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초(楚) 나라 영윤(令尹)인 우구자(虞丘子)가 장왕(莊王)에게 아뢰기를,
“신이 영윤으로 있은 지가 10년입니다. 그런데도 나라가 더 잘 다스려지지도 않았고 옥송(獄訟)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어진 이들의 진로(進路)를 막았고, 지위만 차지하고서 봉록(俸祿)을 받아먹었습니다. 이는 끝없이 탐욕을 부린 것이니, 신의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신이 사적(私的)으로 숙손오(叔孫敖)란 국사(國士)를 천거합니다. 그는 몸이 약하지만 재능이 많고 성품도 욕심이 전혀 없습니다. 왕께서 그를 기용하여 정사(政事)를 맡기신다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녹위(祿位)를 고수하는 것은 탐욕이요, 어진 이를 추천하지 않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요, 지위를 양보하지 않는 것은 청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잘 시행하지 못하면 이는 불충(不忠)입니다. 임금에게 충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충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사직(辭職)합니다.”
하니, 장왕(莊王)이 허락했다. 그리고 우구자에게 채지(采地, 그 고을의 조세(租稅)를 받아 개인이 쓰도록 하는 것) 3백 호(戶)를 내리고 국로(國老)라 불렀다. 《패사휘편(稗史彙編)》
● 예로부터 호걸(豪傑)들은 나라를 위해 공업(功業)을 세우고 변난(變難)을 안정시켜 왔다. 그러나 대체로 공업을 세우는 데에 의도를 두지 않고 하는 것이 고상한 것이다.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때의 인물들이야 으레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이후로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범여(范蠡)는 월(越) 나라를 패제후(霸諸侯)로 만들고 나서 조각배 타고 오호(五湖)로 떠나갔고, 장자방(張子房 : 장량(張良)의 자)은 진(秦) 나라와 항우(項羽)를 무너뜨리고 나서 적송자(赤松子 : 전설상의 신선)를 따라 표연히 떠나갔으니, 이들은 모두 진한 시대(秦漢時代)의 인물들 가운데에서 월등한 데가 있는 이들이라 하겠다.
좌태충(左太冲)은 이런 시를 지었다.
功成不受賞 공(功) 이루고 상 받지 않은 채
長揖歸田廬 예(禮) 올리고 전야로 돌아갔네.
이태백(李太白)은 이런 시를 지었다.
事了拂衣去 일마치고 분연히 떠나가
深藏身與名 몸과 이름 깊이 감췄네.
이 시를 보아도 그들의 사람됨을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다. 《패사휘편》
● 범여(范蠡)가 월(越) 나라를 떠난 뒤로는 다시 한 일이 없는데도 황동발(黃東發 : 동발은 황진(黃震)의 자)은,
“범여가 공(功)을 이루고 물러간 다음 제(齊) 나라와 초(楚) 나라로 옮겨 다니면서 다시 천하에 그 이름을 드러냈으니, 그의 재주와 식견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했다. 그때 그가 재산을 일으켜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산림(山林)에 들어가 은거했다면, 참으로 도(道)가 있는 선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5백 년 간을 통해 끝까지 공명(功名)을 지킨 사람은 범여 한 사람뿐이다.”
했다.
장맹담(張孟談)도 조양자(趙襄子)를 위하여 지백(智伯)을 멸망시킨 뒤 벼슬을 버리고 부친(負親 : 지명(地名))의 마을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았으니, 배 타고 오호(五湖)로 떠나간 범여와 풍도가 같다 하겠다. 《금뢰자(金罍子)》
● 안촉(顔斶)이 제 선왕(齊宣王)을 뵈니, 선왕이,
“안 선생(顔先生)이 과인과 같이 있어 준다면, 음식은 반드시 태뢰(太牢 : 소ㆍ양ㆍ돼지를 갖춘 성대한 음식상)로 대접하고 출타할 때는 반드시 수레를 타도록 하고 처자(妻子)에게는 아름다운 옷을 제공하겠소.”
하니, 안촉이 사양하고 떠나면서 아뢰기를,
“대저 박옥(璞玉)은 산에서 나는 것인데 다듬자면 깨뜨려야 하니, 다듬어 놓은 옥이 보배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박옥 본연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선비가 초야에 태어나 추천받아 기용되면 녹(祿)을 받게 되니, 존대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본디의 형신(形神)은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전리로 돌아가, 때가지나 식사하면 거친 음식도 고기 맛이고 천천히 자유스럽게 거닐면 수레 탄 것보다 낫고 아무런 죄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귀(貴)한 것이니, 청정(淸貞)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즐기고 싶습니다. 원컨대, 신의 봉읍(封邑)과 가옥을 회수하시고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하고는 두 번 절한 다음 떠나갔다.
군자(君子)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안촉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청정(淸正)으로 돌아가고 박옥의 원 모습으로 돌아가면, 평생토록 일신이 욕되지 않는 것이다.” 《전국책(戰國策)》
● 장자방(張子房)은 말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한(韓) 나라의 정승을 지내왔다. 한 나라가 멸망하자 만금(萬金)의 돈을 아끼지 않고 한 나라를 위해 막강한 진(秦) 나라에 보복을 가했다. 그리하여 온 천하가 발칵 뒤집혔었다.
이제 세 치 혀를 놀려 황제(皇帝)의 스승이 되고 봉읍(封邑)이 만호(萬戶)이고 지위가 열후(列侯)에 올랐다. 이는 일개 평민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것이며, 따라서 나에게도 더없이 만족한 일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뿐이다." 《사기유후세가(史記留侯世家)》
● 태부(太傅) 소광(疏廣)이 소부(少傅) 소수(疏受 : 소광의 조카)에게,
“나는 듣건대 만족할 줄 알면 욕(辱)을 면할 수 있고 중지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한다. 이제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렀으니, 지위와 명예를 이룬 것이다. 이때 떠나지 않으면 후회(後悔)가 있을까 염려스럽다.”
하고, 숙질(叔姪)이 함께 상소(上疏)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길 청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황금(黃金) 20근을 하사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그 황금을 팔아 잔치를 베풀고 친척ㆍ친구ㆍ빈객들을 초청하여 서로 즐겁게 놀았다. 어떤 사람이 소광에게 그 황금으로 자손을 위해 산업(産業)의 기본을 많이 장만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더니, 소광이,
“내가 늙은 몸으로 어찌 자손 생각을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있는 전지만 가지고도 자손들이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의식(衣食)을 남과 같이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전지를 더 사줌으로써 남아도는 재물이 있게 되면, 이는 자손들에게 게으름만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어질면서 재물이 많으면 자신의 뜻을 손상하게 되고 어리석으면서 재물이 많으면 자신의 허물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또 부자라는 것은 사람들의 원망을 받기 마련이다. 내가 이미 자손들을 교화(敎化)시키지 못했는데, 자손들에게 허물을 더하게 하고 또 남의 원망까지 받게 하고 싶지 않다.”
하니, 친척들이 열복(悅服)했다. 《한서소광전(漢書疏廣傳)》
▶태부(太傅), 소부(少傅) :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는 주(周)나라 때 가장 높은 세 가지 벼슬을 가리키는 삼공(三公)이고,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의 세 가지 벼슬은 삼소 (三少) 또는 삼고(三孤)라 하여 삼공 다음가는 벼슬이었다. |
● 사등(汜騰)이 천하에 병란(兵亂)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군수(郡守)가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 사등은 일찍이 말하기를,
“살다가 난세(亂世)를 만나면 귀한 처지라도 능히 빈천할 수 있어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고는, 가재(家財)를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채소밭이나 가꾸고 책을 읽으면서 담담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
자사(刺史) 장비(張閟)가 불러서 부(府)의 사마(司馬)를 삼으려 했으나 사양하면서,
“문을 한번 닫았으면 그만이지 다시 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상고하건대, 마 복파(馬伏波 :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가,
“부귀한 다음 다시 빈천해질 수 있어야 한다.”
했는데, 사등이 ‘귀한 처지라도 능히 빈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뜻이 같다. 《금뢰자》
● 전예(田豫)가 위(魏) 나라에 벼슬하여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승진되었다. 여러 번 사직(辭職)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나이 70세에도 직위에 있는 것은 비교하자면 통행금지 시간이 넘었는데도 쉬지 않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죄인인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병을 핑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제왕 경(齊王冏)이 장한(張翰)을 불러 동조연(東曹掾)에 임명하니, 장한이 같은 고을 사람 고영(顧榮)에게,
“천하의 혼란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저 사해(四海)에 이름이 난 사람은 물러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본디 산림(山林)에 살던 사람이라서 당세(當世)에 아무런 기대가 없은지 오랩니다. 그대는 일이 있기 전에 현명하게 방지하고 일이 있은 뒤에 슬기롭게 조처하시오.”
하니, 고영이 장한의 손을 잡고 창연히,
“나도 그대와 함께 남산(南山)의 고사리를 캐고 삼강(三江)의 물을 마시겠습니다.” 했다.
장한이 낙양(洛陽)에 있을 적에 마침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인하여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났다. 그래서,
“인생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귀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벼슬에 얽매여 수천 리 밖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명작(名爵)을 추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산의 고사리와 삼강의 물과 오중의 순채국ㆍ농어회는 산림(山林)의 청아한 풍미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진(晉) 나라 도잠(陶潛 : 도연명(陶淵明))이 팽택영(彭澤令)으로 부임한 지 80여일 만에 군(郡)에서 독우(督郵 : 지방감찰관)를 파견했다. 독우가 도착하자 아전들이,
“응당 정장을 하고 독우를 뵈어야 합니다.”
하니, 도잠이 탄식하면서,
“내가 어떻게 오두미(五斗米 : 얼마 안 되는 봉록) 때문에 향리(鄕里)의 소아(小兒 : 독우를 가리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
하고, 그날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위(後魏)의 가경흥(賈景興)도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그는 늘 무릎을 쓰다듬으면서,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았노니, 그것은 고관(高官)에게 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했는데, 무릎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허리를 굽히지 않은 것과 대(對)가 될 만하다. 《문기유림》
● 양(梁) 나라 황문(黃門) 도계직(陶季直)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렀으니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젠 인간의 일에 오래도록 간여하고 싶지 않다.”
하고, 병을 핑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당(唐) 나라 잠문본(岑文本)이 중서령(中書令)의 임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문본(文本)이,
“저는 훈구(勳舊)의 공신(功臣)도 아닌데, 외람되이 은총(恩寵)을 입어 높은 지위에 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입니다.”
했고, 친한 사람들이 와서 축하하자,
“나는 조문(弔問)을 받아야지 축하 받을 수가 없습니다.”
했다.
북제(北齊)의 숙종(肅宗)이 왕희(王晞)를 시랑(侍郞)에 임명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왕희에게 스스로 소외당하는 짓을 할 것은 없다고 권했으나 왕희는,
“나는 젊어서부터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젊어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치고 낭패당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게다가 내 성품은 실제로 치밀하지도 민첩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시무(時務)를 감당할 수가 없답니다. 또 임금의 사사 은혜를 어떻게 장구히 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쩌다 한번 창피(猖披)를 당할 경우엔 물러가려 해도 물러갈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요직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익히 생각해 보자는 것뿐입니다.”
했다. 《문기유림》
● 이일지(李日知)가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있으면서 자주 사직(辭職)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그가 사직을 청하려 할 적에 집사람과 상의하지 않았었다. 윤허 받고 집으로 돌아와 즉시 행장을 꾸리니, 아내가 깜짝 놀라,
“가산(家産)이 텅 비었는데 왜 이리 갑작스레 사직했습니까?”
하니, 일지는,
“벼슬이 형부 상서에 이르렀으면 이미 내 분수엔 지나친 것이오. 사람에게 어찌 만족이 있을 수 있겠소.”
했다. 벼슬을 버리고 나서는 농사일은 돌보지 않은 채 대지(臺池)를 꾸미고 빈객(賓客)을 초청하여 함께 즐기기만 했다. 《저기실(楮記室)》
● 우완(虞玩)이 사공(司空)에 승진되자 이를 굳이 사양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임명되고 나서는 탄식하면서 빈객들에게,
“내가 삼공(三公)이 되면 이것은 천하에 사람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니, 말하는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당(唐) 나라 정계(鄭綮)가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조서(詔書)가 내리자 정계가,
“천하 사람들이 웃을 것이다.”
했고, 집무(執務)하게 되자 종척(宗戚)들에게,
“헐후정오(歇後鄭五)가 재상(宰相)이 되었으니,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했는데, 겨우 3개월 만에 병을 핑계로 사직(辭職)하여 치사(致仕)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못난 재주로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훌륭하지 않은가. 《독서경(讀書鏡)》
▶헐후정오(歇後鄭五) : 헐후는 맺음말을 흐려 본뜻은 숨기고 말하지 않는 글체를 말한다. 당(唐) 나라 때 정계(鄭綮)가 시문(詩文)에 능하여 해학적(諧謔的)인 말을 많이 했는데, 이 체를 썼기 때문에 생겨진 말이다. 여기서는 정계 자신을 말한다. |
● 당 명황(唐明皇) 때 하지장(賀知章)이 나이 86세로 표(表)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 도사(道士)가 되기를 청했다. 명황은 이를 허락하고, 저택을 내려주어 도관(道觀)을 만들게 하고 천추관(千秋觀)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감호(鑑湖)의 섬수(剡水) 한 굽이를 하사했다.
그리고 조서(詔書)를 내려 동문(東門) 밖에 장막을 치게 하고 백관(百官)을 데리고 가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이때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遺榮期入道 영화 버리고 도사되려고
辭老竟抽簪 늙었다 핑계하여 벼슬 버리누나.
豈不惜賢達 내 어찌 현달한 이 아끼지 않으랴만
其如高尙心 그대의 숭상하는 마음 이뤄주는 것만 하랴.
寰中得祕要 환우(寰宇)에서 비결을 얻었으니
方外散幽襟 방외에 그윽한 회포 흩날리리.
獨有靑門餞 동문 밖에서 전별연 베푸니
群英悵別深 많은 이가 그지없이 슬퍼하네.
했다. 《사문유취(事文類聚)》
● 위표(韋表)를 불러 어사(御史)에 임명하니, 떠나기를 중지하고 즐겁지 않은 얼굴로,
“작록(爵祿)이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누구나 욕망하는 것이다. 내 나이 50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흰 머리를 잘라가면서, 외람되이 젊은이들 사이에 섞여 한 계급 한 지위를 얻어 본들 무슨 맛이 있겠는가. 장차 소나무와 국화의 주인이 되어 도연명(陶淵明 : 도잠(陶潛)의 자)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싶다.”
하였다. 《사문유취》
● 당(唐) 나라 사공도(司空圖)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중조산(中條山)에 살면서 정자(亭子)를 짓고 삼의휴(三宜休)라 명명했다. 이는 첫째로 재능을 헤아려 보니 쉬어야 하고 둘째로 분수를 헤아려 보니 쉬어야 하고 셋째로 늙고 눈마저 어두우니 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唐) 나라 목종(穆宗) 때 공규(孔戣)가 늙었다는 것으로 물러가기를 청했다. 한유(韓愈)가,
“공(公)은 아무런 자산(資産)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시오?”
하니, 공규는,
“나는 나이로 보아 물러가야 하고, 좌상(左相)이 되어서는 낭관(郎官)의 진퇴(進退)를 잘못했으니 물러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도 그대의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 이약졸(李若拙)의 자(字)는 장용(藏用)이고 절동(浙東)과 절서(浙西)의 전운사(轉運使)를 지냈다. 스스로 세상따라 부침(浮沈)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여겨 오지선생전(五知先生傳)을 지었다. 그 내용은 때를 아는 것, 어려움을 아는 것, 명(命)을 아는 것, 물러갈 줄 아는 것, 만족할 줄 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저기실(楮記室)》
● 전약수(錢若水)가 젊었을 때 마의도자(麻衣道者 : 관상가(觀相家))를 만나 상을 보았더니, 소용돌이치는 벼슬길에서 과감하게 물러날 사람이라 했다.
뒤에 추부(樞副)로 치사(致仕)했는데, 나이 겨우 40세였다. 양대년(楊大年 : 대년은 양억(楊億)의 자)의 한망음(閑忙吟)이란 시에,
世上何人號最閑 세상에 가장 한가한 이 그 누구인가
司諫拂衣歸華山 추부공(樞副公) 옷깃 떨치고 화산으로 돌아가네.
했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문원공(文元公) 조형(晁逈)은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순진했다. 그래서 나이 40이 넘어서야 과거에 급제했고 비로소 결혼도 했다. 이 이전엔 전혀 세상일을 몰랐었다.
처음엔 유해섬(劉海蟾)에게 도(道)를 배워 연기(鍊氣)ㆍ복형(服形)의 법을 체득했고, 뒤에는 석씨(釋氏)를 배웠다. 그래서 늘 도교와 불교의 교리를 참고하여 일생 동안 힘써 실행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사절한 채 조용히 지내면서 도원(道院)에 혼자 거처하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않았다. 또 집 사람들에게도 번번이 물으러 오지 못하게 경계했다. 식사 때는 오직 두 가지 반찬만 내오게 했고 먹고 나면 즉시 제사상처럼 빨리 치웠다.
▶연기(鍊氣)ㆍ복형(服形)의 법 : 연기는 심기(心氣)를 단련하는 도가(道家)의 장생술(長生術)의 한 가지이고, 복형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으로 역시 도가의 수양 요법(修養要法). |
아들 종각(宗慤)이 정자(正字)에 발탁되어 조복(朝服)을 입고 와서 인사를 했지만, 공(公)은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공의 부인이 한번은 몰래 엿보았더니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았는데 수염과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만 보일 뿐, 목우인(木偶人)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공은 일찍이 시를 지어,
鍊鑛成金得珤珍 쇳돌 불려 금이 되면 이것이 보배이고
鍊情成性合天眞 정(情) 수련해 성(性) 이루면 이것이 천진이네.
相逢此理交談者 서로 만나 이 이치 얘기할 만한 사람
千百人中無一人 천백 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없구나.
했다. 《지비록(知非錄)》
● 선공(宣公) 손석(孫奭)이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치사(致仕)하고 운(鄆 : 지명)에 거처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시청(御詩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어시청은 인종(仁宗)이 상으로 내린 시(詩)를 거처하고 있는 청(廳)의 벽에 각석(刻石)하여 붙여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公)이 빈객들에게,
“백부(白傅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이런 절구가 있습니다.
多少朱門鎖空宅 많은 고관들의 옛집 문 굳게 닫혔는데
主人到老曾不歸 집 주인은 늙도록 돌아오지를 않는구나.
이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했다.
다시 석수도(石守道 : 수도는 석개(石介)의 자)를 돌아보며 《주역(周易)》 이괘(離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를 외면서,
“근심 잊고 즐거워하니 소인(小人 : 손석 자신을 가리킴)의 뜻에 만족하고, 노래하며 북치니 대질(大耋 : 70~80세의 노인으로 자신을 가리킴)이 탄식을 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했다.
공(公)은 순후한 덕과 깊은 학문으로 금중(禁中)에서 20여 년간 시강(侍講)하다가 늦은 나이에 과감하게 벼슬길에서 물러나, 향리(鄕里)에서 자연스럽게 노닐며 지냈다. 시종 덕(德)을 끝까지 온전히 지킨 사람으로 공에 견줄 만한 이가 근세에는 적다.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 진공(陳恭)이 박주(亳州)를 맡고 있을 때 생일날을 맞았다. 친척들은 노인성도(老人星圖)를 선사하는 이가 많았으나, 조카 세수(世修)만은 유독 범려유오호도(范蠡遊五湖圖)를 선사했다. 그 그림에는 이런 찬(贊)이 씌어 있었다.
“훌륭하구나, 도주공(陶朱公 : 범려(范蠡))이여. 월(越) 나라를 패제후(霸諸侯)시키고 오(吳) 나라를 평정했네. 명예 이루고 과감히 물러나 조각배 타고 오호(五湖)로 떠나갔구나.”
진공은 그날로 벼슬을 버렸다. 《하씨어림(何氏語林)》
▶노인성도(老人星圖) :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인 남극성을 신선처럼 인격화한 도석인물화. 수성도(壽星圖) 또는 수노인도라 불리며 장수를 염원하는 신앙과 결부되어 축수용(祝壽用)으로 많이 그려졌다. 수노인도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은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의 정수리 부분이 길고 앞이마가 돌출한 모습이며 도복 차림이다. 지팡이나 복숭아, 영지, 호리병 등을 들고 있기도 하고, 사슴이나 학, 거북이, 박쥐, 또는 동자를 대동하기도 한다. ▶범려유오호도(范蠡遊五湖圖) : 범려(范蠡)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대부(大夫)로 월(越)나라를 부흥시켜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공이 컸으나 월왕 구천(句踐)과 오래 함께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벼슬을 내어놓고 미인 서시(西施)와 더불어 오호(五湖)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전한다. 범려유오호도(范蠡遊五湖圖)는 이런 고사를 바탕으로 한 그림으로 보인다. |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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