배들도 보인다.

평양 동쪽을 지나는 대동강은 백두산 남서쪽의 낭림산맥에서 발원하는 길이 438㎞의 강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서쪽에서 평양을 감싸고 흐르는 보통강도 결국엔 대동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환영도>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71.2 x 196.9 cm,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7-8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7폭에 평양 내성 남쪽과 서쪽 성벽이 보인다. 중앙에 내성의 남문이 보이는데 <평양지도(平壤地圖)>에 주작문(朱雀門)으로 되어있던 이름 대신 그냥 남문(南門)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내성의 남문을 마주하여 중성(中城)을 사이에 두고 흙으로 쌓은 성곽에 세워진 함구문(含毬門)은 중성의 동남문이다. 중성의 동쪽 마을로 통하는 문이다. 그 위쪽의 정양문(正陽門)은 중성의 남문이지만 인가가 많은 중성의 동쪽으로 통하는 길은 없고 오양현(五陽峴)이라는 작은 산의 뒤쪽을 돌아

보통문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정양문 일대, 국립중앙박물관]

 

보통문과 정양문 사이의 보통강 건너편에는 용악산(龍岳山)이 있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용악산 일대, 국립중앙박물관]

 

일명 용산(龍山)으로도 불리는 용악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평양의 금강산으로도 불렸다. 특히 사철 푸른 나무가 늦가을에도 푸르러 있는 풍경은 ‘용산만취(龍山晩翠)’라 하여 평양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9-10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대동강은 평양성의 외성을 돌아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보통강과 만나게 된다. 외성 지역은 특히 바둑판처럼 구획된 길과 많은 버드나무들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에는 바둑판 모양 도로와 밭을 기자가 실시했다고 전해지는 정전제(井田制)의 유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후대의 연구를 통하여 고구려 도성의 도로 유적으로 밝혀졌다. 9폭 중간쯤에 기자가 살았다는 기자궁(箕子宮)과 함께 기자 때의 우물이라는 기정(箕井)이 우물 정(井)자로 표시되어있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기자궁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은 ‘유경(柳京)’이라 부를 정도로 예로부터 버드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개성상인을 송도(松都)상인 또는 송상(松商)이라 부르듯, 평양 상인을 ‘유상(柳商)’이라고 했다.

십리장림(十里長林) 또는 십리사정(十里沙程)이라고도 불렸던 평양성 건너편의 길에도 많은 버드나무를 볼 수 있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십리장림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에는 없지만 <평양지도(平壤地圖)>에는 평양성 남쪽에 거문(車門)이라는 표시가 있다.

 

[<평양지도(平壤地圖)> 8폭 병풍 中 거문 일대, 국립중앙박물관]

 

문(門)이라는 이름만 붙었을 뿐 아무 건물조차 없는 거문(車門)은 외성의 남문 격이었다. 수레문이라고도 불렸다. 그 옆의 한사정(閒似亭)은 18세기 후반에 생긴 정자이다. 1866년 9월 평양 백성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곳이 이 지역이다.

또한 ‘거문범주(車門泛舟)’라 하여 이곳에서의 뱃놀이 모습도 평양팔경의 하나였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한사정 일대,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및 인용 : 평양성도(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향토대백과(2008, 평화문제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