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9 - 소인론(小人論)

從心所欲 2021. 7. 12. 09:19
소인론(小人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일곱 번째 논(論)이다.

 

 

<소인론(小人論)>

 

요즈음 나라에는 소인(小人)도 없으니 또한 군자(君子)도 없다.

소인이 없다면 나라의 다행이지만 만약 군자가 없다면 어떻게 나라일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군자가 없기 때문에 역시 소인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나라에 군자가 있다면 소인들이 그들의 형적(形迹)을 감히 숨기지 못한다.

대저 군자와 소인은 음(陰)과 양(陽), 낮과 밤 같아서 음(陰)이 있으면 반드시 양(陽)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으니, 군자가 있다면 반드시 소인도 있다. 요순(堯舜) 때에도 역시 그랬는데 하물며 뒷세상에서랴.

 

대개 군자라면 바르고 소인이라면 간사하며, 군자라면 옳고 소인이라면 그르며, 군자라면 공변되고 소인이라면 사심(私心)을 지녔으니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정(邪正)ㆍ시비(是非)ㆍ공사(公私)의 판단으로써 살핀다면 저들 소인들이 어떻게 감히 그들의 실정(實情)을 숨길 것인가?

요즈음의 이른바 군자ㆍ소인이란 서로 간에 큰 동떨어짐이 없다.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면 모두 군자로 여기고, 달리하면 모두 소인으로 여긴다. 저편이 이쪽과 다르다면 배척하여 사(邪)하다 여기고, 이편과 같이 뜻하는 사람이라면 치켜세워 정(正)이라 여긴다. 시(是)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시이고, 비(非)란 그들이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비이니, 이건 모두 공(公)이 사(私)를 이길 수 없는 이유로 그런 것이다.

 

진실로 대인군자(大人君子)로서 학행(學行)과 재식(才識)이 한 시대의 대표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와서 높은 지위에 있도록 하여, 모든 관료들을 권장해 주고, 신분 높은 대부(大夫)들로 하여금 모두 바름을 지키고 공(公)에 봉사하며 시비(是非)의 분별을 밝힐 줄 알게 해 준다면, 한 시대의 음흉한 붕당 떼거리들이 장차 면모를 개혁하는데 시일이 걸리지 않으리라. 어떻게 감히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함부로 날뛰는 짓을 요즘같이 하겠는가? 그렇다면 음흉한 붕당 떼거리들의 해로움은 소인들이 국권을 전횡함보다 심한 것이 분명하다.

 

나라에서 소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것을 미워해서이다. 오늘날 나라에 해를 끼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은 권간(權奸)이 국정을 쥐지 않고도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음은, 모두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져서 권한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고, 기강(紀綱)이 이미 무너져 다시는 진작시킬 수 없는 때문이다.

이른바 권간(權奸)이라는 자들도 있었다. 김안로(金安老)가 일찍이 농간을 피웠고, 윤원형(尹元衡)도 일찍이 전권을 휘둘렀다 요즘에는 최영경(崔永慶) 역시 전횡하고자 하여 자기 자신만을 이익 되게 하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배척했음은 동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기강에 있어서는 여전했었으니 이건 다름이 아니라 권한이 한 곳에서 나왔던 까닭으로, 전천(專擅)하던 사람이 물러가면 곧바로 예전대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권한이 나오는 곳이 여러 군데이고, 자신만을 이롭게 하며 자기와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그렇다. 그런 것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이루 다 쫓아낼 수가 없고, 나라의 기강도 끝내 수습할 수가 없게 된다.

▶권간(權奸) : 권세가 있는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 : 1481 ~ 1573.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駙馬)가 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다가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 중에도 정략(政略)을 써서 자신을 유배 보낸 세력을 탄핵시켜 다시 서용되어, 당시 동궁(東宮)이었던 인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실권을 장악한 뒤 정적(政敵) 제거를 위한 여러 차례의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그 사이 승승장구하면서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된 뒤 곧 사사(賜死)되었다.
▶윤원형(尹元衡) : 1503 ~ 1565.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자, 명종의 삼촌으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대표적인 외척(外戚).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이후 20년 동안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요녀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정난정(鄭蘭貞, ? ~ 1565)이 그의 첩실이었다.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의 강력한 탄핵을 받아 황해도 강음(江陰)에 유배되었다가 정난정이 윤원형의 적처(嫡妻)를 독살했다는 고발이 나와 처벌될 위기에 처하자 정난정과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최영경(崔永慶) : 1529~1590.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性理學者)였다.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나가지 않은 채 진주의 도동(道洞)에 은거하였으나,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무고로 투옥되어 서인(西人)들에 의하여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였다. 뒤에 신원(伸寃)되어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오호라, 어떻게 하여야 소인들이 국권을 전횡하게 했다가, 그들이 세력을 펼치지 못할 때 공격하여 제거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여야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나와서, 풍동(風動)하여 그처럼 음흉한 부당들을 해산시킬 수가 있을까?

때문에, “지금의 국가에는 소인도 없으니 또한 군자도 없다.” 하였다.

 

또 하나를 말해보면, 옛날의 이른바 소인이라던 자들은 그들의 학문은 그들의 변설(辯說)을 돕기에 충분했으며, 그들의 행실은 세속을 속이기에 충분했었고, 그들의 재주도 사태의 변화에 적응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지위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그의 내심을 헤아리지 못했고, 충분하게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였다. 그들이 군자와 다른 것은 오직 공(公)과 사(私)라는 아주 작은 차이지만 그들이 끼치는 화란은 오히려 참혹했으니, 하물며 재행(才行)과 학식(學識)도 없으면서 오직 좋은 벼슬만 탐내며 요직에만 기를 써서, 구차스러운 태도를 하는 사람들이 조정(朝廷)에 가득 찼다면, 그 화는 마침내 어떠한 정도이랴.

그러므로

“음흉한 붕당의 해는 소인이 조정을 전횡하는 것보다 심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했었다.

 

[일본에서 1872년에 제작한 Nisshindo Shinken Zufu 지도. 자국의 지도를 제작하면서 열도의 오키섬[隠岐島] 북서쪽에 울릉도나 독도를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왜국은 오키섬까지가 자신들의 영토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ㅣ dokdo-takeshima.com 자료]

 

 

번역문 출처 : 성소부부고(임형택 역, 1983,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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