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22 - 한정록(閑情錄) 퇴휴(退休) 3

從心所欲 2021. 9. 11. 07:06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사대부(士大夫)가 산림(山林)에 은거함에 있어 참으로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 없거나 참으로 은거하는 정취를 체득치 못한 사람은, 산림을 질곡(桎梏)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해령(海寧) 사람 허상경(許相卿)이 급간(給諫 : 직명)으로 물러와 10년간 집에 있었다. 그는 귀계(貴溪)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귀계가 다시 정승으로 조정에 들어가게 되자 편지로 허상경을 초청하는 한편 남대사성(南大司成)의 자리를 줄 테니 같이 있자고 했다. 그러나 허상경은 사양하면서,

“공(公)이 이번에 나아가는 것도 이미 그릇된 일인데 남까지 그르치려 하시오?”

했다. 뒤에 귀계가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자, 사람들은 허상경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

 

오중(吳中)의 왕녹지(王祿之)는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으면서 당시 권귀(權貴)에게 아부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폄출(貶黜)되자 부임하지 않고 20년 간 집에 있었다. 그의 좌주(座主 : 급제자(及第者)가 자신의 감시관(監試官)을 일컫는 말)인 이묵(李黙)이 당시 총재(冢宰)로 있으면서 억지로 기용하려 했지만, 녹지는 다음과 같이 편지로 사양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서 늙은 나이에 다시 벼슬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융경(隆慶 :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초에 이묵이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남이부(南吏部)로 기용하려 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큰 도(道)를 품고 길이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는 사람은 그 흥미가 절로 보통 사람과 별달리 훌륭한 면이 있는 것이다.

 

마공(馬公)이,

“작록(爵祿)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를 어리석다 하고, 산(山林)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을 쭉정이라 한다.”

했는데, 과연 미더운 말이다. 《문기유림(問奇類林)》

▶소보(巢父)와 허유(許由) : 두 사람은 모두 상고 시대의 은사(隱士)다. 이들은 요(堯) 임금이 나라를 넘겨주려고 했어도 이를 사양하고, 오히려 더러운 말을 들었다 하여 영천(潁川)에 귀를 씻고 기산(箕山)에 숨어 살았다 한다.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 이윤은 상(商) 나라 때의 재상(宰相)으로 탕(湯) 임금을 도와 하(夏) 나라의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여상은 주(周)나라의 재상으로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던 강태공(姜太公) 또는 태공망(太公望)을 가리킨다.

 

● 문정공(文定公) 육수성(陸樹聲)이,

“내가 병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성 밖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집 동북쪽 모퉁이에 작은 집을 지었는데 8자[尺] 남짓했고, 그 안에 좌구(坐具)를 설치해 놓았다. 목 상좌(木上座 : 상좌는 불교의 원로를 가리킨다)가 오기만 하면 좌구 위에 가부좌(跏趺坐)하고 쉬면서 두서너 선객(禪客)들과 공종(空宗 : 불교)의 교리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 곁에 수고로움을 잊고 마음을 조용히 한 채 얼마쯤 있노라면, 고요한 가운데 삼매경(三昧境)을 느끼게 되므로 잠깐의 휴식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일찍이 본일선원(本一禪院)의 법당(法堂)에 갔었는데 그때마다 은남 선사(隱南禪師)와 정좌(靜坐)했었다. 그러노라면 가슴속에 절로 일종(一種)의 쾌활함을 느꼈다. 그러나 남에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금 사대부(士大夫)들은 화려하고 성대함을 즐기지만, 내가 보아온 바로는 그 즐거움이 그렇게 상쾌하고 이로운 것은 아니었다.”

했다. 어떤 사람이,

“지금 우리는 어디다 힘을 써야 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나처럼 해서는 안 된다. 삼가 떳떳한 덕을 행하고 떳떳한 말을 하도록 하라.”

했다. 《미공비급》

 

● 종백(宗伯 : 예부(禮部)상서) 육수성(陸樹聲)이 치사(致仕)하고 돌아가게 되자, 대로(大老)들이 전송했다. 그때 이기(李己)와 조금(趙錦)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이,

“육공(陸公)의 이번 걸음을 보면 천하 사람들이 조정에도 작록(爵祿)을 탐하지 않는 신하가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니, 이기는,

“육공은 실제로 병 때문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 집을 위해 나라를 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했다. 《명세설신어》

 

● 양유예(梁有譽)가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했다. 때에 유예의 명망이 매우 자자해서 이부랑(吏部郞)으로 승진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사직하지 말라고 권하는 이가 있었다. 공은 웃으면서,

“내가 스스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어찌 형부랑(刑部郞)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겠는가. 이부랑의 자리가 어떻게 나를 붙들 수 있겠는가.”

하고,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갔다.

 

원중랑(袁中郞)이 오령(吳令 : 오(吳) 지방의 수령)으로 있다가 병 때문에 사면(辭免)하고 나서,

“수령 때문에 병이 생겼고 병 때문에 수령에서 풀려났다. 수령 때문에 병이 났으니 수령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자리인데, 나의 병이 그 수령 자리에서 풀려나게 했으니 병이 나를 즐겁게 해준 게 아니겠는가.”

했다. 《명세설신어》

 

● 조 문원(晁文元 : 문원은 조형(晁逈)의 시호)이,

“문중자(文中子 : 왕통(王通)의 사시(私諡))가 ‘내가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업(業)을 이룰 수 있었다.’ 했다. 인하여 스스로 생각해보니, 벼슬을 버리지 않고는 도(道) 즐기는 뜻을 이룰 수가 없다고 느꼈다.”

라고 했다. 고금(古今)의 현우(賢愚)는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는 같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한퇴지(韓退之 :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의 시(詩)에,

 

閑居食不足 한가히 살자니 양식이 부족하고

從宦力難任 벼슬에 나가자니 능력이 모자라네.

兩事皆害性 이 두 가지 일 모두 본성을 해치는 것이라

一生常苦心 일생 동안 늘 고심했다네.

 

했고, 소자첨(蘇子瞻 :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은,

 

家居妻兒號 집에 있으니 처자식 울부짖고

出仕猿鶴怨 벼슬하니 원숭이 학 원망하네.

未能逐什一 열에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니

安能搏九萬 어떻게 구만리장천을 날겠는가.

 

했으니, 이 두 사람도 진퇴(進退)의 사이에서 머뭇거림을 면하지는 못했다.

그 뒤 퇴지(退之)는 형산(衡山)에서 눈 속을 헤매었고 자첨(子瞻)은 담해(儋海)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은거한답시고 문 닫고 들어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거친 음식이나 먹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 두 사람은 신선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반시(考槃詩)를 지은 사람이,

“자나 깨나 이 즐거움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하네.”

했다. 《지비록(知非錄)》

 

● 옛사람이 지은 소사(小詞)에,

“금으로 만든 완구가 가득한 좋은 집이거나 대나무로 울타리를 한 초라한 띳집이거나 이 모든 것에 무심(無心)해야 한다. 처사(處士)가 진실로 무심으로 세상에 응한다면, 쓰여져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버려져 초야에 은거하거나 간에 어딜 간들 유유자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유심(有心)하다면 빈천은 말할 것도 없고 극도의 부귀를 누린다 해도 유유자적할 수 없는 것이다.”

했다. 《임거만록(林居漫錄)》

 

● 나대경(羅大經)이,

“선비가 어찌 길이 사립(蓑笠 : 도롱이와 삿갓으로 은자의 옷이란 뜻)만 입고 산림(山林)에 묻혀 있을 수 있겠는가. 단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에도 요컨대 산림에서 사립 입던 때의 마음을 잊지 않아야 훌륭한 것이다.”

했다. 도연명(陶淵明 : 연명은 도잠(陶潛)의 자)의 부진군시(赴鎭軍詩)에,

 

望雲慙高鳥 구름 바라보니 높이 나는 새에 부끄럽고

臨水愧游魚 물에 임하니 노니는 물고기에 부끄럽네.

眞想初在襟 처음 뜻은 자연을 즐기려는 거였는데

誰謂形跡拘 형적(形跡)에 얽매일 줄 누가 생각했으랴.

 

했는데, 이러한 마음이면 외적인 영화(榮華)가 어떻게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공여일록(公餘日錄)》

 

● 산곡(山谷 : 황정견(黃庭堅)의 호)이,

“옥(玉)을 차고 있더라도 마음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 하고 조정에 벼슬하더라도 마음은 동산(東山)에 있어야 한다.”

했는데, 역시 윗글과 같은 뜻이다. 《공여일록》

 

● 사람들은 거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은거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벼슬하여 부귀 누리는 것을 외물(外物)로 여긴다. 그러나 이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하(趙蝦)의 시에,

 

早晩粗酬身事了 조만간 내 일신의 일 대강 끝내고

水邊歸去一閑人 물가로 돌아가 한가한 사람 되리.

 

했는데, 만약 일신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 한다면 사진(仕進)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치열해져서 돌아갈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왕이간(王易簡)의 시에,

 

靑山得去且歸去 청산으로 갈 수 있다면 우선 돌아갔다가

官職有來還自來 관직으로 부르면 곧 도로 나가리라.

 

했는데, 이는 잠시도 벼슬을 잊지 않은 것이다. 장괴애(張乖崖 : 괴애는 장영(張詠)의 호)가 촉(蜀) 지방에 있을 때 막관(幕官 : 막부(幕府)의 일을 맡은 사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괴애에게 예우를 받지 못했다. 그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秋光都似宦情薄 야박한 벼슬살이 모두가 가을 풍경처럼 싸늘하니

山色不如歸意濃 산 빛도 돌아가고픈 마음보다는 짙지 못하네.

 

하니, 공(公)이 사죄하고 떠나지 못하게 만류했다. 이 시는 막관이 격동한 바 있어 지은 것이다.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어떤 무관(武官)이 문득 시를 짓기를,

 

人生本無累 인생은 본디 누(累)가 없는 것인데

何必買山錢 매산전(買山錢)을 요구할 필요가 무언가.

 

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했는데, 이는 가장 과감한 결단이었다.

일찍이 우역(郵驛)의 벽에 씌어져 있는 두 구(句)의 시를 보았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人生待足何時足 인생에 어찌 만족할 때가 있겠는가.

未老得閑方是閑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하네.

 

나는 이 시의 뜻을 깊이 음미하면서 그렇게 행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다. 또,

 

相逢盡道休官去 사람마다 모두 벼슬 버리고 간다고들 하지만

林下何曾見一人 산림에 가 은거하는 사람 하나도 못 보았다네.

 

했는데, 세상에서 이 시를 많이들 외고 있지만 시의 저자가 당(唐) 나라 때 사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위단(韋丹)이 영철(靈澈 당(唐) 나라 때의 중)에게 보낸 시에,

 

王事紛紛無暇日 나랏일에 쫓기다 보니 여가가 없는데

浮生冉冉只如雲 덧없는 인생살이 뜬구름만 같다네.

已爲平子歸休計 이미 평자(平子)처럼 돌아가 쉴 계획 세웠으니

五老峯前必共君 오로봉(五老峯) 앞에서 반드시 그대와 같이 즐기리.

 

했는데, 영철이 즉시 위단에게 이렇게 답했다.

 

年老身閑無外事 늙은 몸 한가로이 다른 일 없으니

麻衣草坐亦安身 삼베옷 입고 초막에 있어도 몸은 편하네.

相逢盡道休官去 사람마다 모두 벼슬 버리고 간다고들 하지만

林下何曾見一人 산림에 가 은거하는 사람 하나도 못 보았다네.

 

《염계집(濂溪集)》의 화비령유산시(和費令遊山詩)에,

 

是處塵勞皆可息 이곳은 세상일 모두 잊을 수 있는 데지만

時淸終未忍辭官 태평 시대라서 끝내 벼슬 사양 차마 못하겠네.

 

했는데, 이는 충심(衷心)을 말한 것으로 도(道) 있는 사람의 말이니, 도저히 따를 수 없다. 지금 사람들은 입으로는 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하지만 행동은 벼슬 구하기를 획책하기 일쑤다.

당(唐) 나라 중 백수(白秀)는,

 

住山人少說山多 산에 사는 사람은 적은데 산을 말하는 이는 많네.

 

했고, 두목지(杜牧之 : 두목(杜牧)의 자)는,

 

盡道靑山歸去好 모두들 청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靑山能有幾人歸 청산으로 돌아간 사람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했다.

 

양성재(楊誠齋 : 성재는 양만리(楊萬里)의 호)가 조정에 벼슬하고 있을 때 경사(京師)에서 고향집으로 가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하여,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운 다음 침석(寢席) 곁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집 사람들에게 훈계하기를,

“한 가지 물건이라도 사들이지 말라. 고향으로 돌아갈 때 부담스러운 짐이 될까 염려스럽다.”

하면서, 날마다 금방이라도 행장을 꾸릴 것같이 했다. 이 뜻이 매우 훌륭하다. 조정에 벼슬하면서만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 있어서도 이렇게 해야 한다.

 

대저 세상살이란 사람에 있어 여관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날마다 물건을 사서 보탬으로써 재물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재물이 세상 길 떠날 때 부담스러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경편(自警編)》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圯橋跪履>,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ㅣ 장량(張良)이 하비(下邳)의 이교(圯橋)에서 만난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의 신발을 다리 밑에서 주워 와 공손히 무릎 꿇고 신겨 주고 그 덕분에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는 병법서를 받아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공(功)을 이룬 뒤 한 고조(漢高祖)가 된 유방이 제(齊) 땅을 주려 하자 사양하고 물러나 신선의 길을 가겠다며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갔다 한다.]

 

● 범 충선공(范忠宣公 : 충선은 범순인(范純仁)의 시호)이 경사(京師)의 내직으로 올 때마다 아침저녁으로 두 가지 반찬만 만들게 했으며, 그것도 복첩(僕妾)들을 시켜 집에서 직접 만들도록 했다. 그런데 가끔 이것마저도 줄여 지나치게 간검(簡儉)하게 했기 때문에 식구들이 배부르게 먹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만년에 정부(政府)에 올랐을 적에도 이렇게 했다. 반대로 외직(外職)에 있을 때는 음식 일체를 외주(外廚)에 맡기고 요금도 몇 배나 더 주었으므로 풍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나가고 물러가는 것이 비록 자신에게 달린 것이긴 하지만, 처노(妻孥)가 누(累)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래서 나는 중앙에 있을 때는 수고로우면서도 생활은 부족하게 하고 외직에 있을 때는 편안하면서도 생활은 넉넉하게 함으로써,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외직에 보임되는 것을 즐기게 하는 반면 경사에 미련을 두지 않게 하고 싶어서 그럴 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한 가지 도움이 되는 것이다.”

했다.

선배(先輩)들은 출처(出處)에 엄격하여 매양 마음 쓰는 것이 이러하였다. 《패해(稗海)》

 

● 왕형공(王荊公 :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이 재상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 금릉(金陵)에 살았다. 그리하여 날마다 산천(山泉)을 유람하면서 세상일을 잊었다. 그러나 그의 시에,

 

穰侯老擅關中事 양후는 늙어서도 관중의 일 전담하면서

長恐諸侯客子來 오래도록 제후들 유세객이 올까 염려했었네.

我亦暮年專一壑 나 또한 늘그막에 한 산천(山泉) 전담했건만

每逢車馬便警猜 거마(車馬) 만날 적마다 문득 놀라고 의심한다네.

 

했다. 이미 산천에다 마음을 두었으면 외물(外物)에는 관심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놀라고 의심할 필요가 뭐 있는가. 이로 보면 형공의 마음속에 아직도 통쾌하게 잊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연명(陶淵明)은 그렇지 않아서,

 

結廬在人境 사람들 사는 곳에 집 짓고 있지만

而無車馬喧 거마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네.

問君何能爾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지면 지역은 절로 외지는 것이라오.

 

했으니, 마음을 먼 곳에 두면 비록 사람들이 있는 데 살더라도 거마(車馬)소리가 시끄럽게 할 수 없지만 마음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으면 비록 한 골짜기를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거마를 만나더라도 또한 놀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떨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학림옥로(鶴林玉露)》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