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유흥(遊興)은 5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산천(山川)의 경치를 구경하여 정신을 휴식시키는 것은 한거(閑居) 중의 하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5 ‘유흥(遊興)’으로 한다.”
● 순 중랑(荀中郞 순선(荀羨))이 경구(京口)의 북고산(北固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삼산(三山 :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洲))은 못 보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속세(俗世)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일게 하였다. 만약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려 했을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 : 신선을 지극히 사모한 임금들이다. 진시황은 삼신산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라고 서불(徐市)을 보낸 일이 있고, 한무제는 봉선제(封禪祭)를 올리면서 바닷가를 순행하며 신선 만나기를 바랐다. |
● 허연(許掾 : 허순(許詢))이 경치 좋은 곳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체구(體軀)가 등산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였다.
“허연은 좋은 경치를 즐기려는 마음만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경치를 찾아다니기에 알맞은 도구(道具 : 여기서는 몸을 말한다)를 지니고 있다.” 《세설신어》
● 고장강(顧長康 : 장강은 고개지(顧愷之)의 자(字))이 회계산(會稽山)에서 돌아오자 사람들이 산천(山川)의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 고장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천의 암석은 높이를 다투듯 치솟았고 수만의 골짜기엔 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으며, 울창한 나무숲 위엔 구름이 일듯 내가 꽉 끼어 있었다.” 《세설신어》
● 왕자경(王子敬 : 자경은 왕헌지(王獻之)의 자)이 말하였다.
“산음(山陰)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산천의 경치가 절로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경치 구경하기에도 겨를이 없게 만든다. 가을이나 겨울 같은 때엔 더더욱 형언하기 어려운 기이한 경치가 전개된다.” 《세설신어》
● 왕사주(王司州 : 왕호지(王胡之))가 오흥(吳興)의 인저(印渚)에 이르러 구경하고는 다음과 같이 감탄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툭 틔게 할 뿐 아니라 일월(日月)의 광명이 청랑(淸朗)함을 깨닫게 하는구나.” 《세설신어》
● 도일도인(道壹道人 : 축덕(竺德)이 도하(都下)에서 동산(東山)으로 돌아왔다. 오면서 오중(吳中)을 경유했는데, 마침 눈이 내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다. 다른 도인(道人)들이 오는 도중 경유한 곳의 경치를 물으니, 도일도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도중에 신고스러움은 으레 논할 게 못 된다네. 먼저 참담한 광경을 모아 보면, 교읍(郊邑)은 눈발이 휘날려 잘 보이지 않았고 숲과 산봉우리는 그저 희기만 했다네.” 《세설신어》
● 종소문(宗少文 : 소문은 종병지(宗炳之)의 자)이 아름다운 경치를 좋아하여 멀리 유람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서쪽으로 형산(荊山)과 무산(巫山)에 올랐었고 남쪽으로 형산(衡山)에 올랐었다. 인하여 형산에다 집을 짓고 평소 숭상해오던 유람을 즐긴 상자평(向子平 : 상장(向長))의 뜻을 이루려 했으나, 병에 걸려 강릉(江陵)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탄식하기를,
“노병(老病)이 한꺼번에 이르렀으니 명산(名山)을 두루 구경하기가 어려울 것 같구나. 이젠 마음을 맑혀 도(道)를 궁구하며 누워서 유람해야겠다.”
하고 유람했었던 곳의 경치를 집에다 모두 그려 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비파로 곡조를 타서 그림 속의 산들이 모두 메아리치게 하련다.” 《와유록(臥遊錄)》
● 종소문은 비파와 서적을 좋아했고 언리(言理)에 정통했다. 그래서 좋은 경치를 유람할 적마다 번번이 돌아갈 줄을 까맣게 잊기 일쑤였다. 왕장사(王長史)가 늘 따라다녔는데, 날이 저물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유언도(劉彦度)는 산택(山澤)을 유람할 적마다 끝없이 즐기면서 돌아가기를 잊었다. 신기는 옥처럼 맑았고 자태도 매우 훤칠했으며, 산골짜기에 유람할 땐 기상이 더욱 고상했다. 그래서 혹 그를 만나본 사람은 신인(神人)이라고 하였다. 《하씨어림》
● 도은거(陶隱居 : 도홍경(陶弘景))가 처음 동양(東陽) 손유악(孫遊岳)에게 부도(符圖)와 경서(經書)를 받고 나서, 명산(名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선약(仙藥)을 찾았다. 경치 좋은 계곡을 거칠 때마다 반드시 그 사이에 머물러 읊조렸으며, 차마 떠날 수 없어 머뭇거렸다. 《하씨어림》
● 장자위(張子偉)가 젊었을 때 결혼도 벼슬도 않고 도경순(刀景純)의 폐포(廢圃)를 얻어 거기에 띳집을 짓고 살았다. 거친 음식에 물 마시고 살면서도 큰 소나무와 긴 대숲 밑을 거닐면서 휘파람 불며 거칠 것 없이 10여 년을 살았다.
어느 날 호상(湖湘)의 경치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여산(廬山)에 오른 다음 팽려호(彭蠡湖)에 배 띄워 동정호(洞庭湖)를 건넜고, 남쪽으로 가서 형산(衡山)에 이르렀다. 이러느라 수년 만에 돌아왔다. 찾아갔던 데는 비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지극히 험한 곳이라 하더라도 기필코 끝까지 찾아가 봄으로써 자신의 뜻을 충족시켰다. 그리고 그때마다 글로 기록했는데, 이를 《산수만유기(山水漫遊紀)》라 명명하였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전 문희(錢文僖 : 문희는 전유연(錢惟演)의 시호)가 서도(西都)의 태수로 있을 때 사희심(謝希深)과 구양영숙(歐陽永叔 : 영숙은 구양수(歐陽修)의 자)이 함께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숭산(嵩山)을 유람하고 영양(穎陽)을 거쳐 돌아오다가 저물녘에 용문(龍門)의 향산(香山)에 닿았다. 조금 있자 눈이 내렸으므로 두 사람은 석루(石樓)에 올라 도성(都城)을 바라보았는데, 각기 품은 회포가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연애(煙靄)가 자욱한 속으로 이수(伊水)를 건너 달려오는 거마(車馬)가 있었다. 도착하고 보니, 전문희가 보내는 음식과 기생이었다. 와서는 전공(錢公)의 말을 전하기를,
“산 유람이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빨리 돌아오지 말고 잠시 용문에 머물면서 눈 경치나 구경하시오.”
하였다. 그의 활달한 마음과 인재를 사랑하는 아량이 이와 같았다. 《세설신어》
● 사마 온공(司馬溫公 : 온공은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이 낙양(洛陽)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세상일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아(物我)의 관념을 버리고 궁통(窮通)을 한결같게 여겼으므로 스스로 제물자(齊物子)라 일컬었다.
원풍(元豐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 어느 중추(中秋)에 낙령자(樂令子)와 함께 낙예(洛汭)를 방문하기 위해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길을 떠났다.
한성(韓城)을 지나 등봉(登封)에 이르렀고 준극서원(峻極書院)에서 쉰 다음, 숭양(嵩陽)으로 달려 숭복궁(崇福宮)으로 나아가 자극관(紫極觀)에 이르렀다. 회선사(會善寺)를 찾아보고 환원(轘轅)을 지나 서사(西沙)에 이르렀다. 광도사(廣度寺)에서 잠시 머물다가 용문(龍門)을 거쳐 이양(伊陽)에 이르러 봉선사(奉先寺)를 찾아보고 화엄각(華嚴閣)에 올라 천불암(千佛巖)을 구경했다.
산길을 걸어 올라가 고공직당(高公直堂)을 구경했다. 도보로 잠계(潛溪)를 건너 보응(保應)으로 돌아와 문부(文富 : 부필(富弼)과 문언박(文彦博)) 두 공(公)을 모신 광화사(廣化寺)를 구경하고 빈양당(邠陽堂)에 참배한 다음 내려왔다. 이수(伊水)를 건너 향산(香山)에 올라 백공영당(白公影堂)에 이르렀고, 황감원(黃龕院)에 나아가 석루(石樓)에 의지했다가 팔절탄(八節灘)을 거쳐 이구(伊口)로 돌아왔다.
무릇 유람하면서 지나는 곳마다 그곳의 경치를 읊었었다. 돌아와서는 이를 정리하여《유록(遊錄)》을 만들었는데, 사대부(士大夫)들이 다투어 전사(傳寫)하였다. 《패사휘편(稗史彙編)》
● 내가 황주(黃州)로 귀양 가 있을 적에 변재(辨才)와 삼료자(參寥子) 두 선사(禪師)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해왔고, 또 태허(太虛)라는 제명(題名)으로 글을 보내왔다.
이때는 중추(中秋)가 10일 남짓 남은 때라서, 가을 장마에 물이 불어 수면(水面)이 천리에 뻗쳤다. 달은 방성(房星 : 별이름)과 심성(心星 : 별이름) 사이에 솟았고, 수면 위에는 흩날리는 실이슬이 자욱했다.
내가 거처하는 곳은 강(江)과의 거리가 10보(步)도 못 되었다. 그래서 동자(童子)와 단둘이서 작은 배를 저어 적벽(赤壁)에 이르렀다. 무창(武昌)의 산골짜기를 바라보니 울창한 나무숲이 창연(蒼然)했고 구름 덮인 파도는 하늘과 맞닿았다.
인하여 이 정경을 기록, 삼료자에게 부치면서 변재에게도 보이게 했다. 숭우(嵩郵)로 가는 인편이 있다면 또한 이 기록을 태허(太虛)에 부칠 수도 있으리라.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 :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송(宋)나라 때 문장가 소식(蘇軾, 소동파)의 문집. |
● 원풍(元豐) 3년(1080년) 여름 6월에 여산(廬山)에 가서 이 산의 남쪽 기슭을 올라가 서현곡(棲賢谷)으로 들어갔다.
골짝에는 큰 바위가 많았는데 높고 웅장한 모습으로 서로 의지해 있었고, 바위 사이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소리는 마치 우레 소리 같았고 1천 대의 수레가 치닫듯 지축을 흔들었으므로, 지나는 사람들은 마음이 떨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험하기로 이름난 삼협(三峽 : 촉(蜀)에 들어가는 세 협곡)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다리 이름을 삼협교(三峽橋)라 했나보다.
삼협교를 건너 동쪽으로 가니 산을 의지해 물이 흐르고 있었고, 수면은 흰 비단을 깐 것처럼 평평하기만 했다. 큰 바위가 그 물을 가로막는 곳에 이르자 물은 큰 수레바퀴처럼 맴돌아 괴었는데, 이리저리 돌면서 마구 솟구치기도 하여 온갖 모습을 다 연출했다.
원(院)은 이 지점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석벽(石壁)을 의지했고 왼쪽으로 흐르는 물을 끼고 있었다. 승당(僧堂)은 석벽의 등마루에 있었다. 그래서 큰 봉우리와 기이한 바위가 처마 끝에 춤추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짙은 푸르름이 서로 얼크러졌다. 때문에 큰 비바람이 불면 중들은 봉우리나 바위가 무너져 내려 승당을 덮칠까 걱정한다고 한다.
여산(廬山)의 지리에 익숙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 산의 승경(勝景)은 서현곡(棲賢谷)이 제일인데 이런 곳은 한둘 정도라 한다. 《소문충공집》
● 원풍 2년 10월 1일, 나는 오흥(吳興)에서 항주(杭州)를 거쳐 동쪽으로 회계(會稽)에 왔다. 그때 용정(龍井)에 변재대사(辨才大師)가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어 나를 산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했다.
성곽(城郭)을 나오자 날이 저물었다. 배를 타고 호수(湖水)를 따라 보령(普寧)에 이르렀는데, 도중에 삼료자(參寥子)를 만났다. 그래서 용정에서 보낸 남여(藍輿)에 대해 물어봤더니, 내가 때맞추어 오지 않아서 가버렸다고 했다.
이날 저녁 맑게 갠 하늘에 숲 사이로 달이 떠오르니, 터럭 끝이라도 셀 수 있을 정도로 환했다. 드디어 배에서 내려 삼료자와 함께 지팡이를 짚고 호수를 따라 걸었다. 뇌봉(雷峯)을 지나고 남병(南屛)을 넘어 혜인간(惠因澗)에서 발을 씻었다. 영석오(靈石塢)에 들렀다가 지름길로 풍황령(風篁嶺)에 올랐으며, 용정정(龍井亭)에 쉬면서는 샘물을 떠마셨다.
보령(普寧)에서부터 15개의 불사(佛寺)를 거쳐 왔는데, 모두 적막하기만 한 채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길가의 여사(廬舍)에도 등불이 희미하게 가물거렸다. 나무숲은 매우 울창했고 흐르는 물 소리는 비명처럼 격렬하여 인간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3경(更)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성원(壽聖院)에 도착, 조음당(潮音堂)에서 변재대사를 만났다. 다음날 바로 돌아왔다. 《소문충공집》
● 소성(紹聖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年號)) 2년(1095년) 3월 4일, 담사군(詹使君)이 나를 초청하여 함께 백수산(白水山) 불적사(佛跡寺)를 유람했다.
탕천(湯泉)에서 목욕하고 폭포수 아래서 바람을 쐰 뒤 중령(中嶺)에 올라 폭포수의 근원을 바라봤다. 견여(肩輿)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산 경치를 구경하고, 또 유람객들과 얘기도 나누었다. 저물녘에 여포(荔浦) 가에서 쉬면서 지팡이를 짚고 대숲 속을 거닐었다. 이때 여주 열매가 가시연밥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부로(父老)들이 여주 열매를 가리키면서,
“이것으로 내가 안주를 만들어 놓을 테니, 공께서는 술을 가지고 다시 오시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흔연히 그러마고 했다. 《소문충공집》
● 오늘 백수산(白水山) 불적암(佛跡巖)을 유람했다. 산 위에는 폭포수가 있었는데 높이가 30길이었으므로 물이 우레 소리를 내면서 굴러 떨어지고 번갯불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도저히 그 형상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대략 항우(項羽)가 장감(章邯 진(秦) 장군)을 격파할 때의 상황과 비슷할 것 같았다. 《소문충공집》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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