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48 - 수령이 청렴하지 않아 백성에게 욕을 먹는 것은 수치다.

從心所欲 2021. 6. 4. 15:53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지수(持穗 : 도리깨질),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4

수령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도적으로 지목하여 마을을 지날 때는 더럽히고 욕하는 소리가 드높을 것이니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牧之不淸 民指爲盜 閭里所過 醜罵以騰 亦足羞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가 일체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 만큼,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청심(淸心) : 청렴한 마음가짐

 

정선(鄭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관원이 한 도적을 심문하면서 ‘네가 도둑질하던 상황을 말해 보아라.’ 하니, 도적은 짐짓 딴전을 피우면서 ‘무엇을 도적이라 합니까?’ 하자, 관원이 ‘네가 도적이면서 그것을 모르느냐. 궤짝을 열고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적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자 도적이 웃으면서 ‘만일 공(公)의 말대로라면 내가 어찌 도적일 수 있겠습니까? 공과 같은 관원이 참으로 도적입니다. 유생(儒生)이 첩괄(帖括)을 외면서 일찍이 고금을 상고하거나 천인(天人)의 이치를 연구하거나 국가의 경제(經濟)와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밤낮으로 권력을 손에 쥐고 일확천금(一攫千金)할 것을 바라며, 아비와 스승이 가르치는 것이나 벗들에게서 배우는 것들도 도둑질을 익히는 것뿐입니다.

관복 차림에 홀[手板]을 쥐고 정당(政堂)에 높이 앉아 있으면 아전들이 옆에 늘어서고 구종(驅從)들이 아래에서 옹위하니 존엄함이 마치 천제(天帝)와도 같습니다. 벼슬은 이익[利]으로부터 나오고 정사(政事)는 뇌물로 이루어집니다. 원섭(原渉)ㆍ곽해(郭解)같은 큰 토호(土豪)가 대낮에 살인하더라도 뇌물이 한번 들어가면 법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며, 황금에 권력이 있으니 백일(白曰)도 빛을 잃어, 다시 풀려나와서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나다니고 있습니다. 마을의 천민(賤民)들은 벌을 돈으로 속죄하여 더욱 가난의 고초를 겪어서 머리털은 흘어지고 살갗은 깎여 집을 유지하지 못하고 처자들을 팔게 되어 바다에 투신하거나 구렁에 떨어져도 수령은 이를 근심하고 살필 줄 모르니 신(神)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합니다. 그러나 돈의 신령스러움이 하늘까지 통해서 명관(名官)이라는 칭찬이 자자합니다. 큰 저택은 구름 같이 이어 있고 음악 소리는 땅을 울리며 종들은 벌 떼 같고 기첩(妓妾)은 방에 가득하니, 이것이 진정 천하의 큰 도둑입니다.

땅을 파고 지붕을 뚫어 남의 돈 한 푼을 훔치면 곧 도둑으로 논죄(論罪)하고, 관원들은 높이 앉아 그저 팔짱만 끼고 있으면서 거만(鉅萬)의 돈을 긁어모으는데도 좋은 관원이란 칭찬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큰 도둑은 불문에 부치고 민간의 거지들과 좀도둑만 문죄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에 그 관원이 즉시 이 도둑을 놓아 주었다.”

▶첩괄(帖括) : 과거에 소용되는 글을 엮어서 외우기에 편리하게 만든 문건.
▶원섭(原涉)ㆍ곽해(郭解) : 원섭(原渉)은 한(漢)나라 왕망(王莽) 때 협객(俠客)이고, 곽해(郭解)는 한 무제(漢武齊) 때의 협객으로 두 사람 모두 살인을 많이 하였다.

 

고려(高麗) 때 나득황(羅得璜)이 백성들에게 박탈하여 세금을 긁어모아 최항(崔沆)에게 아첨하여 제주 부사(濟州副使)가 되었다. 그 전에 송소(宋佋)가 제주의 수령으로 있다가 장죄(贓罪)를 지어 면직되고 나득황이 그 뒤에 부임하니, 사람들이,

“제주가 전에는 작은 도적을 겪었는데. 이제 큰 도적을 만났구나.”

하였다.

▶나득황(羅得璜), 최항(崔沆), 송소(宋佋) : 고려 때의 관리들
▶제주 부사(濟州副使) : 부사(副使)는 사(使)의 다음 자리로 품계는 5~6품.

 

이기(李墍)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국초(國初)에 함경도(咸鏡道)는 야인(野人)과 접하여 있기 때문에 대소(大小)의 고을 수령을 모두 무관(武官)으로 차출(差出)해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조정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꺼리는 바가 없어서 오로지 혹형(酷刑)과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삼았으며, 어쩌다 문관(文官)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기대에 맞는 자는 역시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을 ‘낮도적[晝賊]’이라 지목하였다. 북쪽의 어떤 백성이 처음 서울에 올라왔는데,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러 동행(同行)에게 ‘이것이 무슨 관청인가?’ 물으니, 동행이 ‘이곳은 조정이 낮도적을 기르는 못자리이다[長秧]’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분격에 넘친 지나친 것이기는 하나, 이 말을 듣는 자는 또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기(李墍) : 조선 문신(1522 ~ 1600). 부제학(副提學), 이조 판서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이정형(李廷馨)의 저술이다. 정약용이 저자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용문 ‘국초(國初)에……것이다’는 《동각잡기(東閣雜記)》가 아닌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것으로 이 또한 착오다.
▶야인(野人) : 조선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키던 말.

 

《한암쇄화(寒巖瑣話)》에,

“백련사(白蓮寺) 중으로 해학(諧謔)을 잘하는 자가 있었는데 항상 시 한 구를 외기를,

日傘陰中多大盜 일산(日傘) 그늘 밑에는 큰 도적이 많고

木鐸聲裡少眞僧 목탁 소리 뒤에는 참된 중이 적네. - 수좌(首座)가 욕심이 많다는 말이다. - “

하였다.

▶한암쇄화(寒巖瑣話) : ‘한암쇄화(寒巖瑣話)’는 ‘다산필담(茶山筆談)’과 함께 정약용이 저술에 인용한 자료집 성격의 책.
▶백련사(白蓮寺) :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