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7 - 한정록(閑情錄) 고일(高逸) 2

從心所欲 2021. 8. 18. 16:16

● 양적(陽翟)의 신군(辛君)은 선배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덕으로 벼슬을 얻었으나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는 소자용(蘇子容) 승상(丞相)의 처남(妻男)이고 이정(二程 :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선생의 외숙(外叔)이다. 당시 소 승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천(伊川 : 정이(程頤)) 선생이 원풍(元豐) 연간에 해마다 낙중(洛中)으로부터 와서 영창(潁昌)에 있는 한지국(韓持國 : 지국은 한유(韓維)의 자)을 방문했는데, 양적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10여 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그의 집에는 7칸짜리 대옥(大屋)이 있었는데, 집 뒤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어 평생토록 자락(自樂)하였다. 《와유록(臥遊錄)》

 

● 전승군(田承君 : 전주(田晝)의 자)은 강개자수(剛介自守)한 성품이었다. 그 형제 다섯이 모두 기절(氣節)이 있고 박학능문(博學能文)하였으며, 형제가 함께 살면서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최안 덕부(崔鶠德符 : 덕부는 최안의 자)와 진염 숙이(陳恬叔易 : 숙이는 진염의 자)와 벗으로 사귀었다. 여러 전씨 형제들이 양적현(陽翟縣) 남쪽 10리에 있는 죽림점(竹林店)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곳에 대나무가 많아서 죽림점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이다. 10여 칸의 집이 있어 문사(文史)의 일로 지내기가 넉넉하였다. 수재(秀才)인 양적 사람 장종문(張宗文)은 전씨와 친척 사이였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해 어느 달밤에 성중(城中)에서부터 걸어서 전씨들을 찾아갔더니, 마침 술이 익고 꽃이 만발했으므로 10여 일을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서로 문장을 짓고 어울리다가 즐거운 뜻이 충족된 뒤에 돌아왔다.” 《와유록》

 

● 난산(亂山) 가운데 전승군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앞에는 대나무가 있고 옆에는 시내가 흘렀다. 그 시냇가에 큰 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앞뒤에 배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었다. 매일 두 아우들과 함께 대숲을 지나 시내를 건너다니다가 피로하면 그 돌 위에 앉거나 풀 위에서 쉬었다. 갈건(葛巾)과 짚신으로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왔는데, 그 흥취가 족히 늙어감과 근심을 잊어버릴 만하였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소양직(蘇養直 : 양직은 소상(蘇庠)의 자)은 경구(京口)와 소흥(紹興) 사이에 은거하였다. 서사천(徐師川 : 사천은 서부(徐俯)의 자)과 함께 징소(徵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사천이 조정에 나아갈 때 소양직이 사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머물러 여러 날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 두 사람은 평소에 서로 바둑 상대였는데 서사천의 수가 소양직보다 높았었다. 그런데 이날은 소양직이 한 알을 놓으면서 서사천을 보고 말하기를,

“자네가 오늘은 노부(老夫)의 이 한 점에 모름지기 양보해야 할 것이네.”

하니, 서사천은 부끄러운 낯이 되었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주희진(朱希眞 : 희진은 주돈유(周敦儒)의 자)은 가화(嘉禾) 지방에 살았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연파(煙波) 사이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었다. 어떤 행자(行者)에게 물으니 그가,

“이것은 우리 선생님이 부는 피리소리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그 피리 분 사람이 작은 배를 저어 왔으므로, 모두 함께 그가 사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집에 금축(琴筑)과 완함(阮咸) 같은 악기들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주희진이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것들이었다. 처마 사이에는 진기한 새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일찍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들이었으며, 방 안의 청자(靑瓷)에는 과일과 음식들이 담겨 있었는데 손님이 오면 그것을 집어서 대접하였다. 그의 시에,

 

靑羅包髻白行纏 청라로 상투를 싸고 발에는 흰 행전

不是凡人不是仙 이는 범인도 아니고 신선도 아니라네.

家在洛陽城裏在 집은 낙양성 안에 있는데

臥吹銅笛過伊川 누워서 동적을 불며 이천을 지나네.

 

하였다. 《옥호빙(玉壺氷)》

 

● 예운림(倪雲林 : 운림은 예찬(倪瓚)의 별호)의 집에 청비각(淸閟閣)이 있었는데, 깊고 아늑하여 속세의 티끌이 없었다. 그 안에 수천 권의 서책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손수 교정(校正)한 것이었고, 경사 제자(經史諸子)로부터 석로(釋老)의 글까지 모든 서책을 매일 읊조리곤 하였다. 그 집안에는 옛날 정이(鼎彝)와 명금(名琴)이 좌우에 널려 있고, 송계난죽(松桂蘭竹)이 집 주위에 빙 둘러 있었다. 집 밖에는 높은 나무와 긴 대나무들이 울창하게 깊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자면 그는 지팡이와 신발을 끌고 그 주위를 마음대로 산보하면서 때로 시구를 읊조리며 즐겼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가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씨어림》

▶정이(鼎彝) : 고대 종묘(宗廟) 중의 제기(祭器)

 

● 고중영(顧仲瑛 : 중영은 고덕휘(顧德輝)의 자)은 재산이 많았으나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손[客]을 좋아하였다. 옛날의 법서(法書 : 명필(名筆)의 글씨)와 명화(名畫)와 정이(鼎彝) 등의 비기(祕器)를 사서 모으고, 서경(茜涇)이라는 곳의 서쪽의 별장을 짓고는 ‘옥산가처(玉山佳處)’라고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밤낮으로 손님과 더불어 그 안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그래서 하동(河東)의 장저(張翥), 회계(會稽)의 양유정(楊維楨), 천태(天台)의 가구사(柯九思), 영가(永嘉)의 이효광(李孝光) 등과 같은 사방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들과 장백우(張伯雨 : 백우는 장우(張雨)의 자)ㆍ우언성(于彦成 : 언성은 우립(于立)의 자)ㆍ기원박(琦元樸)과 같은 방외(方外)의 인사와 당시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이곤 하였다. 그 원지(園池)의 화려함과 도서(圖書)의 풍부함은 음식과 건물과 성기(聲伎) 등과 함께 모두 당시 제일이었다. 더욱이 그의 재주와 정감이 묘려(妙麗)하여 앞의 여러 사람들과 대략 서로 수작(酬酌)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이 사방에 유명하였다. 《하씨어림》

 

● 왕면(王冕)은 배를 사서 동오(東吳)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대강(大江)을 건너 초회(楚淮) 지방으로 가서 유명한 산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러다가 혹 기재(奇才)나 협객(俠客)으로 옛날의 호걸(豪傑)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그를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며 강개한 뜻을 시로 읊조리곤 하였다. 북으로 당시 원(元)의 수도인 연도(燕都)를 유람하고서는,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은 여우와 토끼가 노는 벌판이 되리라.”

하였다. 구리산(九里山)에 은거하였는데, 콩은 3묘(畝)를 심고 밤나무는 그 배를 심었으며, 매화(梅花)는 1천 그루 심고 복숭아와 살구는 5백 그루씩 심었으며, 토란 한 구획(區劃)과 해채(薤菜)와 부추를 각기 1백 본(本)씩 심었다. 또 물을 끌어서 못을 만들고 물고기를 1천여 마리 길렀으며 모옥(茅屋) 3칸을 짓고는 스스로 ‘매화옥(梅花屋)’이라 이름 붙였다. 《명야사휘(明野史彙)》

▶묘(畝) : 100평

 

● 왕공(王恭)이 나이 60여 세에 천거되어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왕칭(王偁)이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를,

“자네는 회계 태수(會稽太守)의 인끈을 숨겨가지고 오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니, 왕공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산중(山中)의 도끼자루가 다행히 별탈이 없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회계 태수(會稽太守)의……오는 일 : 한 나라의 주매신(朱買臣)이 늙어서 크게 출세를 하였다. 그가 회계 태수가 되어 올 처음에 그 인끈을 내보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옛 친구들이 그가 태수라는 것을 몰랐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한다.
▶산중(山中)의……없네 : 주매신이 벼슬하기 전에는 그 아내와 함께 산에서 나무를 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여기서는 왕공 자신은 비록 벼슬을 못해도 산중의 도끼자루가 아직 무사하니 생계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대꾸한 것이다.

 

● 상숙(常熟)에 사는 부자 서홍(徐洪)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유간(諭幹) 사람 반규(潘珪)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의 재산이 많으니 자네가 대신 맡아서 처리하게. 나는 이제 이것을 내버리고 떠나겠네.”

하고는 그의 전택(田宅)을 모두 반규에게 주었다. 그는 처자를 데리고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 베옷에 나물밥을 먹으며 외인과 교제를 사양하고 스스로 도원 ……(원문 1자 빠짐)…… 은(桃源□隱)이라 하였다. 《장설소췌(藏說小萃)》

 

● 고소(姑蘇)에 사는 왕빈(王賓)은 누항(陋巷)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군수(郡守)인 요선(姚善)이 그를 찾아가 보았다. 요선이 수레를 버리고 몸소 그 집 문 앞에 이르니, 왕빈이 누구냐고 물었다. 요선이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문을 열고 맞아들여 서로 담소하였다. 다음날 왕빈이 부문(府門) 앞에 가서 두 번 절하고 돌아오려 하니, 요선이 몸소 나와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왕빈이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공사(公事)가 아니므로 감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명세설신어》

▶공사(公事)가……없습니다 : 왕빈이 요선을 찾은 것은 전날 찾아준 데 대한 개인적인 답례(答禮)라는 뜻. 자유(子游)가 무성 재(武城宰)가 되었는데, 공자(孔子)가 “네가 어떤 인재를 얻었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유가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이 있어 다닐 때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제 집에 오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論語 雍也》

 

● 화여덕(華汝德)에게 상고루(尙古樓)라는 집이 있었는데, 그는 관(冠)과 신, 반우(盤盂)와 궤탑(几榻) 등을 모두 옛사람들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특히 옛 명필, 명화와 정이(鼎彝) 등을 좋아하여 현상을 걸고 열심히 모았다. 또 진품(眞品)과 모조품 및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모은 것들은 모두 을품(乙品)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당시 오(吳) 지방에 심주(沈周)라는 선생이 옛 물건을 잘 감별할 줄 안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상고(尙古 : 화여덕)는 때때로 작은 배에 골동품을 싣고 심주 선생을 찾아가 교제하며, 서로 자기의 소장품(所藏品)을 내놓고 감평(鑑評)을 하면서 어느 때는 수십일 동안 돌아오지 않기도 하였다. 명(明) 나라 성화(成化 :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ㆍ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연간에 중국 동남(東南) 지방의 호고박아(好古博雅)한 선비들은 심주 선생을 제일로 치고 상고를 그 다음으로 쳤다. 《미공십부집(眉公十部集)》

▶반우(盤盂) : 세수대나 목욕탕 등의 기물.
▶궤탑(几榻) : 책상과 의자.

 

● 관중(關中)의 태백산인(太白山人) 손일원(孫一元)은 구기산인(九杞山人) 허상경(許相卿)과 친했다. 어느 날 남병산(南屛山)을 지나는데 학(鶴) 한 마리가 따라오므로, 구기산인이 그 학을 위해 학전(鶴田)을 사고 해마다 곡식을 깊은 산중에 날라다 주도록 하였다. 그 문서를 만들어 비장했는데 거기에,

“태백산인의 학전은 구기산(九杞山) 서원(書院)의 남쪽에 있는데, 산을 끼고 호수를 앞에 두고 왼쪽은 숲이고 오른쪽은 길이다. 밭의 면적과 길이는 각기 1백 보(步)로 한 해에 곡식 3석(石)의 수입이 있다. 만약 나머지가 있으면 곡식을 나르는 비용으로 쓰고, 3석의 곡식은 항주(杭州)의 서호(西湖)에 있는 남병산으로 보낸다. 또 흉년이 들면 그 반으로 줄이되 나머지는 구기산인이 윤필(潤筆 : 다른 사람에게 글씨나 그림을 주고서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한 비용으로 충당한다. 그 밭을 경작하는 사람은 주인(主人)의 이웃사람인 이인(李仁)이요, 그것을 나르는 사람은 주인의 노복인 귀의(歸義)요, 보증인은 주인의 아우 허장경 주중(許檣卿舟仲 : 주중은 허장경의 자)이다. 주인은 누구인가 하면, 태백산인의 벗으로 기천자(杞泉子)라고 하는 허중보(許仲甫)이다.”

하였는데, 이것을 ‘학전권(鶴田卷)’이라고 했다. 《미공십부집》

 

● 문형산(文衡山 : 형산은 문징명(文徵明)의 별호)은 부모가 돌아간 뒤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로 징빙(徵聘)했는데,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영서인(寧庶人 : 명 태조(明太祖)의 열일곱째 아들인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이 그의 이름을 사모하여 초청했으나 나가지 않고 나날이 한묵(翰墨)으로 소일하였다. 평생 동안 외간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성시(城市)에 드나들지 않았다. 권귀(權貴)한 사람들이 그의 서화(書畫)를 바라면 절대로 주지 않았으나 민간의 소민(小民)들이 과일과 떡을 가져와서 서화를 얻으려 하면 흔쾌하게 붓을 휘둘러 그려주었다. 92세에 아무런 병 없이 죽었다. 《명야사휘》

 

● 왕이길(王履吉 : 이길은 왕총(王寵)의 자)은 손으로 경서(經書)를 모두 두 번이나 베껴 썼다. 속된 말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으며, 풍의(風儀)가 의젓하고 행동이 헌걸찼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여 비록 그의 명성이 자자했지만 중후(重厚)한 태도를 지녔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에 학문에 대해서 말한 일이 없었으니, 대개 자기의 능기(能技)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보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성품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동정호(洞庭湖)에서 3년을 살았으며, 뒤에는 석호(石湖)에서 20년을 독서로 보내면서 세시(歲時)나 부모를 문안(問安)할 경우가 아니면 성중(城中)에 드나들지 않았다. 산수(山水)가 훌륭한 곳에 이르면 문득 즐거운 마음이 생겨 떠날 줄을 몰라, 혹 무성한 숲이나 풀이 무성한 곳에 비스듬히 누워 쉬면서 향기를 맡고 시를 읊으며 자리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면서 아득히 천년(千年)을 사모하는 풍취가 있었다. 《명야사휘》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희황세인(羲皇世人>, 지본담채, 국립민속박물관 l 희황(羲皇)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인 복희(伏羲)씨를 가리킨다. 희황상인(羲皇上人)은 복희(伏羲)씨 시대인 태고(太古) 때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나 한가(閑暇)하게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어인데, 세인(世人)이라고 쓴 것은 착오로 보인다.]

 

● 웅제화(熊隮華)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길수현(吉水縣) 추남고리(鄒南皐里)를 지나다보니 그 석수(石水)가 청량(淸涼)하여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탐렴 유립(貪廉懦立)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 거기에서 어떤 선생을 만났는데, 한 마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돌아오는 흥취가 있었다.” 《명세설신어》

▶탐렴 유립(貪廉懦立) : 탐욕스러운 사람이 청렴하게 되고 겁이 많은 사람이 능히 자립(自立)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에 “백이(伯夷)의 풍도(風度)에 대해서 들은 사람은, 비록 완악한 자라도 청렴해지고 겁 많은 사람이라도 큰 뜻을 세워 자립한다.”는 구절이 있다.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흥취 : 세상의 출세나 사무보다는 자연(自然)과 함께 하는 기상(氣像)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다가 노래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고 싶습니다.” 하였다. 《論語 先進》

 

● 진 무제(晉武帝) 태강(太康) 연간에 전선(田宣)이라는 사람이 명석암(鳴石巖)에 은거하였다. 서리가 바람에 날리고 낙엽이 지면, 그는 항상 그 돌을 어루만지면서 혼자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매양 흰 초의(草衣)를 입은 사람이 나타나 바위 위를 배회(徘徊)하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왕중륜(王中倫)이란 사람으로 주선왕(周宣王) 때 사람인데, 이 돌에서 나는 소리가 맑고 우렁차서 자주 여기에 와서 듣고는 한다.” 《소창청기》

 

● 야인(野人)이 나부산(羅浮山)을 노닐면서 긴 휘파람을 불면 그 소리가 온 숲을 빙 돌아 울려 퍼진다. 송(宋) 나라 함순(咸淳 : 송 도종(宋度宗)의 연호) 연간에 어떤 사람이 오방모(烏方帽)를 쓰고 신을 신고 나부산을 왕래하였는데, 사람만 보면 크게 웃으면서 도망치곤 하였다. 3년이 지나도록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크게 취하여 돌아가다가 문득 숯검정을 들어서 벽에다 글씨를 썼다. 그 글에,

 

雲意不□滄海 구름의 뜻 창해를 ……(원문 1자 빠짐)…… 하지 않고

春光欲上翠微 춘광은 산봉우리로 오르려 하네.

人間一墮千劫 인간에 한 번 떨어진 지 천 겁이 지났지만

猶愛梅花未歸 오히려 매화를 사랑하여 돌아가지 못하네.

 

하였으니, 대개 그는 야인의 무리라고 하겠다. 《소창청기》

 

● 주진촌(朱陳村)이라는 마을은 서주(徐州) 풍현(豐縣)에서 동남으로 1백리쯤 되는 깊은 산중에 있다. 그곳 민속이 매우 순박한데 고을에는 오직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씨만이 살아 대대로 혼인을 한다. 백낙천(白樂天)의 주진촌시(朱陳村詩) 34운(韻)이 있는데, 그 대략에,

 

縣遠官事少 고을이 멀어 관사가 적고

土深民俗淳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有財不行商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有丁不入軍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들어가지 않네.

家家守村業 집집마다 촌업을 지켜

頭白不出門 머리가 희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네.

生爲陳村人 살아서는 주진촌 사람이요

死爲陳村塵 죽어서도 주진촌 진토라네.

田中老與幼 밭 가운데 있는 노인과 어린이들

相見何欣欣 서로 쳐다보며 어찌 그리 즐거운가.

一村唯兩姓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世世爲婚姻 대대로 서로 혼인을 한다네.

親屬居有族 친척은 서로서로 모여서 살고

少長游有群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노닌다네.

黃鷄與白酒 황계와 백주로

歡會不隔旬 열흘이 멀다하고 모여 즐기네.

生者不遠別 살아서는 멀리 이별하는 일이 없고

嫁娶先近隣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이웃에서 고르네.

死者不遠葬 죽어서도 먼 곳에 장사하지 않아

墳墓多繞村 옹기종기 무덤들이 마을을 둘렀네.

旣安生與死 이미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不苦形與神 몸도 마음도 괴롭히지 않네.

所以多壽考 이런 까닭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往往見玄孫 때로는 현손을 보는 사람도 있다네.

 

하였다.

내가 이 시를 읊을 때마다 속된 마음이 단번에 씻어지는 듯하여, 그곳에서 태어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겼다. 뒤에 파옹(坡翁 : 소식(蘇軾))의 주진촌가취도시(朱陳村嫁娶圖詩)를 보니, 거기에,

 

我是朱陳舊使君 내 지난날 주진촌(朱陳村)의 관리가 되어

勸農曾入杏花村 농사를 권하러 행화촌을 찾았더니

而今風物那堪畫 요즈음의 그곳 풍물 어찌 차마 그러하랴.

縣吏催錢夜打門 고을 아전들 돈 내라고 한밤중에도 문 두드리네.

 

하였으니, 송(宋)나라 때의 주진촌은 당 나라 때의 주진촌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에 가서 본다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비록(知非錄)》

 

● 석만경(石曼卿 : 만경은 석연년(石延年)의 자)이 채하(蔡河)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이웃의 한 부호(富豪) 집에서 날마다 노래와 악기 소리가 들렸다. 그 집의 종복(從僕) 수십 명이 항상 석만경의 문 앞을 왕래하였으므로, 석만경이 그 부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서 한번 만나보려고 하였더니, 그 하인이 대답하기를,

“우리 낭군(郎君)께서는 본디 사대부(士大夫)와 서로 교제하지를 않으나, 다만 술을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학사(學士)께서 술을 잘 마신다는 소문을 자주 들어서 한번 만나보실 뜻이 있는 듯하니, 시험 삼아 제가 뜻을 물어보겠습니다.”

하였다. 하루는 과연 사람을 시켜 석만경을 초청하였으므로, 만경이 그 집에 가서 당상(堂上)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에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두건(頭巾)을 허리띠에 매달았고 의관(衣冠)을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상견(相見)할 때도 공수읍례(拱手揖禮)를 하지 않고, 문득 그를 어떤 별관(別館)으로 데려갔는데 휘장 등속이 매우 현란하였다. 비녀(婢女) 두 사람이 각각 작은 쟁반을 하나씩 들고서 석만경의 앞으로 왔는데, 한 쟁반에는 홍아패(紅牙牌)가 있었고 다른 한 쟁반에는 무릇 10여 가지나 되는 술이 있었다. 그가 석만경에게 패를 하나 고르도록 했는데, 거기에는 한 상의 반찬 이름이 씌어 있었다. 또 술 다섯 가지를 고르도록 하였다. 잠시 뒤에 두 비녀가 물러가자 기생 10여 인이 제각기 안주와 과일과 악기(樂器)를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옷차림과 얼굴이 모두 염려(艶麗)하고 찬란하였다. 그 중에 한 기생이 앞으로 나와서 술을 따르는데 술이 한 차례 끝나면 음악이 시작되었다. 과일과 안주를 든 여러 기생들은 그 앞에 모여서서 있다가 술이 끝날 때는 다시 좌우로 늘어서곤 하였다. 이처럼 다섯 차례 술을 하더니 여러 기생들이 다 물러가고 주인도 안으로 들어가면서, 손님에게는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석만경이 혼자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만경은, “그 부자의 모습이 흐리멍덩한 듯 한데 이처럼 호사를 누리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고는 훗날 다시 사람을 시켜서 정중하게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문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문에서 대꾸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자 그 이웃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일찍이 사람들과 교제한 일이 없어서 이웃사람조차 그의 얼굴을 모릅니다.” 《몽계필담(夢溪筆談)》

 

● 장운수(張芸叟 : 운수는 장순민(張舜民)의 자)의 《남천록(南遷錄)》에,

“심양(潯陽)의 맹씨(孟氏)는 대대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집의 문은 어딘지 비상한 기운이 돌고 대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었다. 맹생(孟生)이 나와서 뵈는데 갈삼(葛衫)의 짚신을 신었고, 그 행동거지와 말투가 강가의 어부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주먹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띳집으로 안내를 하는데 좌우(左右)에는 모두 고기 잡는 도구들뿐으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조금 들어가 대청에 다다르자 온통 부귀한 사람의 집과 같았다. 잠시 뒤에 중당(中堂)이라고 편액을 단 곳에 이르니 그 기둥과 서까래는 모두 적흑색으로 칠을 했고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조각하고 수놓은 여러 기복(器服)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찬란하였다. 또 술과 음식도 모두 진미가 아닌 것이 없었다. 얼마 뒤에 기녀(妓女) 3 ~ 4인이 나오는데 모두 백금(百金)을 주고 꾸민 사복(士服)을 입었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다 경사(京師)에서 새로 전해진 것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온종일 황홀경을 헤매게 했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임협(任俠)으로 몸을 숨기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어렸을 때 동파(東坡 : 소식(蘇軾)의 호)를 뵈니,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에는 호걸(豪傑)다운 선비로서 은거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 고향에 어떤 사람이 대대로 미산(眉山)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선군(先君)을 장사지낼 때 기일이 임박하도록 묘지에 쓸 벽돌이 모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이 사람을 가서 보면 즉시 해결해 줄 것이다. 다만 그는 사냥을 하며 떠도는 날이 많고 또 그가 사는 곳이 세상과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이라 어떨지 모르겠지만, 시험 삼아 한번 가보라.’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무릇 이틀을 걸려서야 그 집에 이르렀는데, 그 집에 이르러 해가 기울도록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에야 비로소 종자(從者) 수기(數騎)를 거느리고 어떤 사람이 왔는데, 그 주인은 젊은 소년이었다. 명함을 들이니 그 소년이 옷을 바꿔 입고 나와 앉아서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그래서 내가 사실대로 자세히 얘기를 하자, 그 소년이 ‘쉬운 일입니다. 잠시 식사를 하시고 이 집에서 쉬십시오. 기한 내에 필요하신 것을 갖다드리도록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비녀(婢女) 몇 사람이 무릎을 꿇고 식사를 올리는데, 그것은 모두 그날 잡은 신선한 것이었다. 술을 몇 잔 주는데 식사가 끝난 뒤에야 조용히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그 사람이 종과 말을 보내서 나를 산 아래까지 호송하게 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일을 시작해서 땅을 파는데 그날 저녁이 다 되도록 벽돌 한 장도 오지 않았으므로 내가 크게 후회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묘지(墓地) 옆을 가보니 벽돌이 5만 장이나 촘촘히 쌓여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크게 경탄(驚嘆)을 하였는데, 일을 마친 뒤에 다시 그를 찾아가 사례를 하려 하였으나 만날 수가 없었고, 후일 그 벽돌 값을 가지고 간 사람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단연록(丹鉛錄)》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