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35 - 백이론(伯夷論) 하(下)

從心所欲 2021. 7. 30. 12:58

백이론(伯夷論) 하(下)는 상(商)나라가 망할 때의 상황과 당시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어도 그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상(商)이란 나라는 고고학적으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랜 국가이다. 그 앞에 존재했다는 하(夏)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상(商)이 중국 최초의 왕조이다.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 존재했고, 주(周)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흔히 은(殷)나라로 많이 불리지만, 은(殷)은 상나라 후기인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의 상나라 도읍 이름이다.

 

이 상(商)의 마지막 임금이 주왕(紂王)이다. 총명하고 용맹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즐기고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반면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고, 이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진압하기 위하여 혹독한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밑에는 아첨을 잘하는 비중(費中)이라는 인물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했는데,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채웠다.

따라서 백성들과 제후(諸侯)들은 점차 주왕(紂王)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특히 후에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되는 서백(西伯) 희창(姫昌)의 세력이 점차 강성(强盛)해지고 있었다.

 

후세는 이 당시 상(商)에는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미자(微子), 비간(比干), 기자(箕子)이다.

미자(微子)는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이복형이다. 어머니가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위(王位)를 계승받지 못했으며, 미(微)에 봉(封)해져 미자(微子)라고 불렸다.

주왕(紂王)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暴政)에 대해 여러 차례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商)의 예악(禮樂)을 담당하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를 한 후, 아우인 자연(子衍)과 함께 상(商)을 떠나 봉지(封地)인 미(微)로 돌아갔다. 상(商)이 멸망한 뒤 미자(微子)는 주(周) 무왕(武王)을 찾아가 투항하면서, 상(商)의 종사(宗祀)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무왕(武王)은 미자(微子)의 청을 받아들여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상(商)의 도읍인 은(殷)에 봉(封)하여 상(商)의 종사(宗祀)를 잇도록 하였다.

▶은(殷) : 지금의 하남(河南) 안양(安陽)

 

비간(比干)과 기자(箕子)는 모두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비간(比干)은 이름이 비(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비간(比干)이라고 불렸다.

비간(比干)은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忠諫)해야 한다”며 계속 주왕(紂王)에게 간언(諫言)하였다. 그러자 주왕(紂王)은 화를 내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며 비간(比干)의 충심(忠心)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겠다며 그를 죽여 심장을 꺼내도록 하였다.

 

역시 주왕(紂王)에게 간언(諫言)을 하던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죽음을 보고는 두려운 나머지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을 하며 남의 노비가 되려 하였다. 하지만 주왕(紂王)은 그를 사로잡아서 유폐(幽閉)시켰다. 기원전 1046년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주왕(紂王)이 주(周) 무왕(武王)에게 패하고 자살하자 석방되었는데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주(周)를 벗어나 북(北)으로 이주하였다.

 

<백이론(伯夷論)> 하(下)

공자(孔子)가 옛날의 인자(仁者)를 칭송했으니, 기자(箕子), 미자(微子), 비간(比干)이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인(仁)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자가 옛날의 성인(聖人)을 칭송했으니,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백이(伯夷)가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성(聖)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자(孔子)가 …… 이들이다 : 「논어」 미자(微子)에 “미자(微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箕子)는 잡혀서 종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충고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殷)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다.’고 하였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맹자가 …… 이들이다 : 이윤(伊尹)은 탕왕을 도와 상나라를 세운 재상. 유하혜(柳下惠)는 낮은 벼슬자리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직도(直道)를 지켜 임금을 섬겼으며 도리에 맞게 일이 시행되지 않고 자신의 뜻이 버림받아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자인 전획(展獲).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 맹자가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의 청(淸)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중의 화(和)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라고 하였다.

저 태공(太公)은 옛날의 이른바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었으니, 그 행실은 백이와 똑같고 도(道)는 이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의 인(仁)을 칭송하며 세 분의 인자와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며, 맹자도 그의 성(聖)을 칭송하며 세 분의 성인과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태공(太公)은 …… 때문이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는 태공을 백이와 함께 대로(大老)라고 불렀다. 태공은 백이와 마찬가지로 폭군 주(紂)를 피해 은거하다가 서백(西伯) 즉 주(周)나라 문왕에게 귀의하였다. 또한 태공은 이윤이 탕왕(湯王)을 도와 은나라를 세웠듯이,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도(道)가 흡사했다고 한 것이다. 도(道)가 똑같다고 하지 않은 것은, 이윤이 천하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정의를 지키고자 한 데 비해, 태공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법과 기계(奇計)를 즐겨 구사한 때문인 듯하다. 《史記 卷31 齊太公世家》에는 태공이 지었다는 《육도(六韜)》라는 병서가 전한다.

아, 내가 은나라를 살펴보건대 그 나라에는 다섯 분의 인자가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섯 분의 인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백이와 태공을 합해서 하는 말이다. 저 다섯 분의 인자들은 소행은 역시 각자 달랐지만, 모두 절실하고 간곡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기다려야만 인(仁)이 되고, 서로 기다리지 않을 경우 불인(不仁)이 되는 처지였다.
미자는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도 없는데 충고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은나라의 종사(宗祀)를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으니,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종사(宗祀) : 조종(祖宗)에 대한 제사

비간은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서 충고하지 않느니 차라리 낱낱이 충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충고하고 죽었으니, 비간은 기자가 도(道)를 전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기자는 속으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를 전하랴.’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으니, 기자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천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 기자는 태공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태공은 속으로 자신을 은나라의 유민(遺民)으로 생각하면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少師)는 떠났고, 왕자(王子)는 죽었고, 태사(太師)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은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紂)를 쳤으니, 태공 역시 서로 기다릴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후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니,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백이는 속으로 자신을 은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는 떠났고, 왕자는 죽었고, 태사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그 의리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周)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무릇 이 다섯 분의 군자가 어찌 좋아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두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 서로 기다려서 인(仁)이 된다 할 것 같으면, 태공이 없었을 경우 기자가 목야(牧野)의 대사(大事)를 치렀어야 하고, 백이가 아니었다면 태공이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어야 한단 말인가?”
하기에, 이렇게 답하였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기다릴 따름이니, 신포서(申包胥)와 오자서(伍子胥)가 서로에게 고지(告知)한 것과는 같지 않다.
▶신포서(申包胥)와 …… 것 : 신포서와 오자서(伍子胥)는 모두 초(楚) 나라 사람이다. 오자서는 부형이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살해당하자 복수하려고 오(吳)나라로 망명하였다. 9년 후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나라의 도읍 영(郢)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에 매질을 가하여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신포서는 초나라의 대부이다. 오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왕이 피난하는 국난이 있자 진(秦)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진나라가 구원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대궐의 뜰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울면서 이레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진나라 애공(哀公)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 오나라를 물리쳤다. 처음에 신포서와 오자서는 친구 사이였는데,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말겠다.” 하니, 신포서가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그러나 왕자가 없었다면, 소사(少師)가 반드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떠났다면, 소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소사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왕자가 홀로 죽었다면, 왕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왕자가 이미 죽고 소사가 이미 떠났는데도 태사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태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태공이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백이가 후세 사람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백이와 태공은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주나라로 달아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비간이 충고하다가 죽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기자가 도를 전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태공이 주(紂)를 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백이가 주나라를 받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다.

나는 그러기에 백이와 태공의 도(道)를 은나라의 세 분의 인(仁)에 합친 것이다. 이는 또한 공자의 뜻이었다. 공자가 태공을 칭송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백이의 경우에는 자주 그 덕을 칭송하고,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감히 그를 세 분의 인자와 연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무왕에게 누가 될까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에 다섯 분의 인자가 합해야 온전한 인(仁)이 된다면, 어찌 수고스럽지 않은가?”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로써도 인이 되기로 말하자면, 편협하거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어찌 백이가 청렴해서 성인이 되고 유하혜가 화합을 잘해서 성인이 된 사실을 가릴 수 있겠는가.”
▶편협하거나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에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니, 편협함과 공손하지 못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다.” 하고,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聖人) 중의 청(淸)한 자요, 이윤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 중의 화(和)한 자요, 공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뜻은, 백이와 유하혜가 모든 미덕을 갖춘 공자와는 다르지만 한 가지 미덕만으로도 ‘성(聖)’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듯이, 백이와 태공 또한 ‘인(仁)’이라는 범주에 넣어도 손상이 없다는 의미이다.

 

[걸리버가 여행했던 지역에 대한 지도 속의 'Sea of Corea']

 

 

번역문 출처 : 연암집(신호열 김명호, 2004,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