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6 - 한정록(閑情錄) 고일(高逸) 1

從心所欲 2021. 8. 12. 16:42

●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인재(人才)로서는 마땅히 노중련(魯仲連)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가 진(秦)을 물러가게 하고도 조(趙)나라의 상(賞)을 받지 않고 요성(聊城)을 항복시키고도 제(齊)나라의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우습게보고 제 뜻대로 행동한 것을 보면, 초연(超然)히 이 세상의 구애에서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후세에서는 오직 이백(李白)만이 그를 알아보았는데 그 시에,

齊有倜儻生 제 나라에 척당한 사람이 있으니

魯連特高妙 고묘한 노중련이라네.

明月出海底 바다에서 솟아오른 명월주처럼

一朝開光耀 하루아침에 광채를 뿌렸다네.

 

하였고, 또,

 

獨立天地間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우뚝 서니

淸風洒蘭雪 맑은 바람이 난설을 씻어내는 듯.

 

하였으니, 노중련의 신채(神彩)를 제대로 전해주었다고 하겠다. 이백은 본래 그 인품과 기상이 초매(超邁)하여 자신이 노중련과 같은 기상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알아서 이와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장설소췌(藏說小萃)》

▶진(秦)을...받지 않고 : 노중련(魯仲連)이 조(趙)에 있을 때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했는데, 제후들이 진 나라의 위세를 겁내어 진나라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에 노중련은 평원군(平原君)을 도와 그 일을 막고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도록 하였다. 평원군이 그 일에 대한 사례로 그에게 봉지(封地)를 주려 하였으나, 노중련은 세 번이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史記 卷83》
▶요성(聊城)을……않으면서 : 연(燕)나라가 제(齊)나라의 요성을 공격하여 취하였는데, 전단(田單)이 그 성을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연나라 장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화살에 매달아 성중으로 쏘아 보내니, 연나라 장수는 그 편지를 보고 사흘을 울다가 자살(自殺)하였으므로 제나라가 그 성을 취하였다. 전단이 그의 공을 높이 여겨 벼슬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바닷가로 은거해 버렸다. 《史記 卷83》

 

● 한(漢)나라 말기에는 고사(高士)들이 많았다. 엄광(嚴光)은 만승(萬乘)의 천자(天子)에게조차 거만하게 대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이른바,

淸風洒六合 맑은 바람 육합(六合)을 씻어내니

邈然不可攀 아득한 그 기상 감히 오를 수 없네.

 

한 것은 거의 그 기상을 안 것이라 하겠다. 그 다음가는 사람으로는 황숙도(黃叔度 : 숙도는 황헌(黃憲)의 자)와 서유자(徐孺子 : 유자는 서치(徐穉)의 자)가 그 기풍을 이을 만하다. 이보다 아래로 혜숙야(嵇叔夜 : 숙야는 혜강(嵇康)의 자)는 향기로운 티끌을 밟는 듯한 기상이 있다고 하겠으나, 때로 세속과 어울리지 못하는 뾰족한 성품이 있어 난세(亂世)에 죽임을 당했으니 애석하다. 진(晉) 나라 이후에는 ‘고사(高士)가 한 사람도 없다.’ 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 《장설소췌》

▶엄광(嚴光)은……소일하였다 : 엄광은 어려서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와 함께 수학한 친구였다. 광무제가 즉위한 뒤에 은거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광무제가 그를 널리 찾아서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광무제는 그를 어질게 여겨 친구로 대하여 머물러 두려 하였으나 그는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로 한평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113》
▶난세에……당했으니 : 혜강은 위(魏)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데, 종회(鍾會)와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그의 참소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 《晉書 卷39》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6폭 <동강수조(桐江垂釣>, 지본담채, 국립민속박물관 : 엄광이 부춘산(富春山) 아래 은거하면서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했다는 고사를 그린 것.]

 

● 왕 우군(王右軍 : 우군장군을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은 원래 복식법(服食法 : 단약(丹藥)을 복용하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 본성(本性)을 기르기를 즐기고 경사(京師)에 거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절강(浙江)에 부임했을 때 문득 그곳에서 한평생을 마칠 뜻을 가졌다. 회계(會稽) 지방은 산수(山水)가 좋은 곳이어서 명사(名士)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때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은 다 문장과 의리(義理)로 한 시대에 으뜸가는 인물들이었는데, 함께 동토(東土 : 동중(東中)과 같은 말로, 진(晉)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뒤에 회계(會稽) 지방을 동중이라고 불렀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왕희지와 친숙하게 지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왕 우군(王右軍)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동토(東土)의 인사들과 산수 사이에 노닐면서 사냥과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와 함께 복식법을 닦으며 명약(名藥)을 캐러 다녔다. 천리(千里)도 멀다 하지 않고 동중(東中)의 여러 고을에 있는 명산(名山)을 유람하였는데, 창해(滄海)에 배를 띄워 타고는 말하였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에서 한평생을 마치리라.” 《소창청기(小窓淸記》

 

● 이흠(李廞)은 무증(茂曾)의 다섯째 아들로 청정(淸貞)하고 원대(遠大)한 지조가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섬약하여 혼인도 하지 않고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다. 임해(臨海)에 있는 가형(家兄)인 이 시중(李侍中 : 이식(李式))의 묘 아래에서 살았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승상(丞相)인 왕도(王導)가 그를 승상부의 속관으로 징벽(徵辟)하려 하였다. 이흠이 그 전명(牋命)을 받고 말하였다.

“무홍(茂弘 : 왕도의 자)이 또 벼슬자리로 사람을 빌리려 한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징벽(徵辟) :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를 예(禮)를 갖추어 불러 벼슬을 시킴

 

● 완 광록(阮光祿 : 진(晉)나라 때 광록(光祿)을 지낸 완유(阮裕))가 동산(東山)에 있을 때 소연무사(蕭然無事)하게 지내면서 항상 자족(自足)한 마음으로 지냈다. 어떤 사람이 그에 대해 왕 우군(王右軍)에게 물으니, 우군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거의 총욕(寵辱)에 놀라지 않으니 비록 옛날의 침명(沈冥 : 고요하여 자취가 없는 것)한 사람이라도 어찌 이에 지날 수 있겠는가.” 《세설신어보》

▶소연(蕭然) : 호젓하고 적적함.
▶총욕(寵辱)에……않으니 : 벼슬이나 명예의 득실(得失)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노자》에 “총욕(寵辱)에 항상 두려운 듯이 하라.” 하였다.

 

● 하 표기(何驃騎 : 표기장군(驃騎將軍)을 지낸 하충(何充)을 말한다)의 아우인 하준(何準)은 높은 뜻을 품고 세상을 피했는데, 그 형인 하충이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다섯째’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이것이 어찌 형님의 표기(驃騎)라는 명칭보다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세설신어보》

▶‘다섯째’라는……붙었으니 : 중국에서는 같은 항렬(行列)의 친족 형제간에 나이순으로 ‘첫째’ㆍ‘둘째’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여기서는 하준이 다섯째라는 말이다. 즉 사람들이 ‘하씨네 다섯째’라고 불러주는 것을 표기(驃騎)라는 벼슬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는 것만 못하지 않다는 말이다.

 

● 장목지(張牧之)는 죽계(竹溪)에 은거(隱居)하여 세상과 사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어떤 사람인가를 엿보아, 운치 있고 훌륭한 사람인 경우에만 그를 불러서 자기 배에 태우거나 혹 스스로 배를 저으면서 그와 담소하였다. 속된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 그에 대한 노여움과 비난이 끊일 날이 없었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하씨어림》

 

● 강승연(康僧淵)이 예장(豫章)에 있을 때, 성(城)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정사(精舍)를 세웠다. 그 정사는 여러 봉우리와 긴 내를 끼고 있었는데, 뜰 앞에는 향기로운 수풀이 펼쳐 있고 맑은 시내가 집 주위에 흘렀다. 그는 이곳에 유유히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고 현리(玄理)를 찾아 음미했는데, 유량(庾亮)과 같은 여러 명사들이 많이 그곳에 가서, 그가 토납(吐納 : 도가(道家)의 호흡법(呼吸法))을 운용(運用)하고 풍류(風流)가 도도해지는 것을 구경하였다. 《하씨어림》

 

● 묵지(墨池)는 남창현(南昌縣)에 있는데, 수죽(水竹)이 그윽하고 울창하다. 왕 우군(王右軍)이 임천군(臨川郡)을 맡고 있을 때 매양 이곳을 지나면 그 주위를 맴돌면서 떠나지를 못했는데, 그로 인하여 묵지(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보다 앞서 한(漢) 나라의 매복(梅福)이 꽃나무를 심었는데 못 가운데서 꽃이 피자 탄식하기를,

“생(生)은 나의 괴로움이 되고 몸은 나의 질곡(桎梏)이 되며, 형(形)은 나의 치욕이 되고 아내는 나의 누(累)가 되는구나.”

하고, 드디어 아내를 버리고 홍애산(洪厓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씨어림》

 

● 공순지(孔淳之)는 회계(會稽) 섬현(剡縣)에 살았는데,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다. 매양 노니는 곳에서는 반드시 그 그윽하고 험한 곳까지 다 살펴보았는데, 간혹 10일 만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일찍이 산중에 노닐다가 법숭(法崇)이라는 사문승(沙門僧)을 만나 그와 함께 3년을 머물렀다. 법숭이 감탄하기를,

“내가 인간을 벗어날 생각을 30년이나 하였는데, 이제 이 사람에게 마음이 쏠려서 늙음이 이르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구나.”

하였다. 공순지는 되돌아올 때도 그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하씨어림》

▶사문승(沙門僧) : 출가하여 수행하는 모든 중[僧]을 통틀어 이르는 말.
▶늙음이……정도 : 마음과 정신을 한 일에 몰두하는 것을 말한다. 섭공(葉公)이 자로(子路)에게 “공자(孔子)는 어떤 분인가?”하고 물었으나, 자로는 대답을 못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자로에게 “너는 어째서 ‘그분의 사람됨이 발분망식(發憤忘食 : 어떤 일을 할 때 끼니마저 잊고 힘쓴다는 뜻)하고 즐거움에 근심을 잊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하지 않았느냐.”하였다. 《論語 述而》

 

● 강담(江湛)이 왕경현(王景玄)을 이부랑(吏部郞)으로 천거했더니, 왕경현이 강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엄군평(嚴君平)이 ‘나의 명성을 내는 것은 내 몸을 죽이는 것이다.’ 하였는데, 천작(天爵)은 명성이 없도록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이부랑(吏部郞)이 되겠는가. 그 천거가 비루하다 하겠고 그 하는 일이 정당하지 못하니, 비단 진신(搢紳)들만 그르게 여길 뿐 아니라 복첩(僕妾)들까지도 다 비웃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강담과 절교(絶交)하였다. 10여 년 이상 그 문턱을 넘어선 일이 없었으므로, 담장으로 둘러친 집에는 이끼와 풀이 뜨락을 덮을 정도였다. 《하씨어림》

 

● 장경원(章敬遠)은 지상(志尙)이 평이하고 간솔(簡率)하여 영리(榮利)에 담백하였다. 거처하는 집이 임천(林泉)을 끼고 있고 금서(琴書)를 즐기면서 고고(孤高)하게 지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거사(居士)라고 불렀다. 그때 그의 한가하고 소박함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술을 싣고 그를 따르니, 장경원은 그들을 위해 즐거이 마시고 서로 어울려 싫증을 내지 않았다. 《사문유취(事文類聚)》

 

● 풍영통(馮靈通 : 영통은 풍량(馮亮)의 자)은 본디 산수(山水)를 즐길 뿐 아니라 생각이 몹시 정교(精巧)하였는데, 그가 암림(巖林) 사이에 얽은 집이 거처하고 노닐기에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명성이 퍼졌다. 세조(世祖)가 그 비용을 제공하고 사문승통(沙門僧統)인 승섬(僧暹)ㆍ하남윤(河南尹) 견침(甄琛)과 함께 높은 산의 형승지(形勝地)를 두루 살펴서 한거(閒居)할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가 지은 절은 임천(林泉)이 기이하고 또 건축술도 훌륭하여 산거(山居)의 묘미를 완벽하게 드러냈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왕무공(王無功 : 무공은 왕적(王績)의 자)이 하수(河水) 가에 밭 16경(頃)이 있었는데, 노비(奴婢) 몇 사람에게 기장을 심게 하였다. 그래서 봄ㆍ가을로 술을 빚게 하고, 오리와 기러기를 기르고 약초(藥草)를 모종하여 자공(自供)을 삼았다. 중장자광(仲長子光)이란 은자(隱者)와 함께 복식법(服食法)으로 본성을 길렀으며, 형제(兄弟)가 보고 싶으면 즉시 하수를 건너서 집에 돌아가곤 하였다. 북산 동고(北山東皐)에 노닐었는데, 저서를 짓고는 스스로《동고자(東皐子)》라고 이름붙였다. 《유후당서(劉昫唐書)》

▶경(頃) : 중국 주공(周公)이 처음으로 제정한 농토의 면적 단위. 1경은 약 8천 평(坪).

 

● 무유서(武攸緖)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조카이다. 성품이 담백하고 욕심이 적어 매일 《주역(周易)》과 노장서(老莊書)를 읽으면서 기껍게 지냈다. 용문(龍門)과 소실봉(少室峯) 사이에 은거(隱居)하였으며, 겨울에는 띠와 산초로 집을 짓고 여름에는 석실(石室)에 거처하였다. 만년(晩年)에도 피부에 윤기(潤氣)가 충만하였으며, 눈동자에서 자광(紫光)이 쏟아져 나와 낮에도 별을 볼 수 있었다. 《유후당서》

 

● 이태백(李太白)이 말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선대인(先大人)이 나에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를 읊도록 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마음속으로 사모하였다. 그래서 장성한 뒤에 남쪽으로 운몽(雲夢)을 유람하고 칠택(七澤)의 장관(壯觀)을 보았으며, 안륙(安陸) 지방에서 술로 지내며 10여 년이나 은거하였다.” 《이한림집(李翰林集)》

 

● 원덕수(元德秀)의 호는 노산(魯山)인데, 방관(房琯)이 탄복하기를,

“자지(紫芝 : 원덕수의 호)의 미목(眉目)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에 대한 마음을 모두 사라지게 만든다.”

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행실을 높게 여겼는데, 서권(書卷)은 시렁에 가득했으나 벼슬에서 떠날 때는 짐수레를 타고 갔다. 죽은 뒤에는 오직 침리(枕履)와 단표(簞瓢)뿐이었다. 60평생에 여색(女色)을 가까이한 일이 없었다. 《유후당서》

▶침리(枕履)와 단표(簞瓢) : 베개, 신발, 소쿠리와 표주박.

 

● 장자동(張子同 : 자동은 장지화(張志和)의 자)은 부모의 상(喪)을 마친 뒤에는 다시 벼슬 하지 않고 강호(江湖)에 살면서 연파조도(煙波釣徒)라고 자칭(自稱)하였다. 또《현진자(玄眞子)》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 제목으로 자호(自號)를 삼았다. 그 형인 장학령(張鶴㱓)이 그가 세상을 피해서 은거해 버릴 것을 걱정해서 월주(越州)의 동곽(東郭)에 집을 지어주었는데, 생초(生草)로 이엉을 하고 들보와 서까래는 다듬지 않은 생나무를 썼다. 항상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미끼를 쓰지 않았으니, 그 뜻이 고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皇帝)가 노비(奴婢)를 각각 한 사람씩 내려주었는데, 장지화는 그들을 부부(夫婦)로 짝 지어주고 각각 어동(漁童)과 초청(樵靑)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은사(隱士)인 육우(陸羽)가 묻기를,

“자네와 왕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태허(太虛)가 집이 되고 명월(明月)이 촛불이 되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 일찍이 잠시라도 이별한 일이 없는데, 어찌 왕래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안진경(顔眞卿)이 호주 자사(湖州刺史)가 되었을 때 장지화가 가서 뵈니, 안진경은 그의 배[舟]가 낡아 새는 것을 보고 고쳐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지화가 말하기를,

“제 소원이 바로 부가범택(浮家泛宅)하여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유(李德裕)가 장지화를 칭송하였다.

“은거하고 있으면서도 명성이 있고 현저(顯著)하면서도 무사(無事)하여 궁(窮)한 것도 아니고 달(達)한 것도 아니니, 한(漢)의 엄광(嚴光)에 비길 수 있겠다.” 《유후당서》

▶부가범택(浮家泛宅) : 배를 집으로 삼고 떠다니며 사는 것.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 둘 다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시내.

 

● 이 병부(李兵部 :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낸 이약(李約)을 말한다)는 본디 현기(玄機)를 헤아릴 줄 알아 그 기상이 심원하고 엄숙하였다. 또 덕행(德行)이 높을 뿐 아니라 산수(山水)의 운치(韻致)가 있었으며, 금주(琴酒)와 도덕(道德)이 다 한 시대에 빼어났다.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성품이 다른 사람과 사귀기를 즐겼으나 세속의 이야기를 즐기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싸매고 손님과 축융(蹙融)을 하면 한 달이 금방 지나가곤 하였다. 고기(古器)를 많이 비축하였는데, 호주(湖州)에 있을 때 고철(古鐵) 한 조각을 얻었다. 그것을 치면 소리가 몹시 청아(淸雅)하였다. 또 원숭이를 한 마리 길렀는데 산공(山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항상 그것을 데리고 다녔다. 달밤에 강에 배를 띄우고 금산(金山)에 올라 쇳조각을 두드리고 거문고를 타면 원숭이가 반드시 휘파람으로 화답하였다. 새벽에 이르도록 술잔을 기울이는데 꼭 손님이 있어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씨어림》

▶축융(蹙融) : 공차기 놀이.

 

● 백부(白傅 : 태부(太傅)를 지낸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는 동도(東都)에서 분사(分司)하고 있을 때 나날이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상서(尙書) 노간사(盧簡辭)의 별장이 이수(伊水) 근처에 있었는데, 정자와 누각이 매우 훌륭하였다. 그가 한겨울에 여러 자질(子姪)들을 데리고 그곳에 올라 숭산(嵩山)과 낙수(洛水)를 멀리 조망(眺望)하였는데, 얼마 뒤에 잔 눈송이가 약간 내리자 전에 금릉(金陵)을 진수(鎭守)하던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때 강남(江南)에는 산수가 좋아 매양 그곳 사람과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띄우고 고채(菰采)와 농어로 식사를 하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홀연히 두 사람이 사립을 쓰고 물가를 따라 내려오기에 배를 이끌어 가까이 가보니, 그 배 앞에 푸른 장막이 쳐 있고 그 가운데 백의(白衣)를 입은 사람이 승려와 함께 앉아 있었다. 또 배의 뒷전에는 작은 자라가 있고 구리로 만든 시루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어린 동자가 고기를 삶고 차를 끓이고 있는데 뱃전에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다. 배 안에서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바야흐로 진진하기에, 내가 그들의 고일(高逸)함에 탄복하여 어떤 사람인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백공(白公)이 불광(佛光)이라는 중과 함께 건춘문(建春門)에서 나와 향산정사(香山精舍)로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

 

● 백낙천(白樂天 : 낙천은 백거이(白居易)의 자)이 동도(東都)에 있을 때 이도리(履道里)에 살았다. 그 집에 못이 있어 배를 띄울 만했는데, 백낙천은 매양 빈객(賓客)을 모아 배에 앉히고 수십 수백의 유낭(油囊)에 고기구이를 매달아 물 속에 잠기게 한 뒤에 배를 타고 놀다가 하나씩 그걸 다 먹고 나면 좌우(左右)에서 차례대로 유낭(油囊)을 치운 뒤 연석(筵席)이 끝나면 잔치도구를 도로 물속에 저장해 두었다. 《하씨어림》

 

● 최당신(崔唐臣)은 민중(閩中) 사람인데, 소자용(蘇子容 : 자용은 소송(蘇頌)의 자), 여진숙(呂晉叔)과 동학(同學)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소자용ㆍ여진숙만 과거에 합격하자 최당신은 무연(憮然)히 과거의 뜻을 버렸다. 그 뒤 소ㆍ여 두 사람이 삼관(三館)에 들어가 함께 말을 타고 나와 변수(汴水)의 둑을 따라가다가, 한 선비가 조그마한 배의 창(窓) 아래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바로 최당신이었다. 급히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이별한 뒤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처음에 행랑꾸러미를 뒤집어보니 돈이 천백(千百)은 되기에 그 반으로 이 배를 사서 강호(江湖)를 왕래하며 나머지 반으로 시중에서 잡화(雜貨)를 사서 일용으로 하고 있네. 비록 노를 젓는 대로 쑥대처럼 떠다니고 있지만, 과거를 보아 벼슬을 구하던 때보다 오히려 낫네.”

하였다. 두 사람이 그를 함께 데리고 가려고 하였으나 듣지 않으면서 단지 관직과 거처하는 곳만을 물었다. 다음날 다시 관청에서 나와 보니 최당신이 집에다 명함을 두고 갔으므로 다시 그가 있던 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배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와 그가 두고 간 명함을 살펴보니, 이름 밑에 세서(細書)로 절구 1수(首)가 씌어 있기를,

集仙仙客問生涯 집선전(集仙殿)의 선객이 생애를 물으니

買得漁舟度歲華 어주를 사서 세월을 보낸다네

案有黃庭尊有酒 책상엔 황정경(黃庭經)이 있고 술통엔 술이 있으니

少風波處便爲家 바람 따라 흐르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네

하였다. 《용재수필(容齋隨筆)》

▶집선전(集仙殿) : 집현전(集賢殿)의 별칭(別稱).
▶황정경(黃庭經) : 도가(道家)의 경서(經書).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