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0 - 호민론(豪民論)

從心所欲 2021. 7. 16. 05:12
호민론(豪民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여덟 번째 논(論)이다.

 

 

<호민론(豪民論)>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살이 …… 부서지며 : 중국 당나라 때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가 사용했던 말이다. 살을 깎고 골수를 부순다[剝膚椎髓]는 의미로, 가혹한 수탈 정책을 상징하는 말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ㆍ고무래ㆍ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 나라의 멸망은 진승(陳勝)ㆍ오광(吳廣) 때문이었고, 한(漢)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 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그것 때문에 인민과 나라가 멸망하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을 괴롭혀서 자기 배만 채우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편승할 수 있어서였다.

▶진승(陳勝)ㆍ오광(吳廣) : 진승은 진(秦)나라 사람으로, 진나라 2세 때 오광과 함께 어양(漁陽)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진(秦)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초왕(楚王)이 되어 세력을 확장했으나 마침내 패망하였다. 오광은 진승과 함께 진 나라에 반기를 들고 항거하여 가왕(假王)이 되었다가 뒤에 피살되었다.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 : 왕선지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희종(僖宗) 초에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뒤에 황소(黃巢)가 호응해 주어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진압된 후 죽었다. 황소는 대대로 소금 장사를 하며 많은 재산을 모아 망명객들을 부양하였고, 무예에 뛰어나 왕선지가 난을 일으키자 호응했다. 왕선지가 죽은 뒤 왕으로 추대되고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이 되었다. 10년 동안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큰 세력을 떨쳤으나 뒤에 패망하여 자결했다.

 

대저 하늘이 사목(司牧)을 세운 것은 양민(養民)하기 위함이고,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메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들 진(秦)ㆍ한(漢) 이래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이 좁고 험준하여 인민도 적고, 백성은 또 나약하고 좀 착하여 기절(奇節)이나 협기(俠氣)가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도 큰 인물이나 뛰어나게 재능 있는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수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호민ㆍ한졸(悍卒)들이 창란(倡亂)하여,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게 하던 자들도 역시 없었으니 그런 것은 다행이었다.

▶사목(司牧) : 임금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시대는 백성에게 부세(賦稅)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상업은 자유롭게 통행되었고, 공인(工人)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나라에는 여분을 저축해 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큰 병화(兵禍)와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그 부세(賦稅)를 증가하지 않았었다. 고려는 말기에 와서까지도 삼공(三空)을 오히려 걱정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변변치 못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만은 중국과 동등하게 하고 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分)이라면 공가(公家)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分)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스러운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또 고을의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1년에 더러는 두 번 부과하고, 수령(守令)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마구 거두어들임은 또한 극도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삼공(三空) : 흉년이 들어 제사를 궐하고, 서당에 학도들이 오지 않고, 뜰에 개가 없는 것. 가난을 비유하는 말이다.
▶공가(公家) : 관청

 

불행스럽게 견훤(甄萱)ㆍ궁예(弓裔)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며, 기주(蘄州)ㆍ양주(梁州)ㆍ6합(合)의 변란은 발을 제겨 딛고서 기다릴 수 있으리라.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전철(前轍)을 고친다면 그런 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견훤(甄萱)ㆍ궁예(弓裔) : 견훤은 후백제의 왕으로 신라 말엽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세웠다. 궁예는 신라 말엽 후고구려의 왕으로 뒤에 태봉국을 세워 왕이 되었다.
▶기주(蘄州) …… 변란 : 기주와 양주(梁州)를 거점으로 했던 황소(黃巢)의 난을 가리킴.

 

[영국, 존 세넥스(John Senex) 1721년 제작 <A New Map of India & China> 부분. 동해(Eastern Sea)표기, 동북아역사재단]

 

 

 

번역문 출처 : 성소부부고(임형택 역, 1983,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