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50 - 작은 것이라도 선물은 사사로움이 행해지는 것이다.

從心所欲 2021. 6. 8. 06:13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일면(一眠 : 첫잠),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6

선물로 보내온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은정(恩情)이 맺어졌으니 이미 사사로운 정(情)이 행해진 것이다.

(饋遺之物 雖若微小 恩情旣結 私已行矣)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청심(淸心)은 그 가운데 2번째이다. 

 

진(晉)나라 격(鬲)의 수령 원의(袁毅)가 조신(朝臣)에게 뇌물을 바쳐 명예를 사려고 하였다. 일찍이 산도(山濤)에게 실 1백 근을 보냈는데 산도는 남다르게 하지 않고자 하여 받아서 들보 위에 얹어 놓았다. 얼마 후에 원의의 일이 탄로되자, 산도는 들보 위에서 그 실을 가져다가 아전에게 내어 주었다. 이미 몇 해가 되어 실이 먼지가 끼고 검고 누렇게 되었는데 봉인(封印)은 처음 그대로였다.

▶산도(山濤) : 진(晉)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하나다.

 

중국 후한(後漢) 때에 양속(羊續)이 여강태수(廬江太守)로 있을 적에 부승(府丞)이 물고기를 선물하자, 받아서 먹지 않고 그것을 걸어 놓았다. 뒤에 다시 또 보내오므로 양속이 전에 받은 물고기를 내어 보이니 부승이 부끄럽게 여기고 그만두었다.

▶부승(府丞) : 태수부(太守府)의 부관(副官)

 

웅 태간공(熊泰簡公)은 평생토록 청절(淸節)을 지켜 티끌만한 것도 받지 않았다. 그가 운남(雲南)의 순무(巡撫)로 있을 때, 오랑캐를 평정하고 잔치하는 날에 금화채단(金花綵緞)을 받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 이듬해에 그가 서울로 돌아갈 때 유사(有司)를 불러 금화채단을 창고에 간수하게 하니, 사람들은 비로소 공이 자기 청백(淸白)으로 남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한 뜻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 당일에 그가 받지 않았다면 그 속료(屬僚)들이 어느 누가 감히 받았겠는가. 이는 장괴애(張乖崖)가 시녀(侍女)를 받아들인 일과 퍽 비슷한 데가 있다.

▶장괴애(張乖崖) : 송(宋)나라 때의 장영(張詠). 공부(工部)ㆍ예부(禮部)의 상서(尙書) 등을 지냈는데, 청렴 강직하였다.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무장(武將)인 조극명(曹克明)이 호광행성(湖廣行省)에 있을 적에 한 주부(主簿)가 진사(辰砂) 1함(函)을 보내왔다. 미처 열어 보지도 않고 궤 속에 그대로 넣어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니 곧 사금(砂金) 3냥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 공이 탄식하기를,

“그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단 말인가.”

하였으나, 이때 그 주부는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그 아들을 불러 돌려주었다.

▶진사(辰砂) : 수정과 같은 결정구조를 가지는 육방정계에 속하는 광물

 

명(明)나라의 섭종행(葉宗行)이 전당(錢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안찰사(按察使) 주신(周新)은 풍채가 근엄 중후하였는데 그를 더욱 중하게 여겼다. 하루는 섭종행이 외출한 틈에 몰래 그의 집에 가서 방 안을 둘러보니 아무 물건도 없고 오직 입택(笠澤)의 은어(銀魚) 말린 것 한 꾸러미가 있을 뿐이었다. 주신이 탄식하고 마른 은어를 조금 가지고 왔다. 그 이튿날 그를 불러 식사를 대접하며 은어를 먹게 하면서,

“이것은 그대 집 물건이오.”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섭종행을 전당일엽청(錢塘一葉淸)이라 불렀다.

▶입택(笠澤) :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큰 호수인 태호(太湖)의 옛 이름. 
▶전당일엽청(錢塘一葉淸) : ‘일엽청’은 유독 고결한 인물이라는 의미. 전당(錢塘)은 항주(杭州)의 별칭.

 

북제(北齊) 소경(蘇瓊)이 남청하태수(南淸河太守)가 되었는데,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여 오이나 과실 같은 것도 받지 않았다. 고을 사람 조영(趙潁)이 새로 나온 오이 2개를 바치니, 소경은 이를 들보 위에 얹어 놓고는 끝내 먹지 않았다.

 

가욱(賈郁)이 선유현(仙游縣)으로 옮기니 고을 사람이 과실을 보내주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송(宋)나라 사도(査道)가 한번은 관내를 순찰할 때 길가에 먹음직한 대추가 있었다. 수행원이 그 대추를 따서 사도에게 바쳤더니, 그는 그 값을 계산하여 돈을 나무 위에 걸어 놓고 떠났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