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8 - 후록론(厚祿論)

從心所欲 2021. 7. 9. 08:36
후록론(厚祿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여섯 번째 논(論)이다.

 

<후록론(厚祿論)>

 

《예기(禮記)》에,

“충신(忠信)으로 대접(待接)하고 녹(祿)을 후(厚)하게 해줌은 선비[士]를 권장하려는 까닭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그 아랫사람에게 녹을 후하게 내려주지 않는다면, 선비된 사람들이 어떻게 권장되어서 청렴한 정신을 길러서 이익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가는 짓이 없게 하랴.

이 때문에 옛날 군자(君子)로 나라에 벼슬하던 사람은 녹이 풍족하여 욕구를 채웠으니, 봉급은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뇌물 받는 행위 없이도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양육하는 물품이 저절로 넉넉하였다. 여유만만하게 한가하고 편안한 틈을 내어 그가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어, 공(功) 없이 녹만 먹는다는 나무람을 면하도록 하였고, 염치가 분명히 세워져 풍교(風敎)를 돈독하게 하였다. 옛날의 훌륭했던 시대에는 대개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였다.

 

비록 그렇더라도 군자라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고 제 몸만 이롭게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임금이 나를 후하게 대해 주시니 내가 임금에게 보답하는 바는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 그런데, 부추[薤] 뽑으라는 훈계의 말은 들리지 않고 황금이나 쌓아 둔다는 나무람만 여러 차례 치솟았다. 자기의 말[馬] 채찍 꾸미기는 그만두지 않으면서 보궤(簠簋)는 꾸밈이 없으니, 선비들의 자신을 대우함이 낮고 옅기만 하다.

▶부추[薤] …… 훈계 : 《후한서(後漢書)》 방참전(龐參傳)에 나오는 고사(故事)로 호강(豪强)한 무리들을 뿌리째 뽑아내라는 교훈의 뜻도 있으나, 다른 뜻으로는 정승이 되어 집터의 밭에 채소까지 심어서 채소 사 먹는 비용을 절약하므로 가난한 농부들은 생계가 어려워지니 정승이나 고관들은 식구들에게 부추를 뽑으라는 훈계를 해야 한다는 뜻이 있다.
▶보궤(簠簋) : 제사나 연회 때에 쓰는 그릇.

 

《주역(周易)》에,

“기름을 본다[觀頤]는 것은 자신이 남 기르는 것을 봄이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한다[自求口實]는 것은 자신의 길러짐을 봄이다.”

하였는데, 따뜻하고 배부르기만 생각하고 불쑥 일어나 곡식 창고와 재물 부대에 종사하며,

“너의 명지(明智)를 버려 두고 나의 욕심어린 모양을 본다.”

는 것은 군자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옛날의 제도를 상고할 수 없으나 원사(原思)가 읍재(邑宰)가 되었을 때에 공자(孔子)는 곡식 9백을 주었고,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경(卿)이 되자 녹(祿)은 역시 10만이었다. 제(齊)와 노(魯)는 제후의 나라였지만 녹을 후하게 주고 염치를 기르게 했던 것이 이와 같았다면, 삼대(三代) 때의 녹이 많았음을 알 만하다.

한(韓) 나라의 녹봉도 역시 후했었고, 하급 관리들을 가장 우대하였으니 역시 잘한 일이었다. 송(宋) 나라도 양현(養賢)에 더욱 유의하여 봉급을 모두에게 충실하게 주었고, 금전(金錢)도 역시 충실히 부여하였다. 하급 관리를 우대해서 청렴한 정신이 세워졌고, 외관(外官)을 우대하자 외관을 경시하는 걱정이 없어지고, 치사(致士)한 늙은이를 우대하니 어진 이를 대우하고 기구(耆舊)를 돈숭(敦崇)하는 뜻이 독실하였다.

▶원사(原思) : 공자(孔子)의 제자 원헌(原憲)의 자(字)가 자사(子思)이므로 원사(原思)라고도 불렀다. 춘추시대 노(魯) 나라의 읍재(邑宰)로 지조가 높아 가난했으나 도를 즐겼다.
▶치사(致士) :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
▶기구(耆舊) : 늙은이인 기로(耆老)와 옛 신하인 구신(舊臣)을 합쳐 부르는 말.

 

역대의 연혁(沿革)이 같지는 않으나 녹을 후하게 주어서 선비들을 권장했음은 같았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관리들의 녹은 줄이면서 그들의 청렴만을 독책하고 있으니 천하에 이러한 이치는 없다. 신라 때 1품 벼슬의 녹은 1년에 3백이었고, 왕씨(王氏)는 그 절반이었는데, 대체로 동경(東京)보다도 관직을 많이 설치해서였다. 조선에 와서는 관직이 세곱으로 늘어나 녹을 깎지 않을 수가 없었다. 3분의 2를 깎으니 봉급은 모자라기만 했다. 대부(大夫)나 선비마다 섬기고 양육함에 곤궁하여 청렴할 겨를이 없음도 당연하다. 임진란 뒤에는 달마다 주던 요(料)를 다시 녹(祿)을 받도록 설계함에 이르러서는 또 예전의 절반으로 줄였고, 그 말[斗]의 수량도 줄이니 받는 사람은 열흘도 지탱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받드는 제사(祭祀)의 규모와, 생존한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할 비품들은 평상시보다 줄인 것이 없고 의복과 말[馬]를 꾸미고 음식은 사치스러워 절제하지 못하여 공덕 높던 임금[祖宗] 때보다 열 배나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마지못하여 뇌물까지 받는다. 이래서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고, 풍교(風敎)는 날로 야박해지건만, 사대부(士大夫)들은 태평하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백성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뇌물을 바쳐서 관직을 얻고 죄를 가볍게 하는 자들이 연달아 서있는데, 이건 모두 선비를 권장하는 제도를 시행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 것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동경(東京) : 경주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신라를 뜻한다.
▶사유(四維) : 《관자(管子)》에 나오는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의 네 가지 덕목(德目).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제할 수 있을까?

헛되이 들어가는 관비(官費)를 줄이고 윗사람이 공손하고 검소한 태도로써 통솔한다면 되리라고 여겨진다.

 

[왜국 에도막부 공식지도인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 속의 조선해(朝鮮海), 1809년, 에도 막부에서 설치한 천체운행 및 역법 연구기관인 천문방(天文方) 소속의 지리학자 다카하시 가케야스(高橋景保)가 제작한 지도. ㅣ 이 지도에는 울릉도가 완릉도(宛陵島)로 독도는 천산도(千山島)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鬱陵島)가 완릉도(宛陵島)로 바뀐 것은, 왜국에서 참조한 중국지도 원본의 오기이고, 독도는 우산도(于山島)의 우(于)자를 천(千)자로 잘못 알았던 탓이라 한다. 우리문화가꾸기회 사진]

 

 

 

 

번역문 출처 : 성소부부고(임형택 역, 1983,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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