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8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1

從心所欲 2021. 8. 25. 07:34

● ‘한(閒)’ 자의 자의(字義)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달[月]이 대문(大門) 안에 들이비치는 것이 바로 한(閒) 자라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문(門) 안에 일(日)을 넣은 간(間) 자와 같이 보아 왔지만, 그 음(音)만은 달리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한가로움이란 저마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두목지(杜牧之)의 시(詩)에,

不是閒人閒不得 한인(閒人)이 아니고야 한가로움을 얻을 수 없으니

願爲閒客此間行 이 몸이 한객(閒客) 되어 이 속에 놀고파라

하였다.

 

이에 오흥(吳興 :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포성현(浦城縣))에 한정(閒亭)을 건립하였다. 나는 본시 한가로움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가로운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여 시(詩)를 짓고 술[酒]을 마련하거나 꽃나무를 가꾸고 새[禽]들을 길들이는 데에 무척이나 바쁘다. 옛날 한치요(韓致堯 : 한악(韓偓)의 자)의 시에,

畫墻暗記移花日 벽화 그리며 꽃모종할 날짜 내심 기억하며

洗甕先知醞酒期 술독 씻으며 술 빚을 기회 먼저 짐작하네.

須信閒人有忙事 한인에게도 바쁜 일 있다는 걸 알아다오

早來衝雨覓漁師 아침 일찍 비 맞으며 어부를 찾아가네.

하였으니, 옥산초인(玉山樵人 : 한악(韓偓)의 호)이야말로 나와 뜻이 같은 자라 하겠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옛적에 주무숙(周茂叔 : 무숙은 송(宋) 주돈이(周敦頤)의 자)이 이정 선생(二程先生 : 정호(程顥)ㆍ정이(程頤))에게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기던 곳과 그들이 즐기던 것이 무엇이겠는가 찾아보라.’ 하였는데, 백자(伯子 : 정호)가 마침내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돌아오는 경지와 ‘내가 점(點)을 허여(許與)한다.’한 의취를 얻었으니, 주무숙의 이 공안(公案)은 마치 활줄을 당기기만 하고 쏘지는 않은 것과 같은 가르침이다. 나는 이 속의 의취를 오직 소요부(邵堯夫 : 요부는 송(宋) 소옹(邵雍)의 자)만이 가장 절실히 음미했다고 본다. 그의 《격양시집(擊壤詩集)》에,

世間無事樂 세간에 다른 낙 없고 무사한 낙 가진 사람은

都恐屬閒人 다만 이 한인뿐인가 하노라

하였고, 또,

料得閒中樂 생각건대 이 속의 낙은

無如我得全 나처럼 독차지한 이 없네.

하였으니, 그는 뜬구름과 같은 부귀(富貴)와 담박한 단사표음(簞食瓢飮 : 한 도시락밥과 한 표주박의 물. 즉 한사(寒士)의 살림을 말함)을 어떻게 보았던가. 대개 한(閒)은 구차스럽게 편안한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적(適)은 제멋대로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천성이 맑고 깨끗하여 조그마한 티끌조차 머물러 있지 않을 경우, 우주를 쳐다보고 굽어봄에 어디를 간들 나의 즐거운 곳이 아니겠는가. 그가 병이 위중하여 임종에 가까웠을 때 대뜸 ‘시험 삼아 죽어보자[試與觀化].’ 하였다. 이 말은 물론 해학(諧謔)이지만 그는 잠시 후에 운명하였다. 이는 죽고 사는 변화를 마치 아침이 지나고 저녁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는 참으로 천고(千古)의 풍류인다운 호걸이었다. 《지비록(知非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돌아오는 경지 : 《논어》 선진(先進)에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겠다.”는 증점(曾點)의 말을 인용하여 ‘옆에 있는 사람은 내 마음 낙(樂)을 알지 못하네’라고 한 북송 유학자 정호(程顥)의 경지를 이름.

 

● 극초(郄超)가, 뜻이 고상하여 은거(隱居)에 유의한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매번 선뜻 백만의 자금과 거기다 거처할 집까지 마련해 주곤 하였는데, 대안도(戴安道 : 안도는 진(晉) 나라 대규(戴逵)의 자)를 위하여 섬계(剡溪)에 매우 정제(整齊)한 집을 지어 주었다. 경력(慶曆) 연간에는 강절(康節 : 소옹(邵雍)의 시호)이 낙양(洛陽)을 지나다가 산천(山川)과 풍속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이내 거기에 머물러 살 뜻을 두자, 가우(嘉祐) 7년(1062)에 왕선휘(王宣徽)가 낙양윤(洛陽尹)으로서 천궁사(天宮寺) 서쪽,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있는 오대(五代) 시대의 절도사(節度使) 안심기(安審琦)의 옛터인 곽숭도(郭崇韜)의 고리(故里)에 3칸의 집을 지어 강절을 이거(移居)시켰다. 또 부 한공(富韓公 : 한공은 송(宋) 부필(富弼)의 봉호)이 문객(門客) 맹약(孟約)을 시켜서 그 집 맞은편에 하나의 동산을 강절에게 사주었는데, 역시 수석(水石)과 화목(花木)이 매우 아름다웠다. 나의 의취야 감히 선철(先哲)에 미칠 수 없건만, 육평천(陸平泉 : 평천은 명(明) 나라 육수성(陸樹聲)의 호) 선생과 포우명(包羽明)ㆍ동현재(董玄宰 : 현재는 명(明) 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자) 등이 나를 위하여 각기 자금을 내어 소곤산(小崑山) 북편에 독서대(讀書臺)를 건립하였는데, 구학(丘壑)들이 봉묘(峯泖)의 압주(押主)가 되어 있으므로 내빈(來賓)들이 자못 절경(絶景)이라 일컬었다. 이에 내가 임강선(臨江仙)이란 사(詞) 하나를 짓기를,

婉孌北山松樹下 아름다운 북산 소나무 아래엔

石根結箇巖阿 바위들이 돌뿌리에 결집되었는데

巧藏精舍恰無多 한 채의 정사 교묘히 세워졌네.

尙餘簷隙地 그래도 처마 밑에 남은 땅 있어

種竹與栽梧 대나무 오동나무를 심어 놓고

高臥不須愁客至客來 한가로이 지내다가 손들이 찾아오면

野筍山蔬一瓢濁酒儘能沽 죽순나물 산나물에 탁주를 나눌 제

倦時呼鶴舞 피로해지면 학을 불러 춤추게 하고

醉後倩僧扶 취한 뒤에는 중 시켜 부축케 하네.

하였다. 《암서유사(巖棲幽事)》

 

● 백낙천(白樂天 : 낙천은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자)은,

“내가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산(廬山)에서 노닐다 동서편 숲 사이에 있는 향로봉(香爐峯) 아래 이르러 주위를 살펴보니, 운수(雲水)와 천석(泉石)이 너무도 절경이라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이에 초당(草堂) 한 채를 지었다. 앞에는 큰 소나무 10여 그루와 대나무 1천여 그루가 있는가 하면, 푸르른 댕댕이는 장원(牆垣)이 되고, 하얀 돌은 교도(橋道)가 되었으며, 흐르는 물은 초당 아래를 둘렀고 뿜어 나오는 샘물은 처마 위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푸르른 버드나무와 하얀 연(蓮)이 못과 언덕에 즐비하였다. 대저 이곳의 경치가 이처럼 절경이므로 매번 혼자 찾아가서 10여 일씩 지내곤 한다. 나의 한평생 좋아하는 바가 다 여기에 있으니, 돌아오기를 잊을 뿐 아니라 일생을 그냥 거기서 마칠 수도 있다.”

하였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 원윤(袁尹 : 진(晉) 원굉(袁宏))이 임지(任地)에 있을 때 시주(詩酒)로써 자적(自適)하고 세무(世務)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여 매번 채찍을 지팡이로 하고 밖에 나가 노닐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유연(悠然)히 돌아오기를 잊곤 하였다. 마침 본군(本郡) 남쪽 어느 집에 아름다운 대나무와 돌이 있었는데, 원윤이 선뜻 보행(步行)으로 찾아가서 주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곧장 대나무 밭으로 들어가 소리를 높여 마음껏 노래하였다. 이에 주인이 듣고 나와서 간곡한 담소(談笑)를 나누는 사이에 거기(車騎)와 의장(儀仗)이 들이닥치므로 그제야 주인이 그가 원윤임을 알았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왕일소(王逸少 : 일소는 진(晉) 왕희지(王羲之)의 자)가 말하였다.

“지난번 동유(東遊)에서 돌아와 뽕나무를 심었더니, 그 지엽(枝葉)이 한창 무성하게 자랐다. 이에 여러 아들과 손자들을 거느리고 거기 가서 노니는 사이에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즐기었다. 당면한 의식(衣食) 문제만 해결한 이외에는 가끔 친지들과 함께 모여서 마시고 즐겼으면 좋겠다. 물론 흥겨운 토론과 고상한 읊조림으로 잔을 가득 채워 마시는 놀이라 할 수는 없으나 전가(田家)의 행사를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손뼉을 치면서 즐기는 자료가 될 것이니, 그 마음에 드는 낙(樂)을 어찌 다 말하랴.” 《소창청기(小窓淸記)》

 

● 백거이(白居易)가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아무리 1~2일 간 머물러 있게 되더라도 흙을 져다가 대(臺)를 만들고 돌을 모아 산(山)을 만들고 물을 막아 못을 만들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여산(廬山)이 신령스럽고 절승(絶勝)의 경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마침내 나의 좋아하는 바를 얻게 되었으니, 내가 앞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 왼손으로는 처자(妻子)를 이끌고 오른손으로는 거문고와 책을 안은 채 여산으로 가서 만년(晩年)을 보내어 나의 평생소원을 이루고야 말겠다. 여산의 맑은 샘과 하얀 돌도 나의 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소창청기》

 

● 사마온공(司馬溫公 : 온공은 송(宋)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이 말하였다.

“정신과 육체가 피로할 적에는 낚싯대를 던져 고기를 낚거나 옷자락을 잡고 약을 캐거나 개천 물을 돌려 꽃밭에 물을 대거나 도끼를 들어 대나무를 쪼개거나 더위를 식히거나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거나 이리저리 한가로이 거닐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거나 하면 좋다. 그때 밝은 달이 제때에 떠오르고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면 움직이고 멈추는 데 구애가 없어 나의 이목폐장(耳目肺腸)이 모두 나의 자유가 되므로 마냥 고상하고 활발하기만 하여, 이 하늘과 땅 사이에 또다시 어느 낙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줄도 알지 못하게 된다.” 《소창청기》

 

● 왕 형공(王荊公 : 형공은 송(宋)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이 만년에 종산(鍾山) 사공돈(謝公墩)에서 살았는데, 그 지점이 종산과 주성(州城)의 중간에 있으므로 이름을 반산정(半山亭)이라 하고는, 매일 아침 식사가 끝나면 으레 집에서 기르는 나귀를 타고 종산에 가서 산간(山間)을 거닐었고, 피로해지면 즉시 수림(樹林) 사이에 앉아 졸다가 가끔 해가 져서야 돌아왔으며, 혹 종산까지 도착하지 못할 경우에는 중도에서 나귀를 몰아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이 같은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소창청기》

 

● 또 소자첨(蘇子瞻 : 자첨은 송(宋) 소식(蘇軾)의 자)은 황주(黃州)와 영외(嶺外)에 있을 때 매일 일찍 일어나서 객(客)들을 불러들여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으레 자신이 객들을 찾아가서 이야기하였고, 그와 종유(從遊)하는 자들도 말을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해학(諧謔)하여 마음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또 이야기를 못하는 자에게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억지로 시키다가 혹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에는 그런 거짓말은 그만두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허리를 잡고 웃어대면서 마음껏 즐긴 뒤에야 헤어지곤 하였다 한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소옹(邵雍)이 그 거처를 안락와(安樂窩), 자호(自號)를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하고는, 매일 아침에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았다가 신시(申時)가 되면 3~4잔의 술을 마시되, 얼근해지면 그만두어 한 번도 만취한 적이 없었고 흥이 날 적에는 대뜸 시를 지어 읊조렸으며, 춘추(春秋)에는 가끔 성중(城中)에 나가 노닐었고 비바람이 있을 적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밖에 나갈 적에는 조그마한 수레를 이용하여 한 사람을 시켜 끌도록 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즐기었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도 그의 수레 소리를 듣고 앞을 다투어 맞이하여, 어린아이와 하인들이 서로 우리집에 선생이 왔다고 하였다. 그는 덕기(德氣)가 수연(粹然)하여 바라보는 사람마다 그 어짊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들과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여럿이 담소(談笑)하는데 종일토록 남다른 행동이 없었고 남들과 만나서 그 선(善)은 칭찬하고 악(惡)은 숨겨 주었으며, 학(學)을 묻는 자가 있으면 열심히 대답해 주었고, 신분의 귀천(貴賤)과 나이의 소장(少長)도 없이 모든 것을 정성으로 대하므로, 어진이는 그 덕행을 좋아하고 불초한 자도 그 교화에 복종하였다. 사후에 강절(康節)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겸재 정선 <화외소거(花外小車)>, 1755년 作, 지본수묵, 26.5 × 20.5cm, K-auction ㅣ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북송을 대표하는 ‘육현(六賢)’으로 불렸던 소옹(邵雍, 1011 ~ 1077)이 작은 수레를 타고 꽃구경을 다니던 일을 소재로 한 그림. 정선의 80세 작품이라고 위창(葦滄) 오세창이 제(題)했다.]

 

● 손방(孫昉)의 호는 사휴거사(四休居士)인데, 산곡(山谷 : 황정견(黃庭堅)의 호)이 그 호의 뜻을 묻자, 웃으면서,

“거친 음식을 먹어도 배만 부르면 그만이고, 누더기 옷을 입어도 몸만 따뜻하면 그만이고, 어느 정도 평온하게 지낼 만하면 그만이고, 탐욕과 질투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이다.”

하므로, 산곡이 말하였다.

“이것이 곧 안락법(安樂法)이다. 대저 욕심이 적은 것은 불벌(不伐)의 집이 되고, 만족함을 아는 것은 극락(極樂)의 나라가 된다.”

사휴거사의 집에 3묘(畝)의 동산이 있어 화목(花木)이 무성한데, 손이 찾아오면 차를 달이고 술을 내놓고는, 인간의 기쁜 일들을 서로 담론(談論)하다가 차와 술이 식어버리는 것도 주객(主客)이 모두 모르고는 하였다. 《옥호빙(玉壺氷)》

 

● 황진(黃溍)이 말하였다.

“마음이 혼탁하지 않은 것을 ‘청(淸)’이라 하고,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은(隱)’이라 하는데, 나는 노자(老子)의 법을 배운 사람이다. 아침ㆍ저녁에 기장[黃粱]밥 한 그릇과 거여목[苜蓿]국 한 사발이면 그대로 쾌적하고도 편안하게 여기며, 학창의(鶴氅衣) 차림에 《황정경(黃庭經)》을 들고 소연(翛然)히 앉았으면 제아무리 9구(衢) 12맥(陌)의 자욱한 티끌도 나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찌 청(淸)이 아니겠는가. 이름이 명리(名利)의 장중(場中)에 들지 않고 마음이 영욕(榮辱)의 경내(境內)에 예속되지 아니하여 들어와서는 연하(煙霞)와 함께 지내고 나가서는 어초(漁樵)와 함께 노닌다면 이 어찌 은(隱)이 아니겠는가.” 《지비록(知非錄)》

▶9구(衢) 12맥(陌) : 9개의 갈림길과 12개의 길. 복잡한 세속을 가리킴.

 

● 경야자(耕野子)가 말하였다.

“산이 깊어 숲이 무성하고 못이 기름져 고기가 살쪘으며, 송아지가 언덕에서 조는가 하면 죽림(竹林)이 그윽하고 계곡이 깊다. 이에 초동(樵童)은 숲에서, 어부(漁父)는 못에서 노래를 부르고 목수(牧叟)는 언덕에서 저[笛]를 불며, 야인(野人)은 계곡을 찾고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하는가 하면, 배부르게 먹고 격양가(擊壤歌)를 불러 풍년을 축하한다. 나는 고금(古琴) 1대와 도서(圖書) 1권에 필낭(筆囊)을 메고 술병을 휴대한 다음 마음 내키는 대로 거닐다가 느낌이 있을 적에는 흔연히 시구(詩句)를 얻어내고 흥이 나서 술을 마실 적에는 가고 머무는 것을 마음 쓰지 않는다. 지친 새들이 나무를 찾아들고, 흘러가는 구름이 동학(洞壑)에 멈추고, 해가 서산에 기울고 달이 띳집에 떠올라 사벽(四壁)이 조용하고 온 창문이 환해질 적에 취흥을 타고 돌아오면서 자재경(自在境)을 읊조리고 희황(羲皇)의 자리에 누워서 무하향(無何鄕)을 노닐면 마침내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 그 여부조차도 알지 못하게 된다.” 《지비록》

▶무하향(無何鄕) : 《장자(莊子)》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이란 의미.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 행해질 때 도래하는, 생사와 시비가 없으며 지식도, 마음도, 하는 것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이나 마음의 상태.

 

● 서면(徐勉)이 말하였다.

“해가 비추는 겨울날이나 해가 가려진 여름날, 그리고 좋은 계절에 경치가 아름다울 때 지팡이에 나막신을 신고 밖에 나가 거닐면서 스스로 즐기는 한편, 못가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숲 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탁주 한 잔과 거문고 한 곡조로 몇 시간의 낙을 즐기다보면 일생 동안 거의 이대로 지낼 수 있다.” 《지비록》

 

● 연숙견(延叔堅 : 후한(後漢) 때 연독(延篤)의 자)은,

“내가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객당(客堂)에 앉았다가 아침이 되면 희황(羲皇)의 《역경(易經)》 순우(舜禹)의 전모(典謨)를 외고 주공(周公)의 전례(典禮)와 중니(仲尼)의 《춘추(春秋)》를 읽으며, 저녁이 되면 안마당 층계에서 한가로이 거닐고 남쪽 난간에서 시를 읊조리다가 틈을 타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을 열람하노라면 귀에 쟁쟁하고 눈이 황홀한 그 혼자만의 낙이 푸짐하고 흐뭇하니, 이 경지의 낙이야말로 하늘이 덮여 있는 것과 땅이 실려 있는 것도 분간할 수 없고 세상에 사람이 있는 것과 나에게 육체가 있는 것도 분간할 수 없다.”

하였다. 《저기실(楮記室)》

 

● 오초려(吳草廬 : 초려는 원(元) 오징(吳澄)의 호)가 말하였다.

“다만 바라는 바는, 동이에 술이 비지 않고 부엌에 연기가 끊이지 않으며, 띳집이 새지 않고 포의(布衣)를 늘 입을 수 있으며, 숲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낚을 수만 있으면 영화도 욕됨도 없이 그 낙이 도도(陶陶)할 것이다. 이만하면 일생이 만족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철경록(輟耕錄)》

 

● 방손지(方遜志 : 손지는 명(明) 방효유(方孝孺)의 재호(齎號))가 말하였다.

“흙벽[土壁]에 띠처마[茅簷]와 깨진 항아리 주둥이로 만든 창문[甕牖]에 새끼로 단 지도리[繩樞]와 조그마한 침상에 거적문으로 겨우 몸을 용납하는 곳에서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요, 칡베 옷에 갈대 띠[葦帶]와 마른밥에 나물국 등 거칠고 담박한 것으로 겨우 기한(飢寒)을 해결하여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요,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본래의 소질대로 하되, 바른 행동과 바른 기색(氣色)으로 지내며 남에게 요구하는 바도 없고 사물(事物)과 어긋나는 바도 없이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요, 말은 그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글은 그저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함으로써 사리만을 따라서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다.” 《정학집(正學集)》

 

● 오강재(吳康齋 : 강재는 명(明) 오여필(吳與弼)의 호)가 말하였다.

“남쪽 난간에서 《맹자》를 읽을 적에는 사람들의 아침에 발로되는 청명(淸明)한 기(氣)에 대해 논한 말을 매우 좋아하여 조금도 요탈(擾奪)됨이 없으며, 짙은 녹음과 활짝 갠 대낮에 훈풍(薰風)이 슬슬 불어오고 산림(山林)이 조용할 적에는 천지(天地)가 저절로 넓어지고 일월(日月)이 저절로 한량없는 듯하다. 소요부(邵堯夫)의 ‘마음이 조용해야만 환한 해를 알 수 있고 눈이 밝아야만 푸른 하늘을 알 수 있다.[心靜方能知白日 眼明始會識靑天]’라고 한 뜻을 여기서 증험할 수 있다.” 《지비록》

 

● 진백사(陳白沙 : 백사는 명(明) 진헌장(陳獻章)의 호)가 말하였다.

“그 환경이 마음과 융화되고 그 기회가 뜻과 일치되어 흔연히 쾌적해지고 태연히 편안해지면 물아(物我)를 서로 잊게 될 것이니, 생사(生死)가 어찌 서로 간섭할 수 있으랴. 여기에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함으로써 영대(靈臺)가 허명(虛明)해지면 조금의 티끌도 전염되지 않고 부화(浮華)가 일체 제거되어 그 진실을 얻을 것이요, 비파를 치고 거문고를 퉁기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사이에 기(氣)가 봄바람에 융화되고 마음이 태고(太古) 시대에 노닌다면 그 자득(自得)의 낙 또한 그지없을 것이다.” 《지비록》

 

● 나일봉(羅一峯 : 일봉은 명(明) 나륜(羅倫)의 호)은,

“국화를 불러 붕(朋 : 친구)을 삼고 소나무를 사귀어 우(友 : 동지(同志)를 뜻함)를 삼고 미록(麋鹿)과 어울려 한 떼가 되면 정무(庭廡)와 궤석(几席) 사이에 산(山)은 그 기이함을, 달[月]은 그 깨끗함을, 연하(煙霞)는 그 변환(變幻)을 보여주어, 온 천지가 다 제각기의 장점을 나에게 보여줄 것이다.”

하였다. 《지비록》

 

● 유남원(劉南垣 : 남원은 명(明) 유인(劉麟)의 호)이 말하였다.

“요즈음 내가 줄곧 한가로운 것만 탐하여 졸지도 않고 손님도 받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필연(筆硯)도 대하지 않고는, 규화(葵花)를 꺾고 근화(槿花)를 구경하다가 혹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물을 구경하는 것으로 우유(優遊)와 쾌락을 삼을 뿐인데, 공(公)이 어찌 가영(歌詠)하는 일로써 나를 수고롭게 하려 하는가. 가영이란 실속도 없고 전수할 가치도 없는 것이요, 또한 가영은 안개나 구름을 따라 흩어져 버리는 것인데, 어찌 세속과 어울려 고뇌스러운 생활을 하겠는가.” 《지비록》

▶가영(歌詠) : 부처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 축석림(祝石林)이 말하였다.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은 나이가 들수록 지모(智謀)만 깊어지는 데 있다. 대저 석화(石火)는 금방 꺼져버리고 황하수(黃河水)는 수백 년 만에 한 번씩 맑아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살려 하거나 세속을 떠나려 하거나간에 모름지기 조화(造化)의 기미[機]를 알고 멈춤으로써 조화와 맞서 권한을 다투려 하지 말고 조화의 권한은 조화에게 돌려주고, 아손(兒孫)을 위해서는 복(福)을 심어 아손의 복은 아손에게 물려준 뒤에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에 몸을 맡기고 목전의 청정(淸淨)한 일에 유의할 것이다. 꽃을 찾고 달을 묻는 데 두셋이 동반하고, 차[茶] 달이고 향 피우는 데 거동이 단아(端雅)하며, 모임에는 약속이 필요 없고, 의식에는 겉치레가 필요 없고, 시(詩)에는 기교가 필요 없고, 바둑에는 승부가 필요 없으며, 모든 일이 날로 감소되기를 구하고, 이 마음이 하늘과 함께 노닐도록 하여 경신(庚申 : 나이)도 기억하지 못하고 갑자(甲子 : 연조)도 망각해 버린다면 이 또한 진세(塵世)의 선경(仙境)이요 진단(震旦)의 정토(淨土)이다.” 《지비록》

 

● 막운경(莫雲卿 : 운경은 명(明) 막시룡(莫是龍)의 자)은,

“내가 일찍이 산 속에서 승방(僧房)을 빌려 혼자 거처할 적에 매번 임만(林巒)이 막 개고 새 소리가 요란하고 암비(巖扉)가 환해지고 운산(雲山)이 눈앞에 흔들리는 듯하는 사이에 산초(山椒)가 걷히고 자취(紫翠)가 머리맡에 와서 떨어지는 듯하곤 하므로, 마치 금방 신선이라도 된 듯이 이 몸과 이 세상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였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 당자서(唐子西 : 자서는 송(宋) 당경(唐庚)의 자)의 시에,

山靜似太古 산이 조용하니 태고 시대와 같고

日長如少年 해가 기니 소년 시절과 같네.

라고 하였다.

 

나의 집이 산 속에 있으므로 매년 늦은 봄, 초여름이 되면 층계에는 푸른 이끼가, 오솔길에는 떨어진 꽃만 가득할 뿐, 문 밖에 찾아오는 이가 없는가 하면 소나무 그림자가 여기저기 어지럽고 새소리가 위아래서 우짖는다. 이에 낮잠을 즐기다가 샘물을 긷고 삭정이를 주워 차를 달이어 마음 내키는 대로 마신 뒤에 《주역》ㆍ국풍(國風 : 《시경(詩經)》)ㆍ《좌전(左傳)》ㆍ이소(離騷 : 《초사(楚辭)》의 편명)와 태사공(太史公 :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글, 도두(陶杜 : 도잠(陶潛)ㆍ두보(杜甫))의 시, 한소(韓蘇 :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의 문장 몇 편씩을 읽다가 조용히 산길을 거닐면서 송죽(松竹)을 어루만지며, 사슴 새끼나 송아지와 어울려 수풀에서 뒹굴다가 흐르는 시냇물을 희롱하면서 이를 닦고 발을 씻는다.

이어 발길을 돌려 죽창(竹窓)에 이르러서는 아내와 어린애가 마련해 놓은 죽순나물, 고사리나물에 보리밥을 흔연히 배불리 먹은 뒤에 죽창 아래 앉아 붓을 놀려 크고 작은 글씨 수십 자를 쓰고는, 소장된 필첩(筆帖)과 화축(畫軸)을 펼쳐 마음껏 감상한다. 흥이 날 적에는 소시(小詩 : 단편시를 말함)를 읊고《학림옥로(鶴林玉露)》한두 대문을 쓰고는, 다시 차를 달이어 한 잔 마신 뒤에 시냇가를 거니는 사이에 우연히 원옹(園翁)과 계우(溪友)들을 만나서 상마(桑麻)의 사정을 묻고 갱도(秔稻)의 작황을 이야기하고 우청(雨晴)을 헤아리고 절서(節序)를 세면서 농담을 실컷 주고받다가 지팡이를 짚고 사립문 앞에 당도하면 서산에 지는 해가 만상(萬狀)으로 달라지고 경각(頃刻)으로 변환(變幻)하여 사람의 눈을 황홀케 하는가 하면, 목동(牧童)은 저[笛]를 불며 두셋씩 짝지어 돌아오고 달은 전면 시냇물에 비친다.

그러면 당자서의 이 시구를 음미해 보면 참으로 절묘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 시구가 아무리 절묘하다 한들 그 절묘함을 아는 자는 대개 적다. 저 사냥개와 매를 데리고 명리(名利)의 장중(場中)에서 사냥이나 하는 자들이야 말머리의 티끌 속에 파묻혀 헛되이 세월만 보낼 뿐이니, 어찌 이 시구의 절묘함을 알겠는가.

사람이 진정 이 절묘함을 안다면 소동파(蘇東坡)의,

無事此靜坐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앉았으면

一日是兩日 하루에 이틀의 실효 있으니

若活七十年 만약 칠십 년을 산다면

便是百四十 일백사십 년을 사는 셈이 되리.

라고 한 시와 같이 될 것이니, 그 소득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학림옥로(鶴林玉露)》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