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47 - 지혜로운 선비는 청렴을 교훈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한다.

從心所欲 2021. 6. 3. 13:17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등장(登場 : 볏단 쌓기),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3

그러므로 예로부터 무릇 지혜가 깊은 선비는 청렴을 교훈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故自古以來 凡智深之士 無不以廉爲訓 以貪爲戒)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가 일체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 만큼,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청심(淸心) : 청렴한 마음가짐

 

배협(裵俠)이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은 벼슬살이하는 근본이요, 검약은 몸가짐의 바탕이다.”

▶배협(裵俠) : 중국 북조(北朝) 북주(北周) 사람으로 청렴하고 근신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율기잠(律己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선비의 청렴은 여자의 순결과도 같아서 진실로 털끝만한 더러운 점도 평생의 흠이 되는 것이다. 어두운 방이라 말하지 말라. 환하게 넷이 알고 있다[四知]. 네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의 신명(神明)을 속일 수 있으랴. 황금 5 ~ 6 바리와 호초(胡椒) 8백 곡(斛)이 살아서는 영화(榮華)가 되지 못할 것이요, 천 년 후에도 남은 죄가 있다. 저 아름다운 군자여! 학(鶴) 한 마리 거문고 하나, 바라보매 늠연(凜然)하여 만고(萬古)의 청풍(淸風)이다.”

▶율기잠(律己箴) : 중국 명나라 때 추현지사(鄒縣知事)를 지낸 양주언(梁州彥)이 세운 비에 새겨진 글로, 관직을 지내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내용을 적은 관잠(官箴).
▶넷이 알고 있다[四知] : 후한(後漢)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옮겨 갈 적에 창읍령(昌邑令) 왕밀(王密)이 금 10근(斤)을 주면서 “어두운 밤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 하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귀신이 알고[神知] 내가 알고[我知] 그대가 안다[子知]. 어찌 앎이 없다고 하는가?” 하고 받지 않았다.
▶황금 …… 곡(斛) : 당(唐)나라 대종(代宗) 때의 간신(姦臣)인 원재(元載)가 죽은 뒤에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니, 종유(鍾乳) 5백 냥(兩)과 호초(胡椒) 8백 석이 나왔고 다른 보물도 그와 맞먹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는 고사.
▶학(鶴) …… 하나 : 송(宋)나라 때의 재상 조변(趙抃)은 성도지부(成都知府)가 되어 촉(蜀) 지방으로 부임할 때에 필마(匹馬)로 거문고 하나, 학 한 마리만 대동하고 갈 정도로 청백했다는 고사.

 

포 효숙공(包孝肅公)의 가훈(家訓)에,

“후세 자손에 벼슬살다가 장람(贓濫)한 죄를 범한 자는 본가로 돌아올 수도 없거니와, 그가 죽은 후에도 선영(先塋)에 장사할 수 없다. 내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

하고, 그 밑에 화압(花押) - 서명(署名) - 하고 이것을 집의 동쪽 벽돌에 새겨 후세에 교훈하였다.

▶포 효숙공(包孝肅公)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청렴강직하기로 유명하였던 포증(包拯). 효숙(孝肅)은 시호.

 

나경륜(羅景綸)이 이렇게 말하였다.

“사대부가 만약 돈 한 푼을 좋아하면 그 인품은 한 푼 값어치도 못 된다.”

 

진간재(陳簡齋)의 시에,

“從來有名士 종래 이름있는 선비는

不用無名錢 이름없는 돈은 안 쓰누나.“

하였다.

 

양백자(楊伯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대부(士大夫)가 청렴하면 7분 정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풍유룡(馮猶龍)은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한없이 좋지 못한 일은 모두 돈을 버리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고, 천하의 끝없이 좋은 일은 모두 돈을 버리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나경륜(羅景綸), 진간재(陳簡齋), 양백자(楊伯子), 풍유룡(馮猶龍) : 풍유룡(馮猶龍)은 명(明)나라 관리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송(宋)나라의 관리.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얻기를 탐내는 자는 만족함이 없으니, 모두가 사치를 좋아하는 일념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담담하여 만족할 줄 알면 세상 재물을 구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청풍명월(淸風明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대울타리 띳집도 돈 쓸 일이 없고, 책을 읽고 도(道)를 이야기하는 데 돈이 요구되지 않으며, 자신을 깨끗이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돈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성찰(省察)하면 세상맛에서 초탈(超脫)하게 될 것이니 탐심이 또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정선(鄭瑄) : 명(明)나라의 관리로 옛사람의 격언(格言)과 의행(懿行)을 기록한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을 남겼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정선이 말한 것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의 내용이다.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시골에 사치스러운 수레를 몰고 가서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성대히 과시하고, 해변에 무슨 토산물이 나는가를 물어서 벼슬 살 동안 자기 주머니에 채우려고 재물을 바라는 자는, 간혹 샘물을 마시고도 탐내지 않고, 헌 수레와 여윈 말을 타는 벼슬아치가 있으면 비웃기를 ‘어찌 이런 못난 벼슬아치가 되겠는가. 좋은 벼슬이란 많은 돈이 생기는 데 불과하다.’ 하니, 슬프다.

나도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보았지만 죽은 지 몇 년도 못 가서 자손들이 재산 싸움을 하다가 집안이 망하기도 하고, 또 2대(代)도 못 가서 자손들이 음탕해서 패가(敗家)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더욱 미혹된 자는 등 따뜻하고 배부른 데 뜻을 두고, 빼앗고 긁어먹는 데 교묘한 재주가 있으면서도 남들이 그를 십승(十乘)의 부(富)가 있다고 일컫는 말을 들으면 성을 발끈 내고, 항아리나 섬에 차는 저축도 없다고 추켜 주는 말을 들으면 흔연히 좋아한다. 그 자손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는 글을 남에게 청하여 받을 적에 계손(季孫)이나 도주(陶朱)와 같은 사람이라고 헐뜯으면 또한 성을 발끈 내고, 공의휴(公儀休)나 백기(伯起)와 같은 반열에 넣어 주면 또한 흔연히 기뻐한다. 이는 돈이 많은 것은 추한 것이요, 질박과 청렴이 귀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뜻하는 바는 귀한 것이 아니요, 귀하게 여기는 바는 추하게 여기는 것이 많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샘물을 …… 않고 : 진(晉)나라 때의 오은지(吳隱之)가 광주 자사(廣州刺史)가 되었을 때 그곳에 탐천(貪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는데, 그 샘물을 마시는 자는 한없는 욕심을 품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바로 가서 떠 마셨다. 그리고는 맑은 절조를 더욱 힘써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 가진 재물이 전혀 없었다.
▶계손(季孫)이나 도주(陶朱) : 계손(季孫)은 춘추(春秋) 때 노(魯)나라의 권신(權臣)이고, 도주(陶朱)는 역시 춘추(春秋) 때 월(越)나라의 범려(范蠡)이다. 계손은 분수에 넘게 부유하였고 도주는 재물을 늘리는데 능하였다.
▶공의휴(公儀休)나 백기(伯起) : 공의휴(公儀休)는 전국(戰國)시대 때 노목공(魯穆公)의 정승이었고, 백기(伯起)는 후한(後漢)의 안제(安帝) 때 문신. 두 사람 모두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근세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밖으로는 공명(功名)을 낚고 안으로는 가산(家產)을 경영하여, 천 간(間)이나 되는 큰 집채에 기름진 토지가 만 경(頃)이나 되고, 동복(僮僕)은 개미떼 같고 비첩(婢妾)은 구름 같으면서도 입으로는 성명(性命)을 고상하게 담론하고 청허(淸虛)함을 자부하니, 비록 혀로 오색보련(五色寶蓮)을 토한다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성명(性命) : 인성(人性)과 천리(天理).
▶오색보련(五色寶蓮) : 오색의 연꽃.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설법(說法)할 때 그의 말이 장중 화려한 것이 마치 오색 연꽃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는 예찬에서 비롯된 표현.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진신(搢紳)이 한번 사적(仕籍)에 오르면 잠깐 사이에 부귀해져서 이익이 후해지고 벼슬이 높아지면 이는 유능한 사람이다 하고, 청빈하고 검소하면서도 벼슬이나 있으면 그래도 남의 비웃음을 면한다. 공평하고 청렴하며 곧게 처신하다가 벼슬과 이득을 다 잃으면 크게 졸렬하다는 말을 듣게 되어, 처자들도 허물하고 친구들도 비웃으니 향리에 몸을 의탁할 수도 없다. 스스로 하늘이 낸 높은 인품이 아니면 세태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진신(搢紳) : 벼슬아치 혹은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을 가르킨다. 우리말의 양반과 유사한 의미.
▶사적(仕籍) : 벼슬아치의 명부.

 

송(宋)나라의 갑거원(蓋巨源)이 현령(縣令)이 되어 공청(公廳)에서 비단을 사는데, 손수 자로 재니 시비(侍婢)가 병풍 사이로 엿보고 미워하여,

“뜻하지 않게도 오늘날 비단 흥정하는 상전을 섬기게 되었구나.”

하고는, 떠나가기를 청하였는데, 만류해도 듣지 많았다.

요즈음 한 현령이 정당(政堂)에서 손수 베를 자로 재었다 하니, 어느 시대인들 갑거원 같은 자가 없겠는가.

 

석박(石璞)이 관직을 역임한 지 40여 년이나 되었지만 청렴하고 개결(介潔)함이 한결같았다. 하루는 고향 사람 중에 전사(典史)로 있다가 돌아온 자가 있어서 석박이 인사를 갔더니, 그 집 책상 위에 은그릇과 10여 개의 금 술잔이 진열되어 있었다. 석박이,

“네가 벼슬한 지 몇 년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고적(考績)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돌아왔는가?”

하니,

“고약한 백성이 나의 탐욕을 고발하여 직책을 빼앗겼습니다.”

하므로 석박이,

“슬프다. 내가 네 죄를 다스렸다면 네 어찌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하면서 옷자락을 떨치고 나와 버렸다.

▶석박(石璞) : 명(明)나라 관리.
▶전사(典史) : 중국의 관명. 지현(知縣)에 속한 관리로, 문서의 출납(出納)을 맡아보기도 하고, 범인을 검거하여 옥(獄)에 가두는 일을 담당하기도 함.
▶고적(考績) : 관리의 공적을 고찰(考察)하는 것. 고적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은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는 의미.

 

복건염사(福建廉使) 도후중(陶垕仲)이 방백(方伯) 설대방(薛大方)의 탐포(貪暴)를 탄핵하였더니, 설대방이 도후중을 무고(誣告)하였다. 도후중이 경사(京師)에 이르러 일이 밝혀져서, 설대방은 죄를 얻고 도후중은 조칙(詔勅)으로 복관(復官)시켰다.

민(閩) 땅 사람들이 환영하기를,

“도사(陶使)가 다시 오니 하늘에도 눈이 있구나. 설공(薛公)이 떠나가지 않았더라면 땅에는 껍데기도 안 남았으리라.”

하였다.

 

송나라 절도사(節度使) 미신(米信)이 인색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아 백만 꾸러미나 되는 돈을 쌓았다. 그의 아들은 호사하고 방탕하였는데, 아버지 때문에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고 다만 부자들에게 비싼 이자 돈을 빌려 쓰면서 ‘노도환(老倒還)’이라 하였다. 그 말은 ‘아버지가 죽어서 상여(喪輿) 소리가 끝나자마자 본전과 이자를 몽땅 갚아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사사로이 하인들을 모집하여 말안장과 복장을 호사스럽게 꾸며서 집 문 좌우에 세워 두고 그가 문 안에서 나오는 즉시 옹위하여 부축하게 하였으니, 그 도당들은 서울에서 입술과 혀를 놀려 먹을 것을 낚는 무리들이었다. 미신이 죽자마자 그는 방탕으로 가산을 거의 없애고 옥졸과 요령 흔드는 야경꾼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