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3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1

從心所欲 2021. 8. 9. 17:26

소부(巢父)는 요(堯) 시절의 은자(隱者)인데, 산 속에 살며 세속의 이욕(利慾)을 도모하지 않았다. 늙자 나무 위에 집을 만들어 거기에서 자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부’라고 했다. 요(堯)가 천하(天下)를 허유(許由)에게 양여(讓與)하려 할 때, 허유가 소부에게 가서 그 말을 하자 소부가,

“자네는 어찌하여 자네의 형체를 숨기지 않고 자네의 빛깔을 감추지 않는가?”

하며,

그의 가슴을 밀쳐 버리므로 허유가 서글픔을 주체하지 못하여, 청랭(淸冷)한 물가를 지나다가 귀를 씻고 눈을 씻으며 말하기를,

“전일에 탐욕스러운 말을 들음으로써 나의 벗을 저버리게 되었도다.”

하고, 드디어 떠나 일생을 마치도록 서로 만나지 않았다. 《고사전(高士傳)》

 

● 허유는 사람됨이 의리를 지키고 행신이 발라, 부정한 자리에는 앉지도 않고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았다. 뒷날 패택(沛澤) 지방에 숨어 사는데, 요(堯)가 허유에게 천하를 양여하려 하자, 허유가,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 천하가 이미 다스려졌는데, 내가 오히려 당신을 대신한다면 내가 장차 명예를 바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명예란 것은 사실의 객체(客體)인 법인데, 내가 장차 객체가 되어야 합니까. 나는 천하가 소용이 없습니다. 포인(庖人)이 비록 주방(廚房) 일을 제대로 못하더라도 시축(尸祝)이 도마를 넘어가서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고서, 받아들이지 않고 도피하였다.

그리고선 허유가 중악(中岳)으로 가 영수(潁水)의 북쪽인 기산(箕山) 아래서 농사를 짓는데, 요가 또 구주(九州)의 장관으로 부르자, 허유가 듣고 싶지 않아 영수 가에서 귀를 씻었는데, 그때 그의 벗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 와 물을 먹이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허유가 대답하기를,

“요가 나를 불러 구주의 장관으로 삼으려 하는데,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귀를 씻는 것이네.”

하자, 소부가,

“자네가 만일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높은 절벽 깊은 골짜기에 산다면 누가 자네를 보게 되겠는가. 그것은 자네가 떠돌아다니며 명예를 구하려 했기 때문일세. 우리 송아지의 입이 더러워지겠네.”

하고서, 송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고사전(高士傳)》

▶포인(庖人)이……법입니다 : 《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말. 포인은 요리 맡은 관원, 시축(尸祝)은 종묘(宗廟) 제사의 축관(祝官). 곧 요의 천하를 그 누구도 대신하여 맡을 수 없다는 뜻이다.

 

● 상용(商容)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가 병으로 눕자 노자(老子)가,

“선생께서 교훈을 남겨 제자들에게 일러줄 것이 없으십니까?”

하였다. 상용이,

“차차 자네에게 말해 주겠는데, 고향을 지나다 수레에서 내리면 알게 되리라.”

하자, 노자가,

“고토(故土)를 잊어버리지 말 것을 이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상용이,

“높은 나무[喬木] 밑을 지나가 보면 알게 되리라.”

하자, 노자가,

“노인 공경할 것을 이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였으며, 상용이 입을 벌리며 말하기를,

“내 혀가 남아 있는가?”

하자, 노자가

“남아 있습니다.”

하고, 상용이,

“내 이가 남아 있는가?”

하자, 노자가,

“없습니다.”

하자, 상용이,

“알겠는가?”

하매, 노자가,

“강한 것은 없어지고, 약한 것은 남게 됨을 이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상용이,

“천하(天下) 일을 다 말했다.” 하였다. 《준생팔전(遵生八牋)》

 

● 노래자(老萊子)는 초(楚) 나라 사람이다. 당시 세상이 어지러우므로, 세상을 피해 몽산(蒙山) 남쪽에서 농사를 지었다. 부들과 갈대 울타리, 쑥대 집과 나뭇가지 평상, 기애(蓍艾) 방석에서 살되, 맹물에 콩밥을 먹고 지내며 산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었다. 사람들이 더러 초(楚)나라 임금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므로 그때 왕이 수레를 타고 노래자의 집에 갔는데, 노래자가 바야흐로 삼태기를 짜고 있었다.

왕이, “나라 지켜가는 정책을 내가 선생에게 의뢰하고 싶소.” 하자,

노래자가, “그리 하십시오” 하므로, 왕이 돌아갔다.

그의 아내가 산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돌아와 말하기를,

“당신이 승낙했습니까?”

하자 노래자가,

“그랬소.”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술과 고기로 먹일 수 있는 사람은 채찍으로 칠 수도 있고, 벼슬과 녹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월(鈇鉞 형벌 기구)로 처벌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에게 견제 받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고, 짜던 삼태기를 던져버리고 떠나자, 노래자가 또한 그 아내를 따라가 강남(江南)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고 말하기를,

“새와 짐승이 털을 짜서 옷을 해 입을 수 있고, 흘린 곡식알은 먹고살 만하다.”

했는데, 공자(孔子)가 일찍이 그런 말을 듣고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했다고 한다. 《고사전》

 

● 검루(黔婁) 선생은 제(齊) 나라 사람이다. 몸을 닦고 지조가 청렴하여 제후(諸侯)들에게 등용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노 공공(魯恭公)이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예를 다하고서, 곡식 3천 종(鍾)을 내려 정승을 삼으려 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제 나라 임금 또한 예를 차리고서 황금(黃金) 1백 근(斤)을 가지고 초빙하여 경(卿)을 삼으려 하였지만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글 네 편을 저술하여 도가(道家)의 일을 설명하되, 책 이름을 《검루자(黔婁子)》라 했으며, 종신토록 굴하지 않고 착하게 살다 죽었다. 《고사전》

▶종(鍾) : 용량(容量)의 단위. 1종은 60말인데, 중국의 1말은 0.2리터.

 

●피구공(披裘公)은 오(吳) 나라 사람이다. 연릉 계자(延陵季子 오 나라 왕자)가 나다니다 길에 금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피구공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저 금 가져가오.”

하므로, 공이 낫[鎌]을 던지며 눈을 부릅뜨고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당신의 처신은 높게 하면서 남의 처신은 낮게 봅니까? 내가 갖옷을 걸치고 나무는 졌지만, 어찌 흘린 금을 가져가겠습니까?”

하자, 계자가 크게 놀라 한참 말을 하다 그의 성명을 물으니, 그가,

“내 성명은 말해 줄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오월춘추(吳越春秋)》

 

● 영계기(榮啓期)는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사슴 가죽 갖옷에 새끼 띠를 띠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데, 공자가 태산(泰山)에서 노닐다가 보고서 묻기를,

“선생은 어찌 그리 즐거워하십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 낙이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낸 만물 중에 오직 사람이 귀중한데 내가 사람이 되었으니 첫째 낙이고, 남녀의 구별이 있어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기 때문에 남자를 귀중하게 여기는데 내가 이미 남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둘째 낙이고, 사람이 나서 해와 달을 보지도 못하거나 포대기[襁褓]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미 90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셋째 낙입니다. 빈한(貧寒)은 선비의 상사(常事)고 죽음이란 사람의 종말인 법인데, 상사 속에서 살며 종말을 기다리기가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고사전》

 

● 하궤(荷蕢)는 위(衛)나라 사람이다. 난세를 피하느라 벼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성명을 숨겼다. 공자가 위나라에 있으며 경쇠[磬]를 치게 되었을 때, 하궤가 공자가 머무르는 집 문 앞을 지나다,

“유심(有心)하도다. 경쇠 치는 소리여.”

하였고, 조금 있다가,

“변통성이 없도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둘 뿐이니, 물이 깊으면 옷을 입은 채 건너고 물이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는 법이다.”

하므로, 공자가 듣고서 말하기를,

“매정하도다. 그렇게만 한다면 세상에 어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고사전》

 

●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나란히 밭을 매고 있었다. 공자가 지나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묻자, 장저가 말하기를,

“고삐를 잡고 수레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므로, 자로가,

“공자님이십니다.”

하니, 장저가,

“노(魯) 나라 공구(孔丘)라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 나루터를 알고 있을 것이오.”

하였고, 걸닉에게 묻자,

“당신은 누구요?”

“중유(仲由)라는 사람입니다.”

“노나라 공구의 무리입니까?”

“그렇소.”

하니, 걸닉이,

“온 천하가 이처럼 못쓰게 되어 가는데, 누구와 고치게 되겠소. 또한 사람을 피하는 인사(人士 공자를 말함)를 따르는 것이 어찌 세상을 피하는 인사(걸닉 자신)를 따르는 것만 하겠소.”

하고서, 멈추지 않고 밭만 갈므로 자로가 가서 공자에게 말하니, 공자가 서글퍼하며 말하기를,

“새나 짐승과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무리인데 누구와 함께 살겠는가. 천하에 도(道)가 있는 때라면, 내가 고치려고 간여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고사전》

 

● 하조 장인(荷蓧丈人)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자로(子路)가 공자를 따르다가 뒤떨어졌을 때 그를 보고,

“당신 우리 선생님 보았소?”

하자, 장인이,

“사지(四肢)를 부려먹지도 않고 오곡(五穀)을 분간하지도 못하는데, 누가 선생인가.”

하고서, 지팡이를 세워놓고 김만 매므로, 자로가 공수(拱手)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자로를 만류하여 재워주고 또 대접도 했으며,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그 이튿날 자로가 가서 공자에게 말하자,

“은자(隱者)이다”

하며, 자로로 하여금 다시 가 보게 하였는데, 가보니 이미 떠나 버리고 없었다. 《고사전》

 

● 육통(陸通)은 자가 접여(接輿)인데, 초(楚) 나라 사람이다. 천성(天性)이 수양하기 좋아하고, 몸소 농사를 지어 먹고 지냈다. 초 소왕(楚昭王) 때에 육통이 초나라 정사가 무상한 것을 보고는, 거짓 미친 체하며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초광(楚狂)이라 했다.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초광(楚狂) 접여(接輿)가 그 문 앞에서 노닐며,

“봉(鳳) 같은 사람이여 봉 같은 사람이여, 어찌 그리 덕이 쇠퇴하였느뇨. 앞으로의 세상을 기대할 것도 없고, 지난 세상을 추구(追求)할 것도 없지.”

하므로,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말을 붙이려 하자, 종종걸음으로 피해 버려 말을 걸지 못했었다.

초왕(楚王)은 육통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 금(金) 1백 일(鎰)과 거마(車馬) 두 대를 가지고 가 초빙해오도록 했는데, 육통이 웃기만 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사자가 떠나자 아내가 저자에서 돌아와,

“선생께서 젊어서는 의리 있는 일을 하다가 늙어서는 어찌하여 어깁니까? 문밖에 수레 자취가 어찌 그리 깊게 났습니까? 첩(妾)은 듣건대, 의사(義士)는 예(禮)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선생을 섬기며, 몸소 농사지어 살 만하고 친히 길쌈해서 옷을 지어 입을 만하여, 배부르게 먹고 옷이 따뜻하므로 우리의 낙이 스스로 족했으니, 떠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지아비는 솥과 시루를 지고 아내는 이부자리와 그릇을 이고서, 성명을 바꾸고 여러 명산(名山)에서 노닐었다. 《고사전》

 

● 상산 사호(商山四皓)는 하내(河內)의 지(軹) 지방 사람들인데, 더러는 급(汲) 지방에서 살기도 하였다. 하나는 동원공(東園公), 하나는 녹리 선생(甪里先生), 하나는 기리계(綺里季), 하나는 하 황공(夏黃公)인데, 모두 도를 닦아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고, 의리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진시황(秦始皇) 때에 진 나라 정사가 포악한 것을 보고 남전산(藍田山)으로 피해 들어가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아득한 높은 산 꾸불꾸불 깊은 골짝의 윤기 나는 자지(紫芝)는 주림을 풀 수 있도다. 요순(堯舜)의 세상 멀리 갔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할지. 일산 높은 좋은 수레 타는 사람은 근심 매우 큰 법이라, 부귀해도 남 두려워함은 빈천해도 마음대로 함만 못하지.”

하고서, 함께 상락(商雒)으로 들어가 지폐산(地肺山)에 숨어 살며 천하가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진 나라가 패망하자, 한고조(漢高祖)가 듣고서 불렀으나 가지 않고 깊이 종남산(終南山)에 숨어버려, 굴종(屈從)시키지 못하였다. 《고사전》

 

● 동방만천(東方曼倩 : 만천은 동방삭(東方朔)의 자)은 한무제(漢武帝) 때에 낭관(郞官)이 되었는데, 임의대로 하고 구속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미치광이라 하자, 동방삭이 말하기를,

“나는 이른바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어찌 옛사람처럼 깊은 산 속에서만 세상을 피하겠는가.”

하였고, 때로는 좌석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땅을 짚고 노래하기를,

“세속에 육침(陸沈 : 현명한 사람이 속세에 숨는 것)하며 이 세상을 피하노라. 금마문(金馬門)안 궁궐 속에서도 세상 피하고 몸 보존할 수 있는데, 어찌 꼭 깊은 산 속 쑥대집 밑이어야 하리.”

하였다. 《열선전(列仙傳)》

 

● 정자진(鄭子眞 : 자진은 한(漢) 정박(鄭樸)의 자)은 도를 닦아 고요하게 지내고 말이 없으므로, 세상이 그의 고결함에 감복했었다. 성제(成帝) 때에 원구(元舅 : 임금의 외삼촌)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를 갖추어 초빙했으나 끝내 굴종(屈從)하지 않으므로, 양웅(揚雄)이 그의 덕을 칭찬하기를,

“곡구(谷口) 정자진은 산중에서 밭을 갈지만 명성이 서울에 떨치도다.”

하였고, 풍익(馮翊) 지방 사람들은 비석을 세우고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제사한다.

엄군평(嚴君平 : 군평은 한(漢) 엄준(嚴遵)의 자)은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다. 항시 성도(成都) 저자에서 점[卜]을 쳐 주고 날마다 1백 전(錢)씩을 벌어 자급(自給)해 가되, 점치는 일이 끝나면 가게 문을 닫고 발을 내리고서 저서(著書)를 일삼았다. 양웅(揚雄)이 젊을 때부터 상종하며 자주 그의 덕을 칭찬했다. 이강(李强)이 익주 목사(益州牧使)가 되어 기뻐하기를,

“엄군평을 나의 종사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하자, 양웅이,

“그대가 예를 갖추어 만나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을 굴종(屈從)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왕봉(王鳳)이 사귀기를 청했지만 승낙하지 않았다. 촉(蜀) 지방의 부자 나충(羅沖)이라는 사람이 엄군평에게 묻기를,

“당신은 어찌하여 벼슬하지 않습니까?”

하니, 군평이,

“자진해서 나갈 수는 없습니다.”

하므로, 나충이 군평을 위해 거마(車馬)와 의복ㆍ양식을 마련하자, 군평이,

“내가 병이 났을 뿐이고,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유여(有餘)하지만 당신은 부족한데, 어찌하여 부족한 당신이 유여한 나를 위해야 합니까?”

하였다. 나충이,

“나는 만금(萬金)을 가졌고 당신은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당신이 유여하다는 것은 또한 틀린 말이 아닙니까?”

하니, 군평이,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전일 당신의 집에서 잘 적에 인정(人定) 뒤에도 일이 끝나지 않아 낮이나 밤이나 바빴고 족한 때라곤 없었습니다. 지금 나는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 평상에서 내려갈 것도 없이 돈이 저절로 오게 되고, 오히려 수백 금(金)이 남아돌아 먼지가 한 치 두께나 쌓였으되 어디에 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나는 유여하고 당신은 부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므로, 나충이 크게 부끄러워했는데, 군평이 한탄하기를,

“나에게 재물을 보태 주는 사람은 내 정신을 손상시키고, 나를 이름나게 해 주는 사람은 내 몸을 죽이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는 것이오.”

하니, 당시 사람들이 탄복했다. 《고사전》

 

● 장원경(蔣元卿 : 원경은 한(漢) 장허(蔣詡)의 자)은 집안에 삼경(三徑 : 솔ㆍ대ㆍ국화를 뜻함)만 있었다.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이 종유(從遊 : 학식(學識)이나 덕행(德行)이 높은 사람을 좇아 같이 놂)하였는데, 양중이나 구중은 모두 염치를 바로잡고 명성을 피하는 선비들이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정차도(鄭次都)는 관직을 버리고 의피(蟻陂) 남쪽에 숨어 살았는데, 같은 고을의 등경(鄧敬)과 함께 마름 잎을 따서 자리를 만들고 연잎에다 안주를 차려놓고서, 바가지에 술을 그득 부어 놓고는 담소로 날을 보냈고, 쑥대집 나뭇가지로 가린 창에서 혼자 거문고를 타고 독서를 즐겼다. 《하씨어림》

 

● 왕군공(王君公)은 난세를 만났지만 떠나지 않고, 쇠전에서 거간을 하며 숨어 지내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을 피하는 장동(墻東)의 왕군공이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왕중자(王仲子 : 중자는 후한(後漢) 왕량(王良)의 자)는 대사도 사직(大司徒司直)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있었는데, 뒤에 형양(滎陽) 원으로 부르자 병이 심하여 임지(任地)로 곧장 갈 수가 없어 그의 벗의 집을 들렀더니, 그 벗이 만나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충직(忠直)한 말도 기묘한 계책도 없으면서 높은 자리만 차지하여, 어찌 그리 잠자코 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느라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가?”

하였다. 《사문유취(事文類聚)》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 지본담채, 국립민속박물관]

 

● 양백란(梁伯鸞 : 백란은 양홍(梁鴻)의 자)은 난세를 만나, 상림원(上林苑) 속에서 돼지를 먹이다가, 한번은 잘못하여 불을 내어 이웃집까지 연소되었다. 양홍(梁鴻)이 집이 불탄 사람을 찾아가 손실을 묻고 모두 돼지로 변상했는데, 그래도 그 주인이 적게 여기자, 양홍이 몸소 그 집 머슴이 되어 게으름 없이 일을 했다. 이웃집 늙은이들이 양홍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서, 모두들 그 주인을 책망하고 양홍을 장자(長者)답다 칭찬하자, 주인이 그제야 비로소 놀라 돼지를 모두 돌려주려 했으나, 양홍이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세력 있는 가문에서 그의 높은 지조를 사모하여 사위를 삼으려는 사람이 많았으나, 양홍이 모두 거절하고 장가들지 않았다. 같은 고을 사람 맹씨(孟氏)가 얼굴이 추한 딸을 두었는데, 배필 될 사람을 가려놓아도 시집가지 않으려고 하므로 부모들이 까닭을 묻자, 딸이,

“양백란처럼 현명한 사람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하였다. 양홍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집갈 때에 혼수(婚需)를 잘 갖추어 양홍 가문에 들어갔다. 이레가 되도록 양홍이 대꾸를 하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청하니, 양홍이,

“나는 너절한 옷을 입은, 깊은 산중에 숨어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바란 것인데, 지금 비단옷을 입고 화장을 하였으니, 어찌 양홍이 원하던 바이겠는가?”

하니, 아내가,

“당신[夫子]의 뜻을 보려 한 것이고, 첩(妾)이 원래 숨어서 살 옷이 있습니다.”

하고서, 곧 머리를 네 개의 퇴계(椎髻)로 고치고 베옷을 입고 일을 할 수 있는 차림으로 나오니 양홍이 크게 기뻐하여,

“이는 참으로 양홍의 아내이다. 능히 나를 받들겠도다.”

하고, 이름을 덕요(德曜)라 하였다.

얼마 있다 함께 패릉(覇陵)의 산중으로 들어가, 밭 갈고 길쌈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고, 시서(詩書)를 읊조리고 거문고 타기를 낙으로 여겼으며, 전대의 고사(高士)들을 사모하여, 상산 사호(商山四皓) 이래의 24인을 위해 송(頌)을 지었다. 이어 동으로 관(關)을 나서서 경사(京師)를 지나다가 다섯 가지 슬픔[五噫]이란 노래를 지었는데, 숙종(肅宗)이 양홍을 찾다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성을 운기(運期), 이름을 요(燿), 자를 후광(候光)이라 고치고, 아내와 함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어름에서 살았다. 얼마 있다 또 그곳을 떠나 오(吳) 나라로 가 고백통(皐伯通)의 처마 밑에서 거처하며 남의 삯방아를 찧으며 사는데,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가 식사를 준비했다가 상을 눈썹 높이로 받들고 들어왔다. 고백통이 살펴보고 특이하게 여겨 집에서 살도록 했다. 양홍이 조용히 문 닫고 10여 편의 저서(著書)를 했는데, 병도 나고 지치기도 하자, 주인에게,

“옛적에 연릉 계자(延陵季子)도 영박(嬴博) 지역에 장사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우리 자식들이 운상(運喪)하여 돌아가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죽자, 고백통 등이 그를 위해 오나라의 요리(要離 : 춘추 시대 오(吳)의 자객(刺客))의 무덤 곁에 장지를 구해 장사하였다. 《후한서(後漢書》

 

● 장중울(張仲蔚)은 같은 고을의 위경경(魏卿景)과 함께 도덕을 닦았으며,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평소 곤궁하고 쓸쓸하게 지내, 사는 곳이 쑥대로 통로를 덮었는데, 문 닫고 앉아 천성만 수양하고 영화로운 명성을 가꾸지 않으므로, 당시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한백휴(韓白休)는 항시 명산(名山)에 나다니며 약초를 캐다 장안(長安)의 저자에서 팔되, 에누리하지 않은 지 30여 년이었다. 이때 어떤 여인이 한강(韓康)에게서 약초를 사며, 한강이 값을 고수하자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뭐 한백휴나 되시오? 약초 값을 에누리하지 않으려 하게.”

하므로, 한강이 한탄하기를,

“내가 명성을 피하려 하는데, 지금 구구(區區)한 여인들이 모두 내가 있는 것을 아니, 어찌 약초 파는 일을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패릉(覇陵)의 산중으로 숨어 들어갔다. 《후한서》

 

● 상자평(向子平 : 자평은 후한(後漢) 상장(向長)의 자)은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성격이 중화(中和)를 숭상하여, 《노자(老子)》와 《역경(易經)》의 이치 알기를 좋아했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므로, 일 좋아하는 사람들[好事者]이 음식을 선사하면 먹을 만큼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왕망(王莽)의 대사공(大司公) 왕읍(王邑)이 만나보고서 해마다 찾아와 왕망에게 천거하려 하였지만 굳이 사양하므로 그만두었다. 가만히 집에 숨어《역경》을 읽다가, 손괘(損卦)와 익괘(益卦)에 이르러서는 아아, 하며 한탄하기를,

“내가 이미 부(富)가 가난만 못하고 귀(貴)가 미천함만 못한 것은 알았지만, 죽었다가 어떻게 하면 생겨나는 것은 알지 못하겠다.”

했다.

건무(建武) 무렵에 자녀들의 혼인을 마치고서는 집안일과는 인연을 끊고, 마땅히 내가 죽어버린 것처럼 나와 상관없이 하라 하고서야 드디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서로 좋게 지내는 북해(北海)의 금경(禽慶)과 함께 오악(五嶽)의 명산에 노닐었는데, 끝내 죽은 곳을 알지 못했다. 《후한서》

 

● 대효위(臺孝威 : 이름은 동(佟). 후한 때 사람)는 벼슬하지 않고, 무안(武安)의 산중에 숨어 굴을 파고 살며 약초를 캐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건업(建業) 초기에 중주(中州)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위군 자사(魏郡刺史)가 대추와 밤을 예물로 하여 대동(臺佟)을 만나보고 한참 이야기하다가 자사가,

“대효위의 생활이 이처럼 매우 고통스러우니, 어떤가?”

하자, 대동이,

“나는 다행하게도 끝까지 천성(天性)을 보존하여 정신을 존양(存養)하고 화기(和氣)를 양성하며, 세상일을 경영하여 정신이 피로하게 만들지 않았고 욕심 부리려는 뜻을 제거하여 담담(淡淡)하게 자득(自得)하니,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도리어 현명한 사군(使君)이야말로 백성을 돌보아 주고 다스리느라 밤에도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걱정이실 테니, 도리어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하고서, 드디어 떠나 숨어버리고 종신토록 나타나지 않았다. 《고사전》

 

● 서유자(徐孺子 : 유자는 후한(後漢) 서치(徐穉)의 자)는 젊어서부터 경술(經術)과 행신으로 이름이 남쪽 지방에 높았다. 환제(桓帝) 때 여남(汝南)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었을 적에 빈객(賓客)을 접대하지 않았는데, 오직 서유자가 오면 특별히 의자[榻] 하나를 마련했다가 떠나면 매달았다. 다섯 차례나 효렴현량(孝廉賢良 :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으로 추천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태위(太尉) 황경(黃瓊)의 부름을 받았는데, 황경이 죽자 서유자가 도보로 장례에 나가 닭고기와 술을 차려놓고 울다가 떠났다. 이때 모였던 사람 곽임종(郭林宗) 등이 듣고서 서유자가 아닌가 하여, 말 잘하는 선비 모용(茅容)을 뽑아 뒤쫓게 했는데, 도중에서 만나 모용이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용히 농사짓는 일을 말하고, 떠날 때에 모용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곽임종에게 ‘큰 나무가 장차 넘어지려 할 때엔 새끼 하나로 잡아맬 수 없는 법인데, 어찌하여 기웃거리느라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치사하여 주오.” 《고사전》

 

● 곽임종(郭林宗)은 젊어서부터 부모를 잘 섬겨 효자로 알려졌다. 집이 가난하므로 군현(郡縣)에서 관원을 삼으려 하자, 한탄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집편(執鞭 : 마부, 곧 낮은 벼슬을 뜻한다)하며 하찮은 녹을 받겠는가.”

하고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같은 고을의 종중(宗仲)과 함께 서울[京師]로 가서 굴백언(屈伯彦)에게《춘추(春秋)》를 배웠고, 박람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관상을 잘 보아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진(陳)ㆍ양(梁) 지역에 유명했다. 도보로 어디를 가다가 비를 만나, 건(巾)이 한 귀가 접히게 되었는데, 뭇사람들이 사모하여 모두들 억지로 건의 귀를 접었다. 선비들이 서로 다투어 따라 관상 본 쪽지가 수레에 그득했는데, 곽태(郭泰)가 알고 지낸 무명 인사들 중 60여 명은 모두 뒤에 그의 말이 증험되었다. 어머니 상사를 만나 돌아오자, 서치(徐穉)가 조문하러 와서 생추(生芻 : 미미한 예물, 곧 부의) 한 묶음을 곽태의 여막 앞에 놓고 가므로, 곽태가,

“이는 반드시 남주(南州)의 서유자(徐孺子)일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는가. ‘생추 한 묶음인데, 그 사람은 옥(玉) 같다.’고. 내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하였다. 《후한서》

 

●원하보(袁夏甫 : 하보는 후한 원굉(袁閎)의 자)는 뜰 가운데 토실(土室)을 쌓고서 문을 닫고 앉아 손님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토실 안에서 어머니를 향해 배례(拜禮)하였고, 비록 아들이 가도 역시 만나주지 않으므로, 아들 역시 문을 향해 배례하고 돌아갔다. 머리에는 건(巾)도 쓰지 않고, 몸에는 홑옷마저 걸치지 않았으며, 발에는 나무 신을 신었고, 어머니가 죽어서도 상복이나 영위를 마련하지 않았다. 공거(公車)가 두 차례를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범방(范滂)이 이렇게 칭찬하였다.

“숨어서도 어버이를 버리지 않았고, 지조 지키면서도 세속을 끊지 않았으니, 지극한 현자(賢者)라 하겠도다.” 《고사전》

 

● 신도반(申屠蟠)은 젊어서부터 명성과 지조가 있었다. 부모가 죽자 몸이 쇠약하도록 슬퍼하며 사모했고, 10여 년을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았으며, 드디어 숨어 살면서 누차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앞서 범방(范滂) 등이 조정 정책을 비난하매, 공경(公卿)들 이하가 모두 태도를 바꾸어 자신을 낮추었고, 태학생(太學生)들이 서로 그들의 기풍(氣風)을 사모하면서, 문학(文學)이 장차 일어나고 처사(處士)들이 다시 쓰이게 되겠다고 여겼는데, 신도반은 홀로 한탄하기를,

“옛날 전국(戰國)시대에 처사들이 마구 논란하므로, 열국(列國)의 임금들이 비를 들고 앞을 쓸어 공경을 보이기까지 했으나, 마침내 분서(焚書)하고 갱유(坑儒 :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임)하는 화가 있었으니, 지금을 말한 것이겠다.”

하고, 드디어 양갈(梁碣) 지역에 자취를 숨기고서, 나무를 의지해 집을 짓고 살며 스스로 품팔이하는 사람과 같이 했다. 그런지 두 해 만에 과연 당고(黨錮)의 화가 있어 형벌로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었는데, 신도번은 끄떡없이 의론(疑論)을 면했다.

▶당고(黨錮)의 화 : 후한 말엽에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전담함을 분개하여 공격하던 지사(志士)들이, 환관들의 간계(奸計)로 종신토록 금고의 형을 받게 된 일

 

● 관유안(管幼安 : 유안은 삼국 시대 위(魏) 관영(管寧)의 자)은 젊었을 때 화흠(華歆)과 한방에서 글을 읽는데, 문밖에 수레를 탄 대부(大夫)가 지나가자 화흠이 책을 던지고 뛰어나가 구경하므로, 관영(管寧)이 수치스럽게 여겨 떨어져 앉으며,

“자네는 나의 벗이 아니다.”

했고, 또 한번은 화흠과 함께 남새밭을 매다가 금(金)이 나왔는데, 관영은 호미질만 하고 돌아보지 않았으나, 화흠은 가져다 던져 두었다. 한(漢) 나라 말기에서 위(魏) 나라 무렵까지 20년 동안을 요동(遼東)에서 살며, 세상을 등지고 호기(浩氣)를 수양했는데, 위 명제(魏明帝)가 타기 편한 수레에 폐백(幣帛)과 구슬로 초빙했지만, 관영이 받지 않았다. 집이 가난한데도 학문을 좋아하여, 명아주 걸상 하나를 50년이나 쓰므로 무릎 닿는 데가 모두 뚫어졌다. 《고사전》

 

● 방공(龐公 : 후한 방덕공(龐德公)을 말함)은 현산(峴山) 남쪽에 살며 성부(城府)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했다.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초청하였다가 자기를 따르게 할 수 없으므로, 몸소 찾아가 문안하고 말하기를,

“한 몸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천하를 보존함만 하겠소.”

하니, 방공이,

“홍곡(鴻鵠)은 높은 숲 위에 집을 지어, 날이 저물면 깃들 곳으로 삼고, 원타(黿鼉 : 자라와 악어)는 깊은 못 속에 굴을 파 저녁이면 잘 곳으로 삼습니다. 진퇴(進退)와 행지(行止) 역시 사람으로 보면 소혈(巢穴)과 같은 법이어서, 사람들도 깃들 데와 잘 데를 가져야 할 뿐이요, 천하는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 언덕 위에서 일손을 놓고 있는데, 그 아내가 앞에서 밭을 매고 있었다. 유표가 가리키며 묻기를,

“선생께서 만일 고생스럽게 농사만 짓고 벼슬하여 녹 받으려 하지 않다가, 뒷날 무엇을 자손들에게 남겨 주렵니까?”

하자, 방공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한 것을 남겨 주지만 지금 나는 홀로 안전한 것을 남겨 줄 것이니, 비록 남겨 주는 것이 같지는 않아도 남겨 줄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유표가 탄식하고 갔다. 그 뒤 드디어 그 아내를 이끌고 녹문산(鹿門山)에 올라가 약초를 캐며 돌아오지 않았다. 《고사전》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