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46 - 수령이 청렴하지 않은 것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從心所欲 2021. 5. 31. 06:27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수예(收刈 : 벼베기),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2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않은 것은 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廉者 天下之大賈也 故大貪必廉 人之所以不廉者 其智短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가 일체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 만큼,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청심(淸心) : 청렴한 마음가짐

 

공자(孔子)가,

“인자(仁者)는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하였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청렴한 자는 청렴함을 편안히 여기고 슬기로운 자는 청렴함을 이롭게 여긴다.”

하겠다.

왜냐하면, 재물이란 우리 사람들이 모두 크게 욕심내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 중에는 재물보다도 더 큰 것이 있으므로 재물을 버리고 취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비록 재물을 얻는 데 뜻을 둔다 하더라도 염리(廉吏)가 되어야 할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매양 보면, 지벌(地閥)이 드높고 재망(才望)이 뛰어난 자가 겨우 수백 꾸러미의 돈에 빠져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 가서 10년 동안이나 쓰이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비록 세력이 높고 운이 좋아서 형벌이나 극형(極刑)은 면하게 되는 수가 있지만, 여론은 비루하게 여겨 깨끗한 명망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문신(文臣)이 이에 관련되어 관각(館閣)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무신(武臣)이 이에 관련되어 장수(將帥)가 되지 못한 자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지혜가 원대하고 생각이 깊은 자는 그 욕심이 크기 때문에 염리(廉吏)가 되고, 지혜가 짧고 생각이 얕은 자는 그 욕심이 작기 때문에 탐리(貪吏)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생각이 여기에 이를 수 있다면 아마도 청렴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인자(仁者)는 …… 여긴다 : 《논어》에 나오는 구절.
▶지벌(地閥) :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문벌(門閥).
▶관각(館閣) : 조선 시대에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규장각(奎章閣)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 세 곳은 조선시대의 가장 영예(榮譽)로운 근무처로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 선발될 수 있는 관직이었다.

 

송(宋)나라 농부가 밭갈이하다가 옥(玉)을 얻었는데, 이를 사성(司城)인 자한(子罕)에게 바쳤더니 그는 받지 않았다. 농부가 청하기를,

“이것은 저의 보배입니다. 상국(相國)께서는 받으소서.”

하니, 자한이,

“그대는 옥을 보배로 삼고 나는 받지 않는 것을 보배로 삼으니, 내가 받는다면 그대와 내가 다 보배를 잃는 셈이다.”

하였다.

▶사성(司城)인 자한(子罕) : 사성(司城)은 춘추(春秋)시대 때 송(宋)나라의 관직. 자한은 춘추시대 송나라 사람 낙희(樂喜)의 자이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공의휴(公儀休)가 노(魯)나라 정승으로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선물하였는데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재상께서 물고기를 즐긴다고 해서 선물하는 것인데 왜 받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의휴가,

“물고기를 즐기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오. 이제 재상이 되었으니 스스로 물고기를 마련할 수 있는데, 지금 물고기를 받다가 도리어 면직되면 다시 누가 내게 물고기를 주겠소? 내가 그런 까닭에 받지 않는 것이오.”

하였다.

▶공의휴(公儀休) : 성이 공의(公儀)이고, 휴(休)가 이름이다. 전국(戰國)시대 때 노 목공(魯穆公)의 재상으로 법을 잘 지키고 변경하는 일이 없었다.

 

양진(楊震)이 탁군 태수(涿郡太守)로 있었는데 성품이 청렴하였다. 어떤 사람이 가산(家產) 장만하기를 권하니. 양진은 듣지 않고 말하였다.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청백리의 자손이라고 일컫게 하여, 이것을 물려주게 되면 역시 후하게 물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