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52 - 청렴한 수령은 자기 고을의 토산물을 취하지 않는다.

從心所欲 2021. 6. 17. 07:37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삼면(三眠 : 세 번째 잠),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8

무릇 본읍(本邑)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은 반드시 고을에 폐단이 될 것이니, 하나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만 청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凡珍物産本邑者 必爲邑弊 不以一枚歸 斯可曰廉者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청심(淸心)은 그 가운데 2번째이다.

 

예를 들면, 강계(江界)의 인삼과 초피(貂皮), 경북(鏡北)의 다리[체(髦)]와 베, 남평(南平)의 부채, 순창(淳昌)의 종이, 담양(潭陽)의 채색 상자, 동래(東萊)의 담뱃대[연구(煙具)], 경주(慶州)의 수정(水晶), 해주(海州)의 먹, 남포(藍浦)의 벼루 같은 것들을 돌아가는 날에 행장 속에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청렴한 선비의 행장이라 할 수 있다.

▶경북(鏡北) : 함경북도의 경성과 북청. 가발의 용도로 쓰는 다리와 함께 삼베가 특산물이었다. 그곳의 삼베를 북포라고 했다.

 

매양 보면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온 자는 그것들을 좌우에 늘어놓으니, 그 탐욕하고 비루한 빛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뻗쳐 나와서 남이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한다.

백향산(白香山)이 스스로 말하기를,

“오래도록 소주(蘇州)에서 벼슬 살았으나 태호(太湖)의 돌 한 개도 곁에 놓아두지 않았다.”

하였다.

▶백향산(白香山) : 당(唐)나라 때의 문신 백거이(白居易).
▶태호(太湖)의 돌 : 태호(太湖)는 중국 소주부(蘇州府)에 있는 호수 이름. 이 호수에서 나는 돌을 태호석(太湖石)이라 하여 분경(盆景)이나 정원석으로 많이 쓰였다. 

 

운남(雲南)의 대리부(大理府)에서는 석병(石屛)이 나는데, 이 지방에 벼슬살이하는 자는 매양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허비해가며 그 석병을 실어다 남에게 선물한다. 이방백(李邦伯)이란 사람이 홀로 이에 뜻을 붙여 다음과 같은 송행시(送行詩)를 지었다.

相思莫遺石屛贈 서로 그리워도 석병 보내지 말고

留刻南中德政碑 남겨서 남쪽 지방 덕정비(德政碑) 새기게 하라

▶대리부(大理府) 석병(石屛) : 대리(大理)는 중국 운남성에 있는 지명으로 대리석이 그 지역의 특산물이다. 대리석으로 병풍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를 석병(石屛)이라 했다.
▶송행시(送行詩) :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

 

하남(河南)에서 표고버섯과 선향(線香)이 나는데, 이곳에 벼슬살이 온 사람들은 매양 그것을 갖다가 요로(要路)에 선물하였다. 우 숙민공(于肅愍公)이 그 지방을 순무(巡撫)할 때에 그것들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手帕蘑菰與線香 보자기에 싼 표고와 선향은

本資民用反爲殃 본디 백성의 소용이던 것이 도리어 재앙이 되었네.

淸風兩袖朝天去 청풍(淸風)을 두 소매에 넣고 임금 뵈러 가니

免得閭閻話長短 민간의 시비 장단 없으리.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슬프다. 대체로 지방에서 토산이 나오면 그 지방의 재앙이다. 휘(徽) - 휘주(徽州) - 는 메마른 고을인데 정규묵(廷珪墨)과 용미연(龍尾硯)이 지금도 누를 끼치는 일이 많다. 그것을 남겨 덕정비(德政碑)를 새기게 하고 청풍을 소매 속에 가득히 넣고 돌아가는 것이 수령에게 바라는 바이다.”

▶정규묵(廷珪墨), 용미연(龍尾硯) : 당시에 이름이 있던 좋은 먹과 벼루의 이름

 

포증(包拯)이 단주(端州)의 수령이 되었는데, 해마다 고을에서 벼루를 공물(貢物)로 바쳤다. 전의 수령들은 공물을 핑계로 수십 배를 거두어 들여서 세력가들에게 선물하였는데, 그는 만드는 자에게 공물 숫자만 맞추어 만들게 하였다. 그는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에 벼루 한 개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단주(端州) : 좋은 벼루로 이름이 높은 단계연(端溪硯)이 생산되던 곳.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은 그의 조카 통리(通理)에게 보내는 편지에,

“어제 보내온 편지에 주사(朱砂)를 사가지고 오고 싶다는 말이 있는데, 내게 그 물건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네가 벼슬살 때는 청렴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 벼슬사는 그곳 물건을 살 수 있겠느냐. 내가 벼슬살 때는 물 마시는 것 외에는 한 가지도 산 적이 없었다. 이것을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 송(宋)나라 때의 문신 구양수(歐陽脩).

 

당개(唐介)가 담주통판(潭州通判)으로 있을 때에 한 큰 상인(商人)이 진주를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다가 관리(關吏)들에게 수색을 받게 되었다. 태수(太守) 이하가 그 값을 낮추어서 모조리 스스로 사들였다. 뒤에 진주를 나누어 가진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인종(仁宗)이 근시(近侍)에게

“당개는 결코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다시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당개(唐介) : 송(宋)나라 때의 관리.
▶관리(關吏) : 관문(關門)을 지키면서 관세(關稅) 등을 맡아보는 관리.

 

당(唐)나라 계주 도독(桂州都督) 이홍절(李弘節)이 죽자 그 집에서 진주를 팔았다. 태종(太宗)이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재상이 청렴하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이제 진주를 팔고 있으니 그를 천거한 사람이 어찌 죄가 없겠는가.”

하였는데, 위징(魏徵)이 그 천거한 사람을 구해 풀어 주었다.

 

토산물의 두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합포(合浦)에서는 진주(珍珠)가 나는데, 수령 되는 사람이 탐예(貪穢)하여 사람을 속여서 진주를 채취해 가니, 진주가 드디어 점점 교지군(交趾郡) 군계까지 옮아가 버렸다. 그래서 행려(行旅) - 나그네와 상인 등. - 가 오지 않고 사람과 물건이 힘입을 데가 없게 되었다.

맹상(孟嘗)이 합포 태수(合浦太守)가 되어 전날의 폐단을 고쳐 없앴다. 그러자 1년도 채 못 되어 전에 없어졌던 진주가 다시 돌아오고 상인도 왕래하니, 사람들이 맹상을 신명(神明)이라고 일컬었다.

▶맹상(孟甞) :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사람.

 

유자후(柳子厚)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연주(連州)는 석종유(石鍾乳)가 나는 곳이다. 연주 백성들이 이제 다 없어졌다고 고(告)한 지도 5년이나 되었고, 공물(貢物)은 다른 부(部)에서 사다 바쳤다. 자사(刺史) 최공(崔公)이 부임한 지 한 달이 넘자 석종유를 채취하는 사람이 와서 석종유가 다시 나온다고 고하였다. 그러고는 지난번 자사가 탐욕스럽고 사나워서 부역만 시키고 값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서 나오지 않는다고 속였던 것이며, 이번 자사는 법령이 밝고 뜻이 깨끗하며 신의가 흡족하기 때문에 성심으로 아뢴 것이라고 하였다.”

▶유자후(柳子厚) :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

 

여정(余靖)이 이광(二廣)의 수(帥)로 있을 때 법을 만들어 관리들을 경계해서 남방의 약품을 팔 수 없게 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북으로 돌아갈 때에는 남해(南海)의 물건은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이광(二廣) :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왕승유(王僧孺)가 남해 태수(南海太守)가 되었는데, 외국에서 배로 온 물건은 결코 갖는 일이 없었으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촉(蜀) 땅의 장사(長史)가 되었는데도 평생토록 촉 땅의 물건을 갖지 않았다. 나는 자손들에게 남방의 물건을 가지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기고 싶다.”

하였다.

 

당나라 주경칙(朱敬則)이 부주 자사(涪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돌아올 때 회남(淮南)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타는 것은 말 한 필뿐이어서 아들들은 걸어서 따라왔다.

 

동사의(董士毅)가 촉주(蜀州)의 수령이 되어 부임할 때 여러 자제들이 청하기를,

“아버님의 지절(志節)은 저희들도 다 잘 아는 일이니 일체 생계(生計)에 대해서는 조금도 넘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아버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촉 땅에는 좋은 재목이 많으니 노후(老後)의 일을 대비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공이,

“잘 알겠다.”

하였다. 벼슬살고 돌아올 때 자제들이 마중하러 강가에 나와서 노후의 일에 관해 물으니, 공이,

“내가 듣건대 전나무는 잣나무만 못하다 하더라.”

하였다. 자제들이,

“아버님께서 마련하신 것이 잣나무이십니까?”

하자, 공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여기에 싣고 온 것은 잣씨이니 심도록 하라.”

하였다.

▶동사의(董士毅) : 중국 명나라 사람.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