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5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3

從心所欲 2021. 8. 11. 18:14

● 진도남(陳圖南 : 도남은 송(宋) 진박(陳搏)의 자)은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서 20년 동안이나 벽곡(辟穀) 연기(鍊氣)하고, 뒤에는 화산(華山) 운대관(雲臺觀)에 살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때 진박이 두 번 입조(入朝)하였는데, 제(帝)가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때 다시 와서 제를 알현하니 제가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진박은 독선기신(獨善其身)하고 세리(勢利)를 구하지 않으니, 이른바 방외지사(方外之士)이다.”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를 중서성(中書省)까지 전송하였다. 재상(宰相) 송기(宋琪) 등이 조용한 여가에 묻기를,

“선생은 현묵(玄黙 : 노자의 도) 수양(修養)의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하니, 진박이,

“나는 산야(山野)의 사람이니 당시에 쓰일 곳이 없고, 역시 신선 황백(黃白)의 기술과 토납(吐納) 양생(養生)의 이치를 알지 못하니, 전해줄 만한 방술(方術)이 없습니다. 가령 백주(白晝)에 하늘에 날아오른다 한들 세상을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는 용안(龍顔)이 준수(俊秀)하여 천인(天人)의 의표(儀表)가 있으시고, 고금(古今)에 널리 통달하고 치란(治亂)의 전철(前轍)을 깊이 연구하시는 참으로 도가 있는 인성(仁聖)한 임금이시므로, 이때야말로 군신이 모두 협심(協心) 동덕(同德)하여 교화를 일으키고 다스림을 이룩할 시기이니, 수련(修鍊)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송기 등이 그의 말을 제(帝)에게 고하니 제는 그를 더욱 중히 여겨 조서를 내려 희이 선생(希夷先生)이란 호를 하사하고 화산(華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전습유(仙傳拾遺)》

▶황백(黃白)의 기술 : 신선이 단사(丹砂)를 단련(鍛鍊)하여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을 만드는 방술(方術).
▶토납(吐納) : 입으로 악탁(惡濁)한 기운을 토해 내고 코로 청신(淸新)한 기운을 마시는 도가(道家)의 수련(修鍊) 방술.

 

● 순화(淳化 :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연간에 조서를 내려 충명일(种明逸 : 명일은 충방(种放)의 자)을 부르니, 그 어미가 노하여 말하기를,

“항상 너에게 학도를 모아 놓고 가르치지 말라고 권하였더니, 과연 남들의 아는바 되어 편히 살 수 없게 되었다. 몸이 이미 은거하였는데, 학문이 무슨 소용이냐! 나는 장차 너를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겠다.”

고 하므로 충방(种放)이 병을 칭탁(稱託)하고 태종(太宗)의 소명(召命)을 받지 않았다. 충방의 어머니는 드디어 붓과 벼루 등을 태워버리고 충방과 함께 인적(人跡)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이사하였다.

진종(眞宗)이 동봉(東封 : 동쪽으로 나아가 여러 선제(先帝)의 능을 참배하는 것)할 때에 은사(隱士) 양박(楊璞)을 만나 상이 묻기를,

“경(卿)이 떠나올 때에 시를 지어 전송(餞送)한 사람이 있었느냐?”

하니, 양박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의 첩(妾)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신을 전송하기를,

且休落魄耽酒杯 실의(失意)하여 술을 탐하지 말고

更莫猖狂愛作詩 지나치게 시 짓기 즐기지 마시오.

今日捉將官裏去 오늘날 관청에 잡혀갔다가

這回斷送老頭皮 늙은 목 잘리어 돌아오리라

하였습니다.”

이 시를 본 상은 웃고서, 곧 양박에게 비단을 하사하고 산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충방의 어머니와 양박의 처는 아들과 남편의 은거를 잘 도왔다고 이를 만하다. 충방은 끝내 만절(晩節)이 좋지 못하여 그 명예를 상실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그 어머니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금뢰자(金罍子)》

▶만절(晩節) : 늙은 시절. 충방은 진종 5년에 관직에 나아가 벼슬했으며 만년에는 권력으로 땅을 많이 사들이는 물욕을 보였다.

 

● 위야(魏野 : 호는 초당거사(草堂居士).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는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고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有名閉富貴 명예가 있으면 부귀에 가리고

無事小神仙 일이 없으니 신선에 가깝네.

洗硯魚呑墨 벼루 씻으니 고기가 먹물 마시고

烹茶鶴避煙 차 끓이니 학이 연기 피해 가네.

진종(眞宗)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사자에게 대답하기를,

“구중(九重)의 단조(丹詔 : 조서)와 휴교(休敎 : 교서(敎書))를 채봉(彩鳳 : 아름다운 봉황. 사신을 말한다)이 물고 왔으나, 일편야심(一片野心 : 야인(野人)의 한 조각 마음)은 이미 백운(白雲)의 만류(挽留)하는 바 되었습니다.”

하였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송(宋) 나라의 관사복(管師復)은 대대로 용천(龍泉)에 살면서 호원(胡瑗)과 종유(從遊)하고 와운 선생(臥雲先生)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인종(仁宗)이 사복을 불러보고 묻기를,

“경(卿)의 소득(所得)은 어떤 것인가?”

하니, 사복이 대답하기를,

“촌락에 가득한 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滿塢白雲耕不盡] 맑은 물에 잠긴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는[一潭明月釣無痕] 것이 신의 소득입니다.”

하고, 끝내 작명(爵命)을 받지 않았다. 《문기유림》

 

● 진종(眞宗) 때 상이 처음으로 위야(魏野)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르니, 위야는 친구의 집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놓고 도망갔다.

達人輕祿位 달인은 녹위를 가벼이 여기고

居處傍林泉 임천을 이웃하여 살아간다네.

洗硯魚呑墨 벼루 씻으니 고기가 먹물 마시고

烹茶鶴避煙 차 끓이니 학이 연기 피해 가네.

閑惟歌聖代 한가로이 성대를 노래하며

老不恨流年 늙은 몸 세월 가는 것 한하지 않네.

靜想閑來者 한가히 사는 사람 생각해 보니

還應我最偏 도리어 내가 가장 편하네.

사신이 돌아와서 이 시를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야(野)는 오지 않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당상이 충방(种放)이 사는 곳을 그리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위야가 사는 곳의 경치가 그윽하다는 것을 듣고는 또 그것을 그리게 하였다.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易暗馴麀性 은자의 본성(本性) 어두워지기 쉽고

難辨鬪鷄情 세상의 시비는 분별하기 어렵네.

妻喜栽花活 아내는 심은 꽃 피는 것 즐기고

兒誇鬪草嬴 아이는 풀 무성한 것 자랑한다네.

이 시는 한적(閒適)한 취미를 극진히 하였다고 하겠다. 《패해(稗海)》

 

● 임포(林逋)는 항주(杭州) 고산(孤山)에 숨어 살면서 항상 두 마리의 학(鶴)을 길렀다. 그 학을 둥우리에서 내놓으면 하늘 높이 날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 한동안 빙 돌다가 내려와서는 다시 둥우리로 들어갔다. 임포는 항상 서호(西湖)에서 작은 배를 타고 여러 절[寺]을 돌아다녔다. 포의 집을 방문하는 손님이 있으면 동자(童子)가 손님을 맞이하여 앉히고는 학의 둥우리를 열고 학을 날려 보냈는데, 조금 있으면 반드시 임포가 작은 배를 저으며 돌아왔다. 이는 대개 학이 나는 것으로 항상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문유취(事文類聚)》

 

● 곽연경(郭延卿)은 서경(西京) 사람인데, 젊어서부터 문정공(文定公) 장제현(張齊賢), 문목공(文穆公) 여몽정(呂蒙正)과 함께 문학(文學)과 행검(行檢)으로 향려(鄕閭)에 칭찬이 있었다. 장제현과 여몽정이 정승이 되어 번갈아 연경을 천거(薦擧)하였으나, 연경은 나아가지 않고 그윽한 곳에 정자(亭子)를 짓고 화초(花草)를 심으면서 스스로를 즐기고 발자취가 성시(城市)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의 나이 80여 세 때 문희공(文僖公) 전유연(錢惟演)이 서경 유수(西京留守)가 되었는데, 통판(通判) 사강(謝絳), 장서기(掌書記) 윤수(尹洙), 추관(推官) 구양수(歐陽修)가 모두 당시의 문인(聞人 : 명사(名士))이었다. 하루는 전유연이 요속(僚屬)을 거느리고 성(城)을 나와 곽연경이 살고 있는 1리(里)쯤 떨어진 곳에서 놀이를 하였는데, 전유연은 기종(騎從)을 떼어 놓고 몇몇 시종만을 거느리고서 연경을 방문하여 성명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연경은 흔연히 영접하여 도복(道服)을 입고 담소(談笑)하였다.

연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누거(陋居 :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겸손하게 부르는 말)를 방문(訪問)하는 이가 드물기는 하지만, 평소 방문한 사람 중에는 여러분같이 점잖은 손님이 없었으니, 노부(老夫)는 매우 기쁩니다. 잠시 머물면서 꽃 밑에서 한잔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하고, 질그릇 술잔과 과일과 채소를 내왔다. 전유연은 그 야일(野逸 : 벼슬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살며 속세를 떠난 높은 기개(氣槪))함을 좋게 여겨 만인(滿引 : 술잔을 가득 채움)을 사양하지 않았다. 얼마 뒤 관리가 유연의 앞으로 나와 읍(揖)하고 아뢰기를,

“신패 부사(申牌府史)와 아병(牙兵)들이 이미 뜰 앞에 가득히 모였습니다.”

하니, 연경은 천천히 말하기를,

“공등(公等)은 무슨 벼슬을 한 분들이기에 시종하는 관리가 이처럼 많습니까?”

하자, 윤수가 대답하기를,

“유수 상공(相公)이십니다.”

하니, 연경은 웃으며 말하기를,

“상국(相國)께서 야인(野人)을 방문하시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고, 전유연과 함께 크게 웃었다. 연경이 다시 말하기를,

“제공(諸公)께서는 다시 더 마실 수 있습니까?”

하니, 유연은 흔연히 그의 말을 받아들여 다시 술을 마셨다, 연경은 유연이 유수 상공임을 알고 나서도 술상이 전보다 다른 것이 없고 태연한 기색으로 담소(談笑)하였다. 날이 저물어 유연이 떠나자 연경은 문 앞에서 그를 전송하며 말하기를,

“나는 노병(老病) 때문에 회사(回謝 : 사례(謝禮)하는 뜻을 표함)할 수 없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유연 등은 수레에 오르며 망연자실(茫然自失)하였다. 유연은 이튿날 요속(僚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은사이다. 부귀 보기를 하등물(何等物 : 하찮게 여겨 경멸하는 것)로 여긴다.”

하며, 여러 날을 두고 감탄하였다. 《설부(說郛)》

 

● 소동파(蘇東坡)가 남쪽으로 귀양 갈 적에 영(嶺)을 넘어 임간(林間)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두 도인(道人)을 만났다. 도인은 동파를 보고는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동파가 압송 사신(押送使臣)에게 말하기를,

“이 집 안에 이인(異人)이 있으니 함께 들어가 보자.”

하고, 곧 문안으로 들어가니, 수간(數間) 모옥(茅屋)에 두 도인의 의상(意象)이 매우 소쇄(瀟洒)해 보였다. 도인이 사신을 돌아보고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에 소학사(蘇學士)라고 대답하니, 도인이 말하기를,

“그럼 소자첨(蘇子瞻)이 아닌가.”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소 학사는 당초 문장으로 뜻을 얻었으나 끝내 문장 때문에 뜻을 잃었다.”

하니, 도인은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말하기를,

“문장이 어찌 뜻을 얻고 잃게 할 수 있겠는가. 부귀(富貴)란 원래 성쇠(盛衰)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동파가 말하기를,

“어느 산림(山林)에 도사(道士)가 없으리요마는 그 중에서 특이한 이로는 여류(女流)에 춘몽파(春夢婆)가 있고, 이곳에 두 도인이 있다.”

하였으니, 그가 만난 사람 중에 어찌 그리 현자가 많은가. 《장공외기(長公外記)》

▶춘몽파(春夢婆) : 소식(蘇軾)이 창화(昌化)에 있을 때에 큰 바가지를 등에 메고 전지(田地) 사이를 오가며 노래를 부르니, 어떤 노파(老婆)가 소식에게 말하기를 “내한(內翰 : 송대 한림학사(翰林學士) 의 이칭)의 지난날 부귀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하니, 소식은 그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그 마을 사람들은 이 노파를 춘몽파라 불렀다.

 

● 송강(松江)의 한 어부(漁父)는 매양 작은 배를 저어 장교(長橋)를 왕래하며 술을 마시고 취하면 뱃전을 두드리며 자득(自得 : 만족하여 바랄 것이 없는 것)을 노래하였다. 소성(紹聖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연간(年間)에 민중(閩中) 사람 반유(潘裕)가 경사(京師)로부터 천관(遷官)되어 오(吳)를 지나다가 그 어부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선생은 몸을 깨끗이 하고 도덕(道德)을 닦으셨으니, 지금 성명(聖明)하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는데 어찌 출사(出仕)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어부는 웃으며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혹 출사하기도 하고 혹 은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암혈(巖穴)에 은거하지는 못하였으나, 한 고조(漢高祖) 때의 은사인 동원공(東園公)과 기리계(綺里季)의 자취를 따르고 노자(老子)의 곡전(曲全)의 뜻을 사모합니다. 또 뜻을 수양(修養)하는 자는 형체(形體)를 잊는 것이고, 형체를 기르는 자는 영리(榮利)를 잊는 것이며, 도를 이룩하는 자는 마음을 잊는 것이니, 마음과 형체를 잊는다면 벼슬 보기를 분토(糞土 : 썩은 흙)처럼 여길 뿐입니다. 나는 그대와 취향(趣向)이 같지 않으니 나의 일에 간여하지 마시오.”

하였다. 《작애집(灼艾集)》

▶곡전(曲全) : 자신의 지혜를 숨김으로써 몸을 온전히 보전한다는 뜻.

 

● 양적현(陽翟縣)에 두생(杜生)이란 자가 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고 다만 읍인(邑人)들이 그를 두오랑(杜五郞)이라 부를 뿐이었다. 현(縣) 35리(里) 밖에 사는데 집이라고는 두 칸뿐이고 집 앞에 10자(尺) 정도의 공지(空地)가 있는데, 두생이 문밖을 나가지 않은 지가 벌써 30년이었다. 여양위(黎陽尉)가 일찍이 그를 방문하여 문밖을 나가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그는 문 앞의 뽕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15년 전에 저 뽕나무 밑에서 더위를 피한 적이 있었으되, 단지 일이 없어 우연히 나가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두생이 대답하기를,

“남에게 택일(擇日)도 해주고 약(藥)도 팔아 싸라기 죽으로 연명하였는데, 자식이 커서 농사짓고부터는 식량이 넉넉해져서 택일과 매약(賣藥)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또 평상시(平常時)에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단정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책을 보느냐고 물으니,

“20년 전에 일찍이 《정명경(淨名經)》을 보고 그 의론을 좋아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잊었고, 그 책마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는 기품(氣品)이 한광(閒曠)하고 언사(言詞)가 청간(淸簡)하니, 도가 있는 선비이다. 한추위인데도 베옷에 짚신을 신고 방안에는 의자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몽계필담(夢溪筆談)》

 

● 순창산인(順昌山人)은 그 성명도 알 수 없고 또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정강(靖康 :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말년에 순창산 속으로 피난간 자들이 산 속 깊이 들어가다가 초가 한 채를 만났는데, 그 초가의 주인은 풍채(風彩)가 단정하고, 서로 이야기를 해보니 사군자(士君子)였다. 그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여러분들은 무슨 일로 처자를 거느리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하므로, 그 이유를 말해 주니, 주인은 다시,

“난리가 어디로부터 일어났습니까?”

묻기에,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난리가 난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인이 한동안 탄식하다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인종(仁宗) 때 사람인데 가우(嘉祐 :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말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희령(熙寧) 연호가 있는 것만을 알 뿐, 지금이 몇 해가 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설부(說郛)》

▶인종(宋仁宗)은 북송(北宋)의 4대 황제로 재위기간은 1033 ~ 1036. 흠종(欽宗)은 9대 황제로 재위기간 1125 ∼ 1127.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강색농월(江索弄月>, 지본담채, 국립민속박물관 : 당나라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장강 채석기(採石磯)에서 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에 빠져 익사했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그림]

 

● 소운경(蘇雲卿)이 과거에 승상(丞相) 장덕원(張德遠)과 친구였다. 송(宋) 나라가 금(金) 나라에 밀려 남도(南渡)한 뒤 덕원은 귀하게 되고 현달했으나, 운경은 곧 세상을 피해 동호(東湖) 가에 초막(草幕)을 짓고 살았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여 자갈밭을 일구어 채소(菜蔬)를 기르고 신을 삼아 생계(生計)를 유지한 것이 거의 30년이었다. 뒤에 덕원이 다시 정승이 되었을 적에 금백(金帛)의 예물(禮物)을 갖추어 예장(豫章) 수부(帥府)로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친구 소운경이 그곳에 살고 있는데, 이 사람은 관중(管仲 : 춘추시대 제(齊)의 현상(賢相)), 악의(樂毅 전국시대 연(燕)의 양장(良將)) 같은 사람이니, 절간(折簡 : 초청하는 간단한 편지)으로서는 부를 수 없고 반드시 예로써 초치(招致)해야 한다.”

하였다. 수(帥)와 조(漕)는 즉시 운경을 찾아가서 장 승상의 편지를 전하고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니, 운경이 내일 수부로 찾아오겠다고 하므로 수와 조는 그리 알고 돌아와서 이튿날 관리를 보내어 운경을 맞아오게 하였더니, 운경은 편지와 예물은 펴 보지도 않은 채 버려두고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빈사전(貧士傳)》

 

● 여휘지(呂徽之)는 만산(萬山) 가운데 살면서 농사와 어업(漁業)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루는 돈을 가지고 부잣집으로 씨앗을 사러 갔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렸다. 동각(東閣)에 사람들이 모여 분운(分韻)하여 설시(雪詩)를 짓는데 어떤 사람이 등(滕) 자 운을 만나 시를 이루지 못하고 고심(苦心)한다는 말을 듣고 휘지는 실소(失笑)하였다. 동각에 있던 사람들이 휘지가 실소한다는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캐물으므로 휘지는 부득이,

“나는 등왕(滕王)의 협접도(蛺蝶圖)를 생각했을 뿐이다.”

대답하니, 여러 사람들은 비로소 탄복하고 휘지를 좌중(坐中)으로 맞아들이고, 등(滕) 자와 등(藤) 자의 운을 사용하여 시를 지으라고 청하였다. 휘지는 즉시 붓을 뽑아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天上九龍施法水 하늘의 구룡은 법수를 베풀고

人間二鼠嚙枯藤 인간의 이서는 생명을 갉아먹네.

鶩鵝聲亂功收蔡 목아 소리 어지러운데 채에서 공을 세웠고

蝴蝶飛來妙過滕 호접은 날아 등왕도(滕王圖) 속을 지나네.

▶법수(法水) : 중생(衆生)의 번뇌를 씻어버리는 것이 마치 물이 때를 씻는 것과 같다 하여 불법(佛法)을 법수(法水)라 한다.
▶이서(二鼠) : 인간이 오욕(五欲)에 집착(執着)되어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주야(晝夜)가 흘러 등(藤) 즉, 명근(命根)을 갉아먹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낮은 흰 쥐이고 밤은 검은 쥐이다.
▶등왕도(滕王圖) : 당대(唐代)의 명화(名畫) 호접도(蝴蝶圖)를 말함인데, 등왕(滕王) 원영(元嬰)의 그림이라 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시 첨(粘)과 담(曇)의 운을 사용하여 시를 지으라고 청하니, 휘지는 또 붓을 잡고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萬里關河凍欲含 만리 관하에 얼음이 덮였는데

渾如天地尙函三 혼연한 천지는 세 기운 머금었네.

橋邊驢子詩何惡 다리 위 나귀 등에선 시상(詩想) 떠오르지 않아

帳底羔兒酒正酣 장막 밑에서 양 잡아 취하도록 마셨네.

竹委長身寒郭索 대나무 장신을 세우니 청고(淸高)한 곽색이고

松埋短髮老瞿曇 소나무 단발을 묻으니 늙은 중일세.

不如乘此擒元濟 이때를 타 원제를 사로잡아

一洗江南草木慚 강남의 부끄럼 씻는 것만 못하리.

휘지는 쓰기를 마치고 곧 일어나 나와 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성명을 물었으나 대답도 하지 않고, 또 씨앗을 거저 주었으나 받지 않고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의(義)롭지 않은 물건을 받겠는가.”

하고 기어이 돈을 주고 사서 배에 싣고 떠났다. 동각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한 사람을 보내어 그의 뒤를 밟게 하였는데, 길이 매우 벽원(僻遠)하므로 잊지 않기 위하여 표지를 해 두고 돌아왔다. 눈이 갠 뒤에 휘지의 집을 찾아가니, 오직 단칸의 초가뿐인데, 방안에는 한 여자가 쌀통 속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휘지의 아내인데 날씨가 춥기 때문에 쌀통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휘지의 간 곳을 물으니 시내로 고기 잡으러 갔다 하므로 방문객(訪問客)들은 그를 찾아 시내로 올라갔다. 휘지는 과연 찾아온 사람들을 보고 시내 건너편에서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나의 집으로 내려가서 기다리십시오. 나는 고기를 잡아 술과 바꾸어 여러분을 대접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그는 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방문객들과 함께 실컷 마시고 서로 좋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방문객들은 중도의 여관(旅館)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 여관 주인에게 휘지 이야기를 하니, 그 주인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내가 평소에 한번 만나보기를 원하던 사람이다.”

하였다. 이튿날 객을 보낸 다음 그 주인은 객이 일러준 대로 길을 찾아가 보니 휘지는 이미 거처(居處)를 옮기고 없었다. 《철경록(輟耕錄)》

 

● 백옥섬(白玉蟾)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그가 술에 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든 서적(書籍)에 박흡(博洽)하고 문장을 짓는 데도 초를 잡는 일이 없으며 무이동(武夷洞)에서 도를 닦았다. 송 영종(宋寧宗) 가정(嘉定) 초엽(初葉)에 징소(徵召)되어 태을궁(太乙宮)에 머물러 있었는데, 하루는 어디론지 떠나버렸으므로, 영종은 조서를 내려 자청진인(紫淸眞人)으로 봉하였다. 그는 항상 자찬(自讚)하기를,

“영원히 흐트러진 머리에 맨발이고 평생 동안 기운을 마시고 연하(煙霞)를 마셨다.”

하고, 웃으며 무이산(武夷山) 밑 백운(白雲)이 자욱한 곳을 가리켜 내 집이라 하였다. 《선전습유(仙傳拾遺)》

 

● 호장유(胡長孺)는 특립독행(特立獨行)하여 모진 기한(飢寒)에서도 지조(志操)를 지켰다. 조자앙(趙子昂 : 자앙은 조맹부(趙孟頫)의 자)이 일찍이 나 사도(羅司徒)를 위하여 돈[鈔] 1백 정(錠)을 가지고 가서 묘명(墓銘)을 부탁하니, 장유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 어찌 환관(宦官)을 위하여 묘명을 짓겠는가.”

하였다. 그날 장유의 집에는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그 아들이 사정을 이야기하니 좌중(坐中)의 여러 빈객들이 모두 그 돈을 받기를 권하였으나, 장유는 더욱 완강히 물리쳤다. 일찍이 동양(東陽)으로 가는 채여우(蔡如愚)를 전송하는 글에,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옷도 따뜻하지 않으나, 시를 읊는 소리는 오히려 종구(鍾球 : 종과 경쇠) 소리 같다.”

하고,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운 양식이다.”

하였다. 《빈사전(貧士傳)》

 

● 명 태조(明太祖)의 옛 친구 초모(焦某)는 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오지 않으므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도록 하였다. 하루는 초(焦)가 닭과 술을 가지고 어가(御街)로부터 곧장 궁궐로 들어오니, 상(上)은 기뻐서 광록시(光祿寺)에 음식을 장만하게 하여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 매우 즐거워하였다. 술자리가 파한 뒤 태조는 금대(金帶)ㆍ은대(銀帶)ㆍ각대(角帶)를 내어 놓고 초에게 마음대로 고르게 하여 그가 고른 대(帶)에 따라 벼슬을 주려 하였는데, 초가 각대를 취하므로 천호(千戶)에 제수(除授)하였다. 며칠 뒤 초는 고교문(高橋門)으로 나아가서 관(冠)과 대(帶)를 뽕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천호(千戶) :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에 위소(衛所)의 관직(官職)으로 군사 1천 명을 거느렸다.

 

● 소군(蘇郡)에 은사 왕빈(王賓)은 본디 요광효(姚廣孝)와 친했는데, 광효가 연왕(燕王 : 성조(成祖)가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을 도와 성공한 다음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자, 빈은 광효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겨 그와 상대하지 않았다. 소사는 기종(騎從)을 물리치고 단갈(短褐)을 입고 빈을 찾아가니, 빈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사가 간곡하게 청하니, 빈은 모르는 체하고 누구냐고 물었다. 소사가 대답하기를,

“바로 옛날의 도연(道衍 : 요광효의 자)이다.”

하니, 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사는 큰 소리로,

“광암(光菴 : 왕빈의 호)아, 옛날의 정분을 생각해서 노승(老僧)을 한번 만나 달라.”

하니, 왕빈이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풀을 깎는 중이라 바빠서 만날 여가가 없다.”

하였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오관(吳寬)이 소재(少宰)가 되어 본가(本家)로 가다가 산인(山人 : 은자) 형양(邢量)을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니, 형양이 말하기를,

“나는 지금 막 밥을 먹는 중이고 공(公)을 접대할 만한 어린아이도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므로, 오관은 그가 밥을 다 먹기까지 문밖에 앉아서 기다린 뒤에 들어가 만났다. 《미공비급》

 

● 진해옹(陳海雍 : 용담노인(龍潭老人))은 고학(古學)에 잠심(潛心)하여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근심이 없으니, 그 장인 오여필(吳與弼)이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진헌장(陳獻章)이 일찍이 강재에게 《주역(周易)》의 의의(疑義)를 질문하니, 강재가 말하기를,

“청강(淸江)으로 가서 용담노인(龍潭老人)을 찾으라.”

하였다. 백사(白沙 : 진헌장의 호)는 그의 말을 따라 용담노인을 찾아가니, 그때 마침 용담노인은 우중(雨中)인데도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밭의 김을 매고 있다가 백사를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아 이틀 밤을 새워가며 의의를 변론하고 분석하니, 백사가 탄복하였다. 백사가 돌아간 뒤 용담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오강재는 나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지비록(知非錄)》

 

● 왕경미(王敬美)가 관서(關西)를 여행할 때에 한음(漢陰)을 경유하여 자오곡(子午谷)으로 들어가서 산길을 가노라니, 절벽은 높고 가파르며 숲은 우거져 무성한데, 시냇가 길에 두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가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은자(隱者)라고 생각되어 곧 노인들에게 읍(揖)하고 묻기를,

“노인은 무엇하는 분들입니까?”

하니, 산중의 학구(學究)라고 대답하였다. 또 어쩌면 이렇게 자적(自適)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한 노인이 대답하기를,

“힘써 농사지으니 싸라기 죽은 먹을 수 있고, 차조[秫]를 빚어 술을 담그니 친구를 청할 수 있으며, 야수(野水)에 임하여 죽운(竹雲 : 대와 구름)을 구경할 뿐 세상일은 전혀 듣지 않는다.”

하고, 한 노인은,

“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채마밭에 물 주어 채소를 가꾸며 자식에게 글을 읽힐 뿐, 조최리(租催吏)를 알지 못하고 현대부(縣大夫)를 보지 못했다.”

하였다. 왕경미는 곧 일어나서 사례하기를,

“두 분은 참으로 태고(太古)의 백성이십니다.”

하였다. 《미공비급》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