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4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2

從心所欲 2021. 8. 10. 13:32

● 사마덕조(司馬德操 : 덕조는 후한 사마휘(司馬徽)의 자)는 인륜(人倫)이 있는 사람이었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 유표(劉表)가 혼암(昏暗)하여 반드시 착한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입을 다물고 다시는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이때 인물(人物)들을 놓고 사마덕조에게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초부터 인물들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번번이 좋다고만 말하므로, 그 아내가 간(諫)하기를,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면, 당신이 마땅히 분별해서 논해 주어야 하는데 모두 좋다고만 하니, 어찌 사람들이 당신에게 물어보게 된 본의이겠습니까?”

하니, 사마덕조가,

“당신의 말 역시 좋은 말이오.”

하였다.

 

● 남군(南郡) 방사원(龐士元 : 사원은 촉한(蜀漢) 방통(龐統)의 자)이 사마덕조가 영천(穎川)에 있다는 말을 듣고, 2천 리나 찾아가 기다리다 뽕을 따고 있는 사마덕조를 만나게 되었다. 방사원은 수레 속에서 말하기를,

“나는 대장부가 세상에 살며 마땅히 대금(帶金 : 칼을 차는 고리)하고 패자(佩紫 : 자색 인수(印綬)를 찬다는 뜻으로 곧 고관이 되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혼란한 세상을 되돌릴 역량이 있으면서 길쌈하는 지어미의 일을 하겠습니까?”

하므로, 사마덕조가,

“당신은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당신께서는 참 샛길이 빠른 줄만 알지, 길을 잃고서 헤매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옛적에 백성자고(伯成子高 : 요(堯) 임금 때 사람)가 짝지어 밭을 갈며 영광스러운 제후(諸侯)로 있기를 생각하지 않았고, 원헌(原憲 : 공자의 제자)이 오두막집에서 살며 관사(官舍)와 바꾸지 않았습니다. 어찌 화려한 집에서 살고 살찐 말만 타고 다니며, 시녀(侍女)가 수십 명인 다음에만 기이하다 하겠습니까. 이는 곧 허유(許由)ㆍ소부(巢父)가 분개하게 여기고,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장탄식(長歎息)하던 일입니다. 비록 진(秦) 나라에서 절취한 벼슬과 천사(千駟 : 말 사천 마리 또는 사두마차(四頭馬車) 천 대)의 부(富)를 가졌더라도 그리 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방사원이,

“내가 변방(邊方)에서 생장하여 대의(大義)를 본 일이 적은데, 만약 한번 큰 종을 두들겨 보지 않고 우레 같은 북을 쳐보지 않았더라면, 그 울리는 소리를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하였다. 《고사전》

 

● 손공화(孫公和 : 공화는 진(晉) 손등(孫登)의 자)는 가족이 없이 고을 북쪽의 산에다 토굴을 만들고 살았다. 《역경(易經)》 읽기를 좋아하고 외줄 거문고 타기를 좋아했으며 성내는 일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혹 그가 성내는가 보려고 물속에다 던져버리면, 손등이 물에서 나와서는 곧 크게 웃었다. 일찍이 의양산(宜陽山)에서 살며 숯을 구웠는데 사람들이 보고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와 이야기하려 해도 응답하지 않았다. 완적(阮籍)이 찾아가서 말을 붙였으나 응답하지 않았고, 혜강(嵇康) 역시 종유(從遊)한 지 3년 만에 계획하는 바를 물었지만 마침내 답하지 않았다. 혜강이 작별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선생께서 끝내 말을 하지 않으시렵니까?”

하자, 그제야 손등이,

“당신은 불을 아십니까? 불이 발하여 빛을 내는데도 그 빛을 사용하지 않는데 과연 빛은 사용하기에 달린 법이고, 사람이 나서 재주가 있는데도 그 재주를 사용하지 않는데 과연 재주는 사용하기에 달린 법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사용은 섶[薪]을 얻기에 달렸는데 그렇게 되면 광채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고, 재주의 사용은 참된 것[眞]을 알아차리기에 달렸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의 수명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재주만 많고 식견은 적어 요새 세상에 면하기 어렵겠으니, 당신은 딴 것을 구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했으나, 혜강이 그렇게 하지 않아, 과연 비명(非命)에 죽게 되자, 혜강이 ‘유분(幽憤)’시를 짓기를,

昔慚柳下 예전의 유하혜에게 부끄럽고

今愧孫登 지금의 손등에게 부끄럽도다.

하고, 마침내 어디서 죽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위지(魏志)》

▶유하혜(柳下惠) :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자인 전획(展獲). 그가 살았던 식읍(食邑)인 버드나무골 유하(柳下)가 호가 되었고, 혜(惠)는 문인들이 그에게 올린 시호이다. 「맹자」에, “유하혜는 성인으로서 온화한 기질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유하혜는 일찍이 사사라는 관직을 지내면서 형옥(刑獄)을 맡았는데, 세 번 쫓겨나자 사람들이 떠나기를 권했다. 그러자 그는 “곧은 도리로 남을 섬기면 어디를 간들 쫓겨나지 않을 것이며, 도를 굽혀 남을 섬김으로써 하필 부모님의 나라를 떠나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이를 두고 훗날의 맹자는 작은 벼슬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며 그를 칭찬했다.

 

● 손공화(孫公和)는 청정무위(淸淨無爲)하여, 《역경》읽기와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고 구애받음 없이 방일(放逸)했는데, 그 풍신(風神)을 보노라면 마치 속세를 떠나 노니는 것 같았다. 위(魏)나라 말엽에 북산(北山) 속에서 살며, 석굴(石窟)로 집을 삼고 새[草]로 신을 삼아 신었다. 완보병(阮步兵 :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인 완적의 별칭.)이, 손공화가 머리를 푼 채 바위 밑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서 바라보니 거문고를 타고 있으므로, 아래서부터 뛰어올라갔지만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완보병이 이내 길게 휘파람을 불어 거문고 소리와 조화가 되자 손공화가 휘파람으로 화답을 하여, 오묘한 음향(音響)이 골짜기에 울렸다. 《고사전》

 

● 완보병(阮步兵)은 휘파람이 수백 보까지 들렸다. 나무하러 갔던 사람들이 소문산(蘇門山) 속에 갑자기 진인(眞人)이 나타났다고 하므로, 완적(阮籍)이 찾아가 보니, 그가 바위 곁에 무릎을 끼고 있었다. 완적이 고개로 올라가 다가가니,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대했다. 완적이 상고(上古)의 일을 토론하여, 위로는 황제(皇帝)와 신농(神農)의 심오(深奧)한 도리를 말하고, 아래로는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성덕(盛德)을 들어 질문했지만, 고개만 들고 응답이 없었다. 완적이 다시 쓸모 있는[有爲] 교훈과 정신 안정, 원기 도인(導引)하는 방법을 서술(敍述)해도, 그가 오히려 여전히 까딱 않고 응시만 하였다. 완적이 그제는 마주앉아 한참 동안 길게 휘파람을 부니, 비로소 웃으면서,

“다시 해보라.”

했다. 완적이 다시 흥이 다하도록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고개중턱쯤 되돌아갔을 때 위에서 구슬픈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몇 가지의 고취(鼓吹)가 산골짝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아 돌아다보니 바로 그 사람이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고사전》

 

● 하중어(夏仲御 : 중어는 진(晉) 하통(夏統)의 자)는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여 낙양(洛陽)으로 약을 사러 갔는데, 마침 상사(上巳 : 음력 3월 첫째 사(巳)일)날이므로 낙양 안의 왕공(王公)들이 모두 부교(浮橋)로 나와 수레가 구름 모이듯 했으나, 하통(夏統)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가충(賈充)이 배를 끌고 다가가 말을 붙여보니, 응답하는 말소리가 메아리가 울리듯 하므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고개를 숙이고 응답하지 않았다. 가충이,

“당신은 당신 고향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자, 하통이,

“옛적에 조아(曹娥 : 후한의 효녀(孝女))가 물에 빠져 죽으매 나라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겨 그를 위해 하녀장(河女章)을 지었고, 오자서(伍子胥 : 춘추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이름은 운(員))가 충성을 하다 바다에 빠져 죽자, 나라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겨 그를 위해 소해창(小海唱)을 지었으니, 지금 불러보고 싶소.”

하고는 발로 뱃전을 두들기며 맑고도 격렬하게 곡조를 빼니, 큰 바람이 일고 구름과 비가 모여들었다. 가충이 성장(盛裝)한 기녀(妓女)를 시켜 배를 세 겹으로 둘러앉도록 했지만, 하통이 여전히 다리를 괴고 앉아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 하므로, 가충이 한탄하기를,

“이 오(吳) 나라 사람은 목석(木石) 같은 간장을 가진 사람이로다.”

하였다. 《진서(晉書)》

 

● 동위연(董威輦 : 위연은 동경(董京)의 자)은 초년에 농서(隴西)의 회계 맡은 관원[計吏]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가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녔고, 산책하면서 시를 흥얼거렸는데, 항시 백사(白社) 근방에서 지냈다. 이때 손초(孫楚)가 저작랑(著作郞)으로 있으면서 자주 백사로 가서 함께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런 두어 해 뒤 떠나버리고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잠자던 곳에 오직 석죽자(石竹子) 하나와 시 두 편이 있었는데, 그 중 한 편에는,

乾道剛簡 건도는 강간하고

坤體敦密 곤체는 돈밀하도다.

茫茫太素 한없는 대자연

是則是述 법 받고 계승해야 하는데

末世流奔 말세의 유폐

以文代質 형식으로 본질을 바꾸었도다.

悠悠世事 지루한 세속의 일

孰知其實 누가 그 실질을 알리

逝將去此至虛 장차 그 허무한 것을 버리고

歸我自然之室 내 대자연의 방으로 돌아가리라

 

하였고, 또 한 편에는,

 

孔子不遇 공자도 때 만나지 못했기에

時彼感麟 그 기린을 두고 감격했었네.

麟乎麟乎 기린이여, 기린이여

胡不遁世以存眞 어찌 세상 피하지 않고 참모습 보였던가.

하였다. 《고사전》

 

● 장천(張薦 : 자는 효거(孝擧). 당 나라 사람)은 은거하며 뜻을 수양했다. 집에 참대[苦竹] 수십 이랑이 있었는데, 장천이 그 대밭 속에 집을 짓고 항시 그 속에서 지내므로 왕우군(王右軍 :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별칭)이 듣고서 찾아갔으나, 장천이 대밭 속으로 도피해 버리고 만나주지 않았다. 《하씨어림》

 

● 도처정(陶處靜 : 처정은 진(晉) 도담(陶淡)의 자)은 나이 15세에 어느새 복식(服食 : 도가(道家)의 양생법)을 하고 곡식을 끊었으며, 집에 수천 금(金)이 있고 종과 식객(食客)이 수백 명이 있었으나, 도처정은 종일토록 단정하게 공수(拱手)하고, 절대로 결혼하거나 벼슬하지 않았다. 임상현(臨湘縣)의 산중에 살며 조그마한 초가집을 지었는데 겨우 몸을 용납할 만했고, 때로 집에 돌아오면, 작은 평상을 가져다 혼자 앉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씨어림》

 

● 유자기(劉子驥 : 진(晉) 나라 사람)는 겸허하여 욕심이 없고 은둔(隱遁)하는 데 뜻을 두었다. 환거기(桓車騎)가 장사(長史)가 되기를 청했으나, 유자기가 굳이 사양했다. 환거기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자 유자기가 뽕나무 가지를 치고 있다가, 사자(使者)가 명을 전하자,

“이미 사군(使君)께서 영광스럽게 왕림(枉臨)하셨으니, 먼저 아버지[家君]께 인사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므로 환거기가 그의 아버지에게 갔는데, 그 아버지가 유자기를 오라고 한 다음 도로 단갈(短褐)을 걸치고 환거기와 이야기하다가, 아들 유인지(劉驎之)를 시켜 안에 가서 막걸리와 채소를 가져다 손님께 대접하도록 했다. 환거기가 사람을 시켜 유인지를 대신하여 술을 따르게 하자, 그 아버지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마치 종자(從者)를 시키는 것과 같아, 자못 초야(草野) 사람들의 기본이 아니게 된다.”

고 하니, 환거기가 기분이 좋아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물러갔다. 《하씨어림》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신야경전(莘野耕田>, 지본담채, 국립민속박물관 : 중국사 최초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이윤(伊尹)이 재상이 되기 전 유신(有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고사를 소재로 한 그림]

 

● 곽원유(郭元瑜 : 원유는 진(晉) 곽우(郭瑀)의 자)는 젊어서부터 세속을 벗어난 운치가 있었다. 암혈(巖穴)에 숨어 사는데, 장천석(張天錫)이 사자(使者)를 보내 예물을 갖추어 초빙하자, 곽원유가 사자에게 날아가는 기러기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 새를 어떻게 가둘 수 있으랴.” 《하씨어림》

 

● 색위조(索偉祖 : 위조는 전량(前涼) 색습(索襲)의 자)는 잡념이 없고 안정하여 학문을 좋아했다. 고을에서 불러도 응하지 않자, 한번은 태수(太守) 음담(陰澹)이 찾아와 하루해가 저물도록 돌아가기를 잊고 있다가, 물러가려고 하면서 한탄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여유 있게 여기는 것은 부귀(富貴)로서, 눈은 화려한 오색(五色)을 좋아하고, 귀는 음악 소리를 즐거워합니다. 선생께서는 뭇사람들이 가지려는 것은 버리고 뭇사람들이 버리는 것을 취하며, 맛이 없는 것을 황홀한 지경이 되도록 음미하고, 지극히 오묘한 것을 모든 묘리 속에 겸하셨습니다. 가세는 몇 이랑이 못 되는데 심지(心志)는 구주(九州 : 중국 전체)를 망각하고, 몸은 속세에 살면서 마음은 하늘 밖에 두시니, 비록 검루(黔婁)의 고매(高邁)와 장자(莊子)의 생각 없음[不顧]도 더할 수 없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시호(諡號)를 ‘현거 선생(玄居先生)’이라 했다. 《고사전》

 

● 대중약(戴仲若 : 중약은 송(宋) 대옹(戴顒)의 자)은 동려(桐廬)가 궁벽하고 멀어 병을 요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오하(吳下)로 나와서 사는데, 오하의 선비들이 나서서 집을 짓되, 돌을 모으고 물을 끌어들이며, 나무를 심고 시내를 내어, 얼마 되지 않아 울창해지니 자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하씨어림》

 

● 저원거(褚元璩 : 원거는 남제(南齊) 저백옥(褚伯玉)의 자)는 젊어서부터 은거(隱居)하려는 지조가 있어 기호(嗜好)와 욕심이 없었다. 나이 18세 때 아버지가 며느리를 맞이하여 앞문으로 들어오자, 저원거가 뒷문으로 해서 나와, 드디어 섬거(剡居)의 폭포산(瀑布山)에서 살았는데,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므로, 당시 사람들이 왕중부(王仲部)에게 비했다. 《하씨어림》

 

● 유영예(劉靈豫)는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경릉왕(竟陵王 : 남제(南齊) 소자량(蕭子良))이 편지를 보내 뜻을 알리자, 유영예가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사철 누워서 앓는 몸으로, 세 때의 요기(療飢)를 하면, 산수(山水) 속에서 남은 정을 풀어가고, 고기와 새[魚鳥]에게 여생을 의탁하고 지내니, 어찌 요순(堯舜)과 같은 중한 은덕이자,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 같은 큰 혜택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모든 기미를 연구하여 현묘(玄妙)한 경지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수사(洙泗 : 공자를 뜻함)ㆍ직관(稷館)과 같은 구별이 없는데다, 마음을 집결하여 속루(俗累)를 벗지 못했기에 총간수하(冢間樹下 : 주(周) 문왕(文王)의 삼촌 태백(泰伯))와 같은 지조도 없는데, 멀리 은택(恩澤)이 이미 내리고 어진 범절을 먼저 펴시었습니다. 삼가 푸나무꾼이라는 혐의를 거두며, 조심스럽게 식와(軾䵷)한 의의를 찬미하렵니다.” 《하씨어림》

▶식와(軾䵷) : 전국시대 월(越) 나라 임금 구천(句踐)이 사기(士氣)를 높이기 위해, 성낸 개구리에게도 경례를 표한 고사.

 

● 고장유(顧長孺 : 장유는 남제(南齊) 고암(顧黯)의 자)는 은거하려는 지조가 있어 고경이(顧景怡)와 함께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고경이는 만년에 복식(服食)하고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는데, 아침마다 문을 나서면, 산새들이 그의 손바닥에 모여들어 먹이를 쪼아 먹었다. 《하씨어림》

 

● 종경미(宗敬微 : 경미는 남제 종측(宗測)의 자)는 일찍이 이렇게 한탄하였다.

“‘집이 가난한데 어버이가 늙으면 관직(官職)을 가리지 않고 벼슬한다.’는 말을 선철(先哲)들이 미담으로 여겼지만, 나는 미혹스럽게 여긴다. 땅 속에 있는 금(金)을 감동시키고 강 속의 잉어를 나오도록 할 수는 없지만, 천도(天道)를 응용하고 지리(地利)를 분간하면 되는 것, 어찌 남의 후한 녹(祿)을 먹으며 그의 중요한 일을 근심해야 하는가.” 《하씨어림》

 

● 예장왕(豫章王 : 남제(南齊)의 소외(蕭巍))이 종경미를 불러 참군(參軍)을 삼자, 종경미가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성격이 고기나 새와 같아, 산골짝에 있기를 좋아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연연하며, 사람들 다니는 길을 놓치기 일쑤고 바위의 계곡 쏘다니길 미친 사람처럼 하여, 도무지 늙는 줄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귀밑털이 이미 희어졌는데 어찌 덧없는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고기와 새들을 사모하게 되어야 합니까.” 《하씨어림》

 

● 어복후(魚復候)가 강주(江州) 원이 되어 종경미에게 후한 선사를 하자, 종경미가 이렇게 사양하였다.

“젊어서부터 광증(狂症)이 있어, 산을 찾아다니며 약초를 캐느라 멀리 여기까지 왔습니다. 배가 고프면 솔잎을 먹고, 옷이 없으면 벽라(薜蘿)로 옷을 해 입으면 담담하게 족했는데, 어찌 이런 당치 않은 것을 받겠습니까.” 《하씨어림》

 

● 손백예(孫伯翳)는 정열을 세속 밖에 쏟고, 뜻을 산골짝에 두었다. 왕영군(王令君)ㆍ범 장군(范將軍)과 교분이 좋아, 왕과 범이 양대(兩代) 조정에 정승으로 있으면서 벼슬을 시키려 하자, 손백예가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 백년이란 마치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것이어서, 정말 정신을 화평하게 하고 천성을 수양하면서 거문고와 술에 정을 붙여야 하는데, 어찌 기웃거리며 그처럼 역사에 끌려 다니겠는가. 이는 혜강(嵇康)도 견디지 못한 일인데, 나 역시 하지 못하겠노라.” 《하씨어림》

 

●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은 화양(華陽)에 숨어 살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고조(高祖)가 보러 갔다가 묻기를,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

하고 묻자, 도홍경이 대답하기를,

山中何所有 산중에 무엇이 있냐고요

嶺上多白雲 고개 위에 흰 구름 많지요

但可自怡悅 단지 혼자만 즐길 수 있고

不堪持贈君 임금님께 가져다 줄 순 없지요

하였고, 그 뒤에 무제(武帝)가 누차 초빙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사문유취》

 

● 명승소(明僧紹 : 자는 승렬(承烈). 남제 사람)는 누차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중 승원(僧遠)의 풍모(風貌)와 덕행을 듣고, 정림사(定林寺)로 찾아갔다. 그때 태조(太祖)가 절로 나와 만나려고 하니, 승원이 묻기를,

“만일 천자(天子)께서 오신다면, 거사(居士)께서는 어떻게 대하시렵니까?”

하자, 승소가,

“산중 사람으로서 마땅히 뒷담을 뚫고 도망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즉각 대공(戴公)의 고사(故事)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씨어림》

 

● 장영서(藏榮緖)가 관강지(關康之)와 경구(京口)에 은거하니, 당시에 ‘경구의 두 은자(隱者)’라 했다. 《하씨어림》

 

● 하자유(何子有 : 자유는 남제 하구(何求)의 자)는 청고(淸高)하고 겸퇴(謙退)하여 욕심이 없었다. 오(吳)의 피약사(被若寺)에서 살며 문밖을 나오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송 명제(宋明帝)가 도성(都城)으로 불러 영가 태수(永嘉太守)를 제수(除授)했다. 하자유가 그때 남간사(南澗寺)에 머물면서 조정에 나아가지 않으려고 교외(郊外)에서 조명(詔命) 받기를 청하여 윤허(允許)하자, 하룻밤 사이에 작은 배를 타고 호구산(虎口山)으로 도망하여 숨어버렸다. 《하씨어림》

 

● 유언도(劉彦度)는 젊어서부터 은거하려는 지조가 있었다. 형이 아내 될 사람을 맞이해 불일간에 혼사를 치르려 하자, 언도가 듣고 도망하여 숨었다가 일이 정지되어서야 돌아왔고, 본주(本州) 자사(刺史) 장직(張稷)이 불러 주부(主簿)를 삼자, 언도가 격문(檄文)을 나무에 걸어놓고 도망했다. 진류(陳留)의 완효서(阮孝緖)가 박학(博學)하여 숨어 살면서 세상과 접촉하지 않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찾아갔다가도 만난 일이 없었는데, 다짜고짜 한번 찾아가자 호서는 한번 보고 정신적인 친구가 되었고, 언도의 족형(族兄) 유사광(劉士光) 역시 고결한 지조로 처신하며, 세 사람이 낮이나 밤이나 서로 만나므로, 도성 사람들이 ‘삼은(三隱)’이라 했다. 《빈사전(貧士傳)》

 

● 송영애(宋令艾)는 젊어서부터 원대한 지조가 있고 침정(沈靖)하여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다. 주천(酒泉)의 남산(南山)에서 사는데, 수업(受業)하는 제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주군(州郡)에서 불러도 응하지 않자, 당시 태수(太守) 양선(楊宣)이 그의 화상을 누각(樓閣)에 그려놓고 드나들며 보면서 찬미하는 송(頌)을 지었는데,

“베개 삼는 건 어디 돌이고 이 닦는 건 어디 물인지. 그를 만날 수도 없고 이름을 찾을 수도 없도다.”

했다. 주천 태수(酒泉太守) 마급(馬岋)이 위의(威儀)를 갖추고 징과 북을 울리며 찾아가자, 송섬(宋纖)이 높은 다락을 이중으로 닫아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니, 마급이 한탄하기를,

“이름은 들을 수 있지만 몸은 만날 수 없고, 덕은 사모할 수 있지만 형체는 볼 수 없도다. 내 이제야 선생이 사람들 중의 용(龍)인 줄을 알겠도다.”

하였고, 절벽에다 시를 지어 새기기를,

丹崖百丈 붉은 절벽 수백 길이고

靑壁萬尋 파란 절벽 수만 길인데

奇木鬱鬱 기이한 나무 울창하여

蔚若鄧林 등림(鄧林)처럼 무성하도다

其人如玉 옥(玉)과 같은 그분

維國之琛 오직 국가의 보배인데

室邇人遐 가까이 살지만 만나지 못해

實勞我心 정말 내 마음 괴롭도다

하였다. 《준생팔전》

 

● 왕중엄(王仲淹)은 수(隋) 나라 때에 황하와 분수(汾水) 지역에서 교수(敎授)를 하는데, 양소(楊素)가 매우 중시하여 벼슬하기를 권하자, 왕통(王通)이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께서 남겨준 집이 있어 비바람을 가릴 수 있고 박전(薄田)은 끼니를 끓일 수 있으며, 글을 읽고 도를 담론하노라면 스스로 낙을 누릴 만합니다. 바라건대, 현명한 공께서 몸을 바로잡아 천하를 다스리되, 시절이 평화롭고 연사가 풍년들게 하신다면, 제가 혜택을 받음이 많게 될 것이므로,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빈사전》

 

● 주도퇴(朱桃椎)는 담박하여 세속과 인연을 끊고 갖옷을 걸치고서 새끼를 끌고 다녔다. 산중에다 집을 짓고 항시 신을 삼아 길 위에 놓아두면, 보는 사람들이, 이는 거사(居士)가 삼은 신이라 하며 쌀이나 차를 그곳에 놓아두고 바꾸어 갔다. 《빈사전》

 

● 공극(孔極)은 시랑(侍郞)으로 있을 때 조회(朝會)를 마치고 돌아가다 비를 만나 어떤 늙은이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데, 대청으로 맞아들이므로 들어가니 오모(烏帽)에 사건(紗巾) 차림을 한 늙은이가 매우 공손하게 맞았으며, 이어 술과 음식을 마련했는데 하나하나가 정결하고 좋았다. 공공(孔公)이 유의(油衣)를 빌리자고 하자, 늙은이가,

“추워도 나가지 않으며 더워도 나가지 않으며, 바람이 불어도 나가지 않고 비 와도 나가지 않으므로, 한 번도 유삼을 마련한 일이 없습니다.”

하므로, 공공이 자기도 모르게 벼슬살이 사정을 깜빡 잊게 되었다. 《태평광기(太平廣記)》

 

● 사마자미(司馬子微)는 반사정(潘師正)을 사사(師事)하며 벽곡(辟穀)하고 도인(導引)하는 방법을 배워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반사정이 특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내가 도은거(陶隱居)의 정일법(正一法)을 터득하여 4대(代)를 전해가게 되었다.”

하였다. 이어 하직하고 두루 명산(名山)을 섭렵하고 천태산(天台山)에 살며 나다니지 않았는데, 예종(睿宗)이 불러 방술을 묻자, 그는,

“도를 닦아 날마다 욕심을 덜되, 덜고 또 덜어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법입니다. 마음과 눈에 알게 되고 보게 되는 바를 번번이 덜어내어도 오히려 끝이 나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이단(異端)을 다루어 잡된 지혜와 생각을 증가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몸을 다스리기는 그러겠거니와, 나라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므로, 그가,

“나라도 몸 다스리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담담하게 놀리고, 기운을 대기(大氣)와 합치어, 만물과 자연스럽게 되고 사심이 없게 한다면 천하가 다스려지는 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감탄하기를,

“광성자(廣成子)의 말과 같도다.”

하였다. 《유후당서(劉昫唐書)》

 

● 전유암(田游巖)은 영휘(永徽 :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연간(年間)에 태학생(太學生)에 보임(補任)되었다가 파귀(罷歸)한 뒤에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하였는데, 그 어머니와 아내도 모두 방외(方外 : 세속(世俗)의 테두리 밖에서 노니는 것)의 뜻이 있었다. 뒤에 기산(箕山)으로 들어가서 허유(許由)의 무덤 옆에 살면서 허유동린(許由東隣)이라 자호(自號)하고, 여러 번 불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고종(高宗)이 친히 그를 방문(訪問)하니, 유암(游巖)은 야인(野人)의 복장으로 배알(拜謁)하는데 행동이 근엄(謹嚴)하였다. 황제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선생은 근래 편안합니까?”

하니, 유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은 이른바 천석고황(泉石膏肓)이고 연하고질(煙霞痼疾)인 자입니다.” 《구당서》

▶천석고황(泉石膏肓) 연하고질(煙霞痼疾) : 고황(膏肓)과 고질(痼疾)은 모두 낫기 힘든 어려운 병을 말하며 천석(泉石)과 연하(煙霞)는 자연 산수(山水)를 뜻하는 것으로 두 표현은 모두 산수(山水)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의미.

 

● 오정절(吳貞節 : 당(唐) 오균(吳筠)의 자)은 경의(經義)에 밝고, 성품이 고상하고 굳세어 시세(時勢)에 구합(苟合)하지 않고 숭산(崇山)으로 들어가 살았다. 현종(玄宗)이 사신을 보내어 그를 불러들여 도(道)를 물으니, 그는,

“도에 심오(深奧)한 것으로는 노자(老子)의 오천언(五千言 : 도덕경(道德經))만한 것이 없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종이만 낭비한 것일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현종이 다시 신선(神仙)의 야련법(冶鍊法)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는 야인(野人)의 일입니다. 오랜 세월이 걸려야 되는 것이니, 인주(人主)가 유의(留意)할 바가 아닙니다.” 《유후당서》

▶야련법(冶鍊法) : 도가(道家)에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단약(丹藥)을 만드는 법.

 

● 오균이 매양 개진(開陳)한 것은 모두 명교(名敎)와 세무(世務)이고 미언(微言)으로 천자(天子)를 풍간(諷諫)한 것이니, 천자도 그를 중히 여겼다. 균은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돌아가기를 간청하니, 천자는 조서(詔書)를 내려 도관(道觀)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역대진선체도통감(歷代眞仙體道通鑑)》

 

● 장지화(張志和 : 당(唐) 장귀령(張龜齡))는 학문(學問)이 넓고 문장과 그림에도 능하였으며 서 말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진기(眞氣)를 수양(守養)하였으므로 얼음 위에 누워도 춥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았으며, 천하의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는 낚시질하는 것으로 낙을 삼아 어부사(漁父詞)를 짓기를,

西塞山前白鷺飛 서새산 밑에 백로 나는데

桃花流水鱖魚肥 복숭아꽃 흐르는 물엔 쏘가리 살쪘네.

靑篛笠綠簑衣 푸른 삿갓에 도롱이 입었으니

斜風細雨不須歸 바람에 날리는 빗속에도 돌아갈 것 없네.

하였다. 《열선전(列仙傳)》

 

● 육노망(陸魯望 : 당(唐) 육구몽(陸龜蒙)의 자)은 젊어서부터 고상하고 호방(浩放)했다. 수백 묘(畝)의 전지(田地)와 큰 집이 있었으나, 저지대(低地帶)에 있는 전지라서 장마가 지면 전지에 있는 곡식 싹을 강물이 모두 쓸어갔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굶주렸으나 몸소 삼태기와 삽을 가지고 쉴 사이 없이 일을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의 부지런한 것을 빈정대자, 그는,

“요순(堯舜)도 때가 끼고 야위었으며, 우(禹)도 수족에 못이 박혔다. 저들은 성인이었는데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나는 한낱 평민으로서 감히 부지런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는 차[茶]를 즐겨 이저산(頤渚山) 밑에 다원(茶園)을 만들어 남에게 주어 대리 재배(代理栽培)하게 하고 해마다 조다(租茶 : 임대료로 받는 차)를 받아서는 등급을 매겼다. 또 세속과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집을 방문하는 사람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타지 않고 배를 타는데, 배 바닥에 거적자리를 깔고 책ㆍ차 항아리ㆍ붓ㆍ책상ㆍ낚시 도구를 싣고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다. 《유후당서》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