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33 - 옥새론(玉璽論)

從心所欲 2021. 7. 21. 08:53

‘론(論)’은 사리를 판단하여 시비를 밝히는 한문문체의 하나로, 일종의 논설문이다. 조선시대의 글 가운데는 박지원(朴趾源)의 <옥새론(玉璽論)>과 <백이론(伯夷論)>을 명작으로 꼽는다. 박지원은 <옥새론>에서 천하를 얻는 것은 본래 덕(德)으로 얻는 것이지 옥새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논하였다. 『연암집』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 들어있다.

 

<옥새론(玉璽論)>

조(趙)나라 왕이 화씨(和氏)의 옥(玉)을 얻자 진(秦)나라가 열다섯 성을 주고 바꾸려 하였는데 인상여(藺相如)가 속임수임을 알고는 옥을 온전히 보전하여 조(趙)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진 나라가 제후들을 합병함에 따라 그 옥은 다시 진나라로 들어와 나라를 전하는 옥새가 되었다. 그 옥새(玉璽)에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수(壽)를 다하고 길이 창성하리라[受命于天 旣壽永昌].”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화씨(和氏)의 옥 : 초(楚) 나라 사람 화씨가 산중에서 발굴하여 왕에게 바쳤다는 옥(玉). 《韓非子 和氏》
▶인상여(藺相如) : 조(趙)나라 환관의 사인(舍人)이었으나, 진(秦)나라 왕의 야욕에 맞서 화씨의 옥을 지켜 낸 공으로 상대부(上大夫)가 되었고, 진나라 왕과 조나라 왕의 회동에서 국위(國威)를 지킨 공으로 상경(上卿)이 되어, 명장 염파(廉頗)와 함께 조나라를 지킨 인물.

옛날에는 도(道)로써 나라를 전했는데 지금은 보물로써 나라를 전한다.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옥새를 손에 넣어 제 것인 양, 황제를 기화(奇貨)로 여겼으며, 대장군 곽광(霍光)도 역시 옥새를 손에 넣어 제 것인 양 몸소 임금에게 채워 주기도 하고 몸소 임금에게서 끌러 내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옥새는 천하를 좌우하는 것이 되어서 옥새가 있는 것을 보면 사방에서 일어나 엿보고 노리게 되었다. 더구나 임금이 죽은 비상시국에 내시나 후궁들이 이것을 제 손에 넣어 가지고 제가 좋아하는 자에게 주어 환심을 살지라도 대신들은 그저 ‘예, 예’ 하고 복종하며 온 세상 사람들도 감히 이의를 달지 못하게 되었다.
▶태위(太尉) …… 여겼으며 : 기원전 180년에 여태후(呂太后)가 죽고 여씨(呂氏)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태위 주발(周勃)이 승상(丞相) 진평(陳平)과 함께 모의하여 여씨(呂氏)들을 제거한 후, 여태후에 의해 옹립된 소제(少帝) 유홍(劉弘)을 물러나게 하고 고조의 살아 있는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유항(劉恒)을 황제, 즉 문제(文帝)로 옹립한 일. 《史記 卷9 呂太后本紀》
▶대장군 …… 하였다 : 기원전 74년에 한(漢)나라 소제(昭帝)가 후사가 없이 죽게 되자 대장군 곽광(霍光)의 주도로 무제(武帝)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데려다가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새 황제가 황음무도(荒淫無道)하게 행동하자 즉위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다시 무제의 증손 유순(劉詢)을 맞아들여 황제, 즉 선제(宣帝)로 옹립하였다. 《漢書 卷68 霍光傳》

아아! 천하를 전하는 것은 막중한 대사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낱 옥새로 신표 삼기를, 마치 현승(縣丞)이나 현위(縣尉) 같은 관리가 인끈을 품고 다니듯이 하는가?
무릇 도가 있는 곳에 덕이 모이고, 보물이 있는 곳에 도적이 꾀는 법이다. 그러므로 작은 도적이 집에 들면 큰 도적이 그 길목을 지키는 것이니, 진시황이 애당초 제후에게서 옥새를 겁탈하였기 때문에 아들 호해(胡亥)가 훔쳐 내는 것을 금할 수 없었으며, 저 진승(陳勝), 오광(吳廣), 항적(項籍)의 무리들이 벌써 사방에서 일어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들이 그 아비에게서 훔치기도 하고 아내가 지아비에게서 훔치기도 하고, 종이 주인에게서 훔치기도 하여, 뭇 도적이 집안에 모여들고 병란이 일어나니 옥새로 인한 화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현승(縣丞)이나 …… 관리 : 현승과 현위는 중국에서 한 나라 때 이래 현(縣)의 장관을 보좌하던 관직.
▶호해(胡亥)가 훔쳐 내는 것 : 진시황이 즉위 27년에 죽자 간신 조고(趙高)가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호해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태자인 부소(扶蘇)에게 거짓 조서를 내려 보내 자살하게 한 일.
▶진승(陳勝), 오광(吳廣), 항적(項籍) : 진승은 오광과 함께 진(秦)나라 말에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고, 항적은 곧 항우(項羽)이다.

효원황후(孝元皇后)가 천하를 왕망(王莽)에게 내어 주면서도 끝내 단신으로 옥새를 지키려 하였으니, 슬프다! 한낱 옥새의 있고 없음이 천하에 무슨 관계이랴! 그것은 결국 하찮은 부인네의 지혜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지만, 왕망도 어리석다 하겠다. 진실로 운수가 제게 있다면 한낱 옥새에 대해 애쓸 게 어디 있겠는가.
▶효원황후(孝元皇后)가 …… 하였으니 : 효원왕후는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비(妃)로, 왕망의 고모였다.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자 왕망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왕망은 한(漢) 왕조를 멸망시키고 신(新) 나라를 세운 뒤 효원황후에게 강청하여 한 나라의 전국새(傳國璽)를 넘겨받았다.

손견(孫堅)이 의(義)를 바로잡겠다고 서쪽 장안으로 가서 궁중을 숙청하고 개연(慨然)히 동맹을 맺어 힘껏 한(漢)나라 왕실을 도왔으므로 그 공이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과 같은 수준이라 하겠더니, 옥새를 손에 넣자 사특한 마음이 생겨 결국에는 의로운 일을 끝맺지 못했다. 이로 보면 그 물건이 요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손견(孫堅) : 삼국시대 오(吳)나라 황제가 된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한(漢)나라 말 때 의병을 일으켜 원술(袁術)과 함께 간신 동탁(董卓)을 토벌했다. 동탁의 군대가 퇴각하면서 불을 지른 장안에 입성했을 때 우물에서 한 나라의 전국새(傳國璽)를 찾아내었다고 한다.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 : 춘추 시대 제후들의 맹주(盟主)가 되었던 이른바 오패(五覇)의 대표적 인물들.

강좌(江左)의 임금들이 천자의 적통을 이었으면서도 백판(白板)의 기롱을 부끄러워했으니, 천자이면서도 백판을 부끄러이 여긴다면 이것은 옥새가 고신(告身 임명장 )이 되는 것이고 황제는 하사받은 관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사해만국(四海萬國)이 존숭하는 지위를 옥새가 비천하게 만든 셈이니 어찌 너무도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천하를 차지한 사람도 본시 옥새로 인하여 흥한 것은 아니니, 옥새가 천하에서 상서(祥瑞)가 되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강좌(江左)의 임금들 : 강동(江東), 즉 동진(東晉)의 황제를 가리킨다.
▶백판(白板)의 기롱 : 백판은 관직을 임명할 때 원래는 인장(印章)을 찍어야 하는데 사정이 생겨 임명판(任命板)에 아무 인장도 찍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서진(西晉)이 망하고 강동(江東)에 동진(東晉)이 들어섰으나 옥새를 잃어버려 한동안 옥새가 없는 황제가 있게 되었다. 북위(北魏)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백판천자(白板天子)라 놀려 댔다.

나라가 망하는 날 혹 옥새를 목에 걸고 항복하기도 하고 선위(禪位)하는 즈음에는 혹 옥새를 받들어 바치기에 바빴으니, 그 흉하고 상서롭지 못함이 이 물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물건이라고 하면 옳겠거니와, 나라를 일으키는 보물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뒷날 천하를 전하는 사람은 응당 그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부숴 버려서 도적의 마음을 막아 버리고,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절하면서 공경한 자세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정밀하고 전일하게 살펴서 그 중(中)을 잡으라[允執厥中].” 하고, 여러 제후와 벼슬아치들은 모두 관(冠)을 쓰고 제자리에서 두 손 모아 머리 숙이면서 “천명(天命)은 일정함이 없어 덕 있는 자를 돌아보나니 유념하소서. 임금님이시여!” 하여야 한다고 본다.
▶정밀하고 …… 잡으라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왕위를 전하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게 살펴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한 데에서 나온 말.

 

『연암집』 <옥새론>의 말미에는 누군가 이런 평(評)을 달아놓았다.

 

주장을 세운 것이 준엄하고 올바르다. 옥새의 내력을 말한 부분은 의론(議論) 같기도 하고 서사(敍事) 같기도 하여 종횡무진 변화가 많은 가운데 비분강개한 심정을 머금었고, 끝맺는 부분도 매우 전아하고 엄밀하니 요컨대 더 이상 손댈 곳이 없는 문장이라 하겠다.

옛날에 남에게 물건을 바칠 때에는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보다 먼저 바쳤으니, 4장의 소가죽을 12마리 소보다 먼저 보낸 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주발(周勃) 이하는 그래도 옥새를 천하보다 앞서 바쳤는데 효원황후는 그렇지 않아서 천하를 바칠망정 옥새는 바칠 수 없다 여겼으니, 이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옥새에 있고 천하는 도리어 가벼이 여긴 것이다. 이 어찌 하찮은 부인네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저 왕망은 상자를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꽁꽁 잠그고서도 오히려 끝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근심하여 급급히 겁탈하여 차지했으니, 이는 욕심이 오직 옥새에 있는 것이다.
▶4장의 …… 일 : 춘추시대 노(魯)나라 희공(僖公) 33년에 진(秦)나라 군대가 활(滑) 땅에 이르자 정(鄭)나라 상인 현고(弦高)가 소가죽 4장을 먼저 예물로 보내고 소 12마리를 나중에 보내어 군사들을 먹였다는 고사. 《春秋左氏傳 僖公33年》
▶왕망은 …… 잠그고서도 : 왕망은 신(新) 나라의 황제가 된 뒤 종묘에 나아가 애장(哀章)이란 자가 위조한 옥새를 받았다. 《前漢書 卷99上 王莽傳》

도가 이미 없어졌으니 천하의 가장 큰 보물은 옥새가 되었다. 어떻게 옥새를 손에 넣을 수 있는가 하면 도적질밖에는 없으니, 도장 꼭지가 이지러지고 모서리가 부러져도 큰 도적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수를 다하고 길이 창성하리라[旣壽永昌]”라고 새겨진 것 또한 왕왕 진흙 모래나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번갈아 나오기도 하니, 헛갈리고 의심스러워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할 수 없다.

옥새가 화를 끼침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누가 천하를 위하여 이 물건을 깨뜨려 그 화의 근원을 영원히 끊을 것인가. 저 오계(五季)의 구름 일 듯 어지럽던 시대에 옥으로 만든 옷을 입고 벽옥을 품고 다닌 임금들이 일찌감치 이 글을 읽었더라면 소중히 여길 것이 옥새에 있지 않음을 알고 보물로 여기는 대상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성(連城)의 보배를 까치에게 던져 버렸을 것이다.
▶오계(五季) : 오대(五代)라고도 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분열이 심하고 왕조의 교체가 짧은 기간에 자주 일어난 시기로, 당(唐)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의 약 5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의 왕조로는 후량(後梁 : 907~923), 후당(後唐 : 923~936), 후진(後晉 : 936~946), 후한(後漢 : 946~950), 후주(後周 : 950~959)가 있다.
▶연성(連城)의 보배 : 연성벽(連城璧) 또는 연성옥(連城玉)이라고 하는데, 여러 성과 맞바꿀 만한 가치를 지닌 진귀한 옥이란 뜻으로 화씨벽(和氏璧)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화씨벽으로 만든 옥새를 가리킨다.
▶까치에게 던져 버렸을 것이다 : 《염철론(鹽鐵論)》 숭례(崇禮)에, “남월에서는 공작으로 문고리를 만들고, 곤산 주변에서는 박옥을 까치에게 던진다.”는 구절이 있다. 곤산에는 옥이 많이 생산되어 다른 지방에서 귀하게 여기는 옥을 이곳에서는 아주 하찮게 취급한다는 의미.

 

[영국, 1744 <마르코폴로의 여행지도> 속 Eastern Sea로 표기된 동해, 동북아역사재단]

 

 

번역문 출처 : 연암집(신호열 김명호, 2004,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