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51 - 청렴한 관리가 지나는 곳에는 맑은 빛이 미친다.

從心所欲 2021. 6. 10. 07:11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이면(二眠 : 두 번째 잠),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7

청렴한 관리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가 지나는 곳은 산림(山林)과 천석(泉石)도 모두 맑은 빛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所貴乎廉吏者 其所過山林泉石 悉被淸光)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청심(淸心)은 그 가운데 2번째이다.

 

진(晉)나라 때 오은지(吳隱之)가 광주 자사(廣州刺史)가 되었는데, 산해군(山海郡)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탐천(貪泉)이라는 샘이 있었다. 이 샘물을 마시는 자는 반드시 탐욕해진다고 하였는데 오은지는 바로 가서 떠 마시고, 청렴한 조행(操行)을 더욱 닦았으므로 돌아올 때에는 남은 재물이 없었다. 벼슬이 상서(尙書)가 되고 태복(太僕)에 이르렀으나 사는 집은 대와 쑥대로 바람벽을 한 것이었고, 식구들이 끼니를 걸러도 태연하였다.

▶상서(尙書) : 진(晉)나라 때 6조(曹)의 장관.
▶태복(太僕) : <예기(禮記)>에 기록된 중국 주(周)나라의 관제(官制)는 3공(三公), 9경(九卿), 27대부(大夫), 81원사(元士)이다. 태복(太僕)은 진(晉)나라 때 9경 가운데 하나.

 

당나라 이백(李白)이 우성(虞城) 현령으로 갔을 때, 관사에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맑으나 물맛이 썼다. 이백은 부임하여 이 우물 맛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쓰고도 맑은 사람이니 내 뜻과 부합하는구나.”

하고, 드디어 길어다 먹으며 고치지 않았는데, 쓴 우물물이 변하여 단 샘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백(李白)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시인으로 자는 태백(太白), 호는 주선옹(酒仙翁)ㆍ해상조오객(海上釣鰲客)ㆍ청련거사(靑蓮居士) 등이다. 천하를 유람하며 시와 술[詩酒]로 생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宋)나라의 방준(方峻)이 거처하는 동북쪽에 우물 하나를 팠는데, 다 파서 우물이 완성되자 공복(公服)을 입고 향을 피우면서 빌기를

“원하건대, 자손이 벼슬살이하게 되면 이 우물물처럼 청백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원위(元魏)의 방표(房豹)가 낙릉군(樂陵郡)의 수령이 되었는데, 좋은 샘물이 없고 바다에 접하였으므로 물맛이 짰다. 방표가 우물 하나를 파게 하여 드디어 단 샘물을 얻었다. 그가 돌아가자 단맛이 도로 짜졌다.

▶원위(元魏) : 중국 북위(北魏)의 별칭.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북조(北朝)에 속한다. 후위(後魏)라고도 한다.

 

송나라 우원(虞愿)이 진안 태수(晉安太守)가 되었다. 바닷가에 월왕석(越王石)이 있는데 항상 구름과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서로 전해오는 말에,

“청렴한 태수라야 이를 볼 수 있다.”

하므로 곧 가서 보니 구름과 안개가 씻은 듯이 걷히고 맑고도 깨끗하여 조금도 가리는 것이 없었다.

 

송(宋)나라 때의 양성재(楊誠齋)가 여릉 태수(廬陵太守)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今侯氷檗淸到底 태수(太守)의 빙벽(氷檗) 같은 맑음은 흐트러짐이 없어

一粒不嚼廬陵米 한 톨의 여릉(廬陵) 쌀도 먹지 않누나.

一芽只瀹淸泉水 차를 오직 맑은 샘물에 달이니

玉皇知渠是良吏 옥황상제(玉皇上帝)는 그대가 양리(良吏)임을 알리라

▶빙벽(氷檗) : 얼음을 마시고 황벽(黃檗)나무 껍질을 먹는 것으로, 청고(淸苦)한 생활을 뜻한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