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2 - 한정록(閑情錄) 범례(凡例)

從心所欲 2021. 8. 4. 13:36

내가 경술년(庚戌年)에 병으로 세간사(世間事)를 사절(謝絶)하고 문을 닫고 객(客)을 만나지 않아 긴 해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보따리 속에서 마침 책 몇 권을 들춰내었는데, 바로 주난우(朱蘭嵎) 태사(太史)가 준 서일전(棲逸傳), 《옥호빙(玉壺氷)》, 《와유록(臥遊錄)》 3종이었다. 이것을 반복하여 펴 보면서 곧바로 이 세 책을 4문(門)으로 유집(類集)하여 『한정록(閒情錄)』이라 이름하였다.

그 유문(類門)의 첫째가 ‘은일(隱逸)’이요, 둘째가 ‘한적(閒適)’이요 셋째가 ‘퇴휴(退休)’요 넷째가 ‘청사(淸事)’였다. 내 손으로 직접 베껴 책상 위에 얹어 두고, 취미가 같은 벗들과 그것을 함께 보며 모두 참 좋다고 하였다.

▶경술년(庚戌年) : 광해군2년인 1610년
▶주난우(朱蘭嵎) : 명(明)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난우(蘭嵎)는 그의 호.
▶주난우(朱蘭嵎)……3종이었다 : 선조 39년(1606년) 허균이 38세 때 주지번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당시 허균은 원접사 유근(劉根)의 종사관이 되어 주지번을 만났고, 그로부터 이 책들을 얻었다. 이때 허균은 주지번에게 《난설헌집(蘭雪軒集)》을 주었다.

 

그런데 내가 일찍부터 집에 있는 사적(史籍)이 적고 이 『한정록(閒情錄)』이 매우 간략(簡略)한 것이 아쉬워, 여기에 유사(遺事)를 첨입(添入)하여 전서(全書)를 만들기를 간절히 바라 계획한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바빠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갑인(甲寅)ㆍ을묘(乙卯) 양년(兩年)에 일이 있어 북경(北京)에 두 번이나 가게 되어, 그때 집에 있는 돈으로 약 4천 권의 책을 구입하였다.

그 가운데서 한정(閒情)에 관계되는 부분에는 부첩(浮帖)으로 책 윗부분에 끼워두었다가 나중에 옮겨 적을 때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맡아 공무(公務)가 너무 많게 되어 감히 취선(聚選)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금년 봄에 남의 고발을 당해 죄인의 몸이 되자 두렵고 놀란 정황에 깊은 시름을 떨쳐버릴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그 책들을 가져다가 끼워놓은 부첩을 보고 베껴내고, 이것을 다시 16부문(部門)으로 나누니 권(卷)의 분량도 역시 16권이 되었다.

아, 이제야 『한정록』이 거의 완결되었고, 나의 산림(山林)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이로써 더욱 드러났구나.

▶갑인(甲寅)ㆍ을묘(乙卯) : 각기 1614년과 1615년
▶부첩(浮帖) : 표시하기 위하여 책갈피에 끼우는 종이쪽지
▶형조 판서……맡아 : 허균이 형조 판서를 맡은 것은 48세 되던 광해군 8년(1616)이었다.
▶금년 봄에 남의 고발을……몸이 되자 : 광해군 9년(1617)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허균을 역모혐의로 고발한 일. 기준격의 고발한 내용이 10년 전에 허균이 했다는 말을 근거로 한 것이라 광해군은 처음에는 신중히 결정짓겠다고 하였으나 허균을 국문하라는 연이은 상소와 새로운 고발이 들어오면서 이듬해인 1618년 봄부터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 허균은 체포되고 모든 혐의를 부인했음에도 반역죄로 몰려 그 해 8월에 참형(斬刑) 당했다. 따라서 이 <범례>를 쓴 때는 1618년이다.

 

1. 고인(古人)이 세상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는 것은 이름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몸을 오래도록 속세(俗世)를 떠나서 한거(閑居)하게 하여 그 은거의 즐거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일 처음을 ‘은일지사(隱逸之士)’로 하였고, 거기 수집(收集)한 것이 다른 것보다 많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1로 ‘은둔(隱遁)’으로 한다.

 

2. 고인(高人)이나 일사(逸士)가 앞의 ‘은둔(隱遁)’ 부문에서 많이 나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다만 속세(俗世)의 선비로서 자연(自然)으로 달려가고 싶은 뜻과 한적(閑寂)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는 벼슬을 줄 수 없다. 은둔자 중에서도 기이한 자취를 가진 자와 높은 관직에 있는 자로서도 모범을 보이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2 ‘고일(高逸)’로 한다. 끝에 세 가지 일은, 그 사람이 고상(高尙)하거나 은일(隱逸)의 풍은 없으나 높일 만한 점이 있으므로 끝에다 붙였다.

▶고인(高人) :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세상(世上) 물욕(物慾)에 뜻을 두지 아니하는 고상(高尙)한 사람. 품행이 고상한 사람. 고사(高士).
▶일사(逸士) : 재야(在野)의 은군자(隱君子). 은사(隱士).

 

3. 한적(閑適)이 이 집록(集錄)에서 제일 중요한 곳인데, 그것은 은둔하여 이 세상을 떠나 있거나 속세에 있거나 모두 자적(自適)에 이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3 ‘한적(閑適)’으로 한다.

▶자적(自適) : 속박(束縛)됨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생활(生活)함.

 

4.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5. 산천(山川)의 경치를 구경하여 정신을 휴식시키는 것은 한거(閑居) 중의 하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5 ‘유흥(遊興)’으로 한다.

 

6. 한정(閑情)을 좋아하는 선비의 뜻은 자연히 달라서, 속인(俗人)은 비웃고 고인(高人)은 찬탄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6 ‘아치(雅致)’로 한다.

 

7. 퇴거(退去)한 사람은 맛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의복을 취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검소해야 돈도 절약이 되고 복(福)도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7 ‘숭검(崇儉)’으로 한다.

 

8. 세속의 울타리를 벗어난 선비의 소행(所行)은 마음대로여서 법도(法度)가 없지만, 그 풍류(風流)와 아취(雅趣)는 속진(俗塵)을 씻거나 더러움을 맑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므로 제8 ‘임탄(任誕)’으로 한다.

 

9. 장부(丈夫)의 처세(處世)는 마땅히 가슴이 탁 트이도록 가져야 하니, 상황에 따라 마음을 크게 먹고 순리(順理)로써 스스로를 억제하면 인품(人品)이 고상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자연 고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9 ‘광회(曠懷)’로 한다.

 

10. 한가한 곳에서 혼자 살면서 담박하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일상 생활하는 일이야 그 일을 당하면 역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10 ‘유사(幽事)’로 한다.

 

11. 고인(古人)의 짤막한 말이나 대구(對句) 같은 것 중에 속된 것을 치유하거나 세상을 훈계할 만한 것이 있는데, 한거(閑居) 중에는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제11 ‘명훈(名訓)’으로 한다.

 

12. 글은 고요한 데서 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한거자(閑居者)가 글이 아니면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며 흥(興)을 붙이겠는가. 그러므로 제12 ‘정업(靜業)’으로 한다.

 

13. 옛날에 고인(高人)이나 운사(韻士)는 풍류(風流)를 서로 감상하거나 문예(文藝)로써 스스로 즐겼다. 그러므로 서화(書畫)나 거문고, 바둑 등 여러 가지 고상한 놀이는 사람의 성미(性味)에 맞아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도구(道具)로서 없앨 수 없다. 따라서 제13 ‘현상(玄賞)’으로 한다.

▶운사(韻士) : 시가(詩歌)나 서화(書畫) 등에 취미가 있는 사람. 운치가 있는 선비.

 

14. 산에 은거하여 살 때도 역시 필요한 일용품(日用品)이 있는데, 침석(枕席)이나 음식이 세속(世俗)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제14 ‘청공(淸供)’으로 한다.

 

15. 신선(神仙)을 구하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애매하여 잘 알 수 없다. 산과 못의 오래됨 같이 복식(服食)과 섭양(攝養)으로 오래 살 수 있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5 ‘섭생(攝生)’으로 한다.

 

16.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四民)의 생업 중에서 농업(農業)이 근본으로 한거자(閑居者)가 해야 할 사업(事業)이다. 그러므로 제16 ‘치농(治農)’으로 한다.

 

17. 시부(詩賦)나 잡문(雜文)으로 한정(閑情)에 대해 읊은 것을 모아 별집(別集)을 만들어 『한정록』 뒤에 붙여야 할 것이다.

 

18. 오영야(吳寧野)의 《서헌(書憲)》, 원석공(袁石公)의 《병화사(甁花史)》와 《상정(觴政)》, 진미공(陳眉公)의 《서화금탕(書畫金湯)》등이 모두 사람의 본성에 맞는 놀이의 도구로써 한정(閑情)에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록의 끝에 붙여 고요하게 감상할 자료로 삼게 한다.

 

[전김홍도필 산수인물도(傳金弘道筆山水人物圖), 견본채색, 69.1 x 40.6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