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45 - 청렴은 수령의 본무(本務)이다.

從心所欲 2021. 5. 30. 19:18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관개(灌漑 : 물대기),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1

청렴은 수령의 본무로, 모든 선(善)의 근원이요 모든 덕(德)의 뿌리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不廉而能牧者 未之有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가 일체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 만큼,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청심(淸心) : 청렴한 마음가짐

 

우리 조선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힌 이가 통틀어 1백 10인인데, 태조(太祖) 이후에 45인, 중종(中宗) 이후에 37인, 인조(仁祖) 이후에 28인이며, 경종(景宗) 이후로는 이렇게 뽑는 일마저 끊어져서,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4백여 년 동안 관복을 갖추고 조정에 벼슬한 자가 몇 천 몇 만이나 되는데 청백리에 뽑힌 자가 겨우 이 숫자에 그쳤으니 역시 사대부(士大夫)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청백리(淸白吏) : 청백한 관리.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의정부(議政府)ㆍ육조(六曹)ㆍ한성부(漢城府)의 2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과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장(長)이 추천하여 선정하였다.

 

《상산록(象山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에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은 봉급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먹고 남는 것이 있더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로 아무 것도 지닌 것 없이 떠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는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는 것이 있으면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중고(中古)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최하로는 무릇 이미 규례(規例)가 된 것은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되 아직 규례가 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으며, 향임(鄕任)의 자리를 팔지 않고, 재감(災減)을 훔쳐 먹거나 곡식을 농간하지도 않고, 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팔아먹지 않으며, 세(稅)를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착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의 이른바 염리라는 것이다.

모든 나쁜 짓을 갖추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두가 그러하다. 최상이 되는 것은 본디 좋지만,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다음이라도 좋다. 이른바 최하의 것은 옛날에는 반드시 팽형(烹刑)을 당하였을 것이니, 무릇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염리(廉吏) : 청렴한 벼슬아치
▶향임(鄕任) : 향리(鄕吏)의 부정을 규찰(糾察)하고 수령을 보좌하는 향소(鄕所)의 임원. 임원에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 한 사람, 별감(別監) 약간 인을 두었다.
▶재감(災減) : 재결(災結) 즉 재상(災傷)을 입은 논밭의 세(稅)를 감해주는 것.
▶팽형(烹刑) : 사람을 삶아 죽이는 형벌. 중국 한대(漢代)에 행해졌던 형벌이다.

 

양병(楊秉) - 후한(後漢) 양진(楊震)의 아들이다. - 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였다. 예주(豫州)ㆍ형주(荊州)ㆍ서주(徐州)ㆍ연주(兗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는데, 날짜로 계산하여 봉록을 받고 남는 것은 자기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하루걸러 끼니를 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게는 세 가지 미혹(迷惑)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술과 계집과 재물이다.”

하였다.

▶양진(楊震) :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던 후한(後漢) 때의 문신. 양병(楊秉)은 그의 둘째 아들.

 

충의공(忠毅公) 산운(山雲)은 청렴 정직함이 비할 데 없었다. 광서수부(廣西帥府)에 정뢰(鄭牢)라는 늙은 종이 있었는데, 성품이 강직하여 바른말을 잘하였다. 공(公)이 그에게 묻기를,

“세상에서 장군이 되면 탐욕해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탐해도 되겠는가?”

하니, 정뢰가,

“공이 처음 도임하셨으니 마치 새롭고도 깨끗한 흰 도포 같은데, 한 점 먹에 더러워지면 끝내 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사람들이, 지방 오랑캐들이 보내오는 선물을 받아 주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을 품고 성낼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니, 정뢰가,

“벼슬에 있으면서 재물을 탐하면 조정에서 중한 벌이 있을 것인데,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도리어 오랑캐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광서 지방을 진무(鎭撫)한 지 10년이 되도록 청렴한 지조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

▶산운(山雲) : 명(明)나라 때의 무장(武將).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