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25 - 한정록(閑情錄) 아치(雅致) 1

從心所欲 2021. 9. 22. 14:59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아치(雅致)는 6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한정(閑情)을 좋아하는 선비의 뜻은 자연히 달라서, 속인(俗人)은 비웃고 고인(高人)은 찬탄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6 ‘아치(雅致)’로 한다.”

 

● 곽임종(郭林宗 : 임종은 후한(後漢) 곽태(郭泰)의 자)은 길을 가다 여관(旅館)에 묵게 되면 몸소 청소를 하고 날이 밝으면 떠났다. 오는 사람들이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은 곽유도(郭有道 : 유도(有道)는 곧 유도지사(有道之士)의 뜻)가 어제 자고 간 곳일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유도지사(有道之士) : 도덕(道德)을 갖추고 있는 사람

 

● 손자형(孫子荊 : 자형은 진(晉) 손초(孫楚)의 자)이 젊어서 은거(隱居)하려고 하여 왕무자(王武子 : 무자는 진(晉) 왕제(王濟)의 자)에게,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리라.”

라고 해야 할 말을 그릇 말하기를,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으리라.”

하였다. 왕무자가 묻기를,

“물을 베개로 삼을 수 있으며, 돌로 양치질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손자형은 말하였다.

“물로 베개 삼는다는 말은 귀를 씻고자 함이요,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말은 이빨을 닦고자 함이다.” 《세설신어》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으리라. : 수석침류(漱石枕流)

 

● 위 세마(衛洗馬 : 세마를 지낸 진(晉)의 위개(衛玠)를 가리킴)는 항상 인품이 부족한 자는 용서(容恕)하고 고의로 기만하는 것이 아니면 이치(理致)로 타일렀기 때문에 평생 동안 기쁘거나 성낸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세설신어》

 

● 배숙칙(裴叔則 : 숙칙은 진(晉) 배해(裴楷)의 자)이 아주 화려한 집을 새로 지었다. 이사할 때 그의 형과 함께 그곳에서 노닐었는데, 집 상장(牀帳)이 정연하고 헌령(軒欞 : 헌은 추녀 끝이며 영은 세살 창문)이 아름다워 그의 형이 매우 욕심을 내면서도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를 안 숙칙은 그 집을 형이 살도록 하였다. 《하씨어림(何氏語林)》

▶상장(牀帳) : 평상(平牀)과 장막(帳幕)

 

● 육 평원(陸平原 : 평원내사(平原內史)를 지낸 진(晉)의 육기(陸機))이 낙양(洛陽)에 있을 때였다.

여름에 갑자기 고향 집 동쪽 대나무 밭에서 술을 마시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유보(劉寶)에게 말하였다.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 《세설신어》

 

● 유 태위(庾太尉 : 태위를 지낸 진(晉)의 유량(庾亮))가 무창(武昌)에 있을 때였다. 가을밤 야경(夜景)이 청량(淸涼)하여 좌리(佐吏) 은호(殷浩)와 왕호지(王胡之) 등의 무리가 누대(樓臺)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데 멀리 복도에서 엄정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틀림없는 유공이라고 생각하였다.

조금 있자 유공이 좌우(左右) 10여 명을 데리고 걸어서 오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고 하니, 공은 천천히 말하기를,

“늙은 나도 이곳에 오니 흥(興)이 이는구나!”

하고는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여러 사람들과 노래하고 해학을 나누었다.

후에 왕일소(王逸少 : 일소는 진(晉) 왕희지(王羲之)의 자)가 승상(丞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승상은,

“원규(元規 : 유량(庾亮)의 자)가 요즈음은 풍범(風範)이 조금 쇠퇴했다.”

하니, 우군(右軍 : 왕희지의 별칭)은 말하였다.

“그래도 속세를 떠난 풍류는 남아 있습니다.” 《세설신어》

 

● 사안석(謝安石 : 안석은 진(晉) 사안(謝安)의 자)이 지둔(支遁 :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에게 준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人生)이란 마치 길손과 같아서 지난날의 풍류(風流)와 즐거웠던 일들이 모두 없어지고, 종일 적적하게 지내니 일마다 서글퍼지네. 만일 그대가 와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어 이런 심정을 씻어주면 하루 사는 것이 천년을 사는 것 같겠네.”  《소창청기(小窓淸記)》

 

● 유 윤(劉尹 : 단양윤(丹陽尹)을 지낸 유진장(劉眞長))은 이렇게 말하였다.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을 보니 문득 현도(玄度 : 진(晉) 허순(許詢)의 자)가 생각나는구나.” 《세설신어》

 

● 사 태부(謝太傅 : 태부를 지낸 진(晉)의 사안(謝安))가 왕수령(王修齡)을 이렇게 칭찬했다.

“사주(司州 : 왕수령을 말한다)는 함께 임택(林澤)에서 노닐 만하다.” 《세설신어》

 

● 사공(謝公 : 사안(謝安))이 예장(豫章)을 지나다가 만일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만나면 손을 마주잡고 죽림으로 들어갔다. 《세설신어》

 

● 환자야(桓子野 : 자야는 진(晉) 환이(桓伊)의 자)는 청아(淸雅)한 노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고 감탄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사공(謝公)이 말하였다.

“자야(子野)는 갈수록 더욱 유정(有情)하다 하겠다.” 《세설신어》

 

● 곽경순(郭景純 : 경순은 진(晉) 곽박(郭璞)의 자)의 시에,

 

林無靜樹 흔들리지 않는 나무 없고

川無停流 흐르지 않는 시내 없네.

 

하였고, 완부(阮孚)는,

泓崢蕭瑟 깊은 물 높은 봉우리 소슬(蕭瑟)하여

宲不可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문득 정신이 초탈(超脫)해진다. 《세설신어》

 

● 대안도(戴安道 : 안도는 진(晉) 대규(戴逵)의 자)가 동산(東山)에서 조행(操行)을 닦고 있는데 그의 아우는 공(功)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사 태부(謝太傅)가 말하기를,

“그대의 형제간은 지업(志業)이 어찌 그리 다르오?”

하니, 아우 녹(逯)은 이렇게 말하였다.

“소관(小官)은 가난한 근심을 이기지 못한 것이요, 형님은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 《세설신어》

 

● 왕공(王恭)이 왕건무(王建武 : 건무는 진(晉) 왕침(王忱)의 별호)와 매우 다정하여 모임이 있을 때마다 서로 생각하였다. 공(恭)이 한번은 경사(京師) 어귀의 사당(射堂)에 이르렀는데, 이때 맑은 서리가 내리고 오동나무 새순이 뻗고 있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왕대(王大 : 왕침(王忱))는 본래 저렇게 청아(淸雅)하였다.” 《세설신어》

 

● 지도림(支道林 : 도림은 진(晉)의 고승 지둔(支遁)의 자)이 사람을 시켜 심공(深公 : 축법심(竺法深))에게 인산(印山)을 사라고 하였다. 그러자 심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소부(巢父 : 중국 고대의 은사(隱士))와 허유(許由 : 중국 고대의 은사)가 산을 사서 은거(隱居)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세설신어》

 

● 도연명(陶淵明 : 연명은 진(晉) 도잠(陶潛)의 자)이 한번은 논의 물소리를 듣고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참 듣고 나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벼는 이미 이삭이 나오고 푸른빛은 사람의 옷을 물들인다. 시시각각으로 흉금(胸襟)의 가시를 씻어 주니, 이 물은 우리 스승이나 어른들보다 낫구나.” 《지비록(知非錄)》

 

● 도통명(陶通明 : 통명은 양(梁) 도홍경(陶弘景)의 자)은 그의 문인(門人)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富貴)한 사람의 고대광실을 보고 비록 그 화려하고 즐거운 것을 알았으나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높은 바위를 바라보거나 큰 못을 굽어볼 때는 비록 그곳에 오르거나 갈 수 없음을 알았으나 항상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또 영명(永明 : 남제 무제(南齊武帝)의 연호) 연간에 벼슬하기를 바랐으나 어긋나고 말았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오늘날처럼 지낼 수 있었겠는가. 몸에 신선(神仙)의 상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형세(形勢)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지비록》

 

● 도통명(陶通明)은 이렇게 말하였다.

“시골에서 편히 쉬고 교외(郊外)에서 조용히 살며 한결같은 뜻을 지키는 것은 감히 영화(榮華)를 멸시하거나 세속(世俗)을 비웃어 스스로 고상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개 성품대로 구김 없이 살면서 벼슬하지 않아 한가(閒暇)함을 얻고, 나무하고 물을 길어도 즐거움이 넘치며, 소나무를 베어 창출(蒼朮)을 구워먹어도 기쁘니, 이 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지비록》

▶창출(蒼朮) :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

 

● 왕찬지(王瓚之)는 오병상서(五兵尙書)를 지냈으나, 한 번도 조정의 귀척(貴戚)을 방문하지 않았다. 강감(江堪)은 이렇게 말하였다.

“왕찬지는 오늘날의 조은(朝隱 : 신분 높은 사람이 조용히 살아서 마치 은자(隱者)와 같은 사람)이다.” 《지비록》

 

● 원찬(袁粲)은 매양 부소(傅昭)의 집을 지나면서 감탄하였다.

“그 집을 지나면서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조용하고, 방문을 열어 보면 그가 방에 있으니, 어찌 명현(明賢)이 아니랴.” 《하씨어림》

 

● 사혜(謝譓)는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아서 잡스러운 손이 그 집 문을 드나들지 않았다. 가끔 혼자 술을 마시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직 맑은 바람뿐이요, 나와 대작(對酌)하는 것은 다만 밝은 달이 있을 뿐이다.” 《하씨어림》

 

● 왕사미(王沙彌)는 어머니가 돌아간 후에 공락(鞏洛)에서 노닐었다. 그곳 산수(山水)가 탐이 나 범양(范陽)의 노원명(盧元明)과 거록(鉅鹿) 사는 위계경(魏季景)과 계(契)를 만들어 천릉산(天陵山)에 가서 호연(浩然)히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하씨어림》

 

● 왕숙랑(王叔郞 : 숙랑은 북제(北齊) 왕희(王晞)의 자)은 한담(閒談)을 잘하고 욕심이 적었다. 비록 정무(政務)가 바쁘더라도 아조(雅操)를 변하지 않았다. 좋은 날 좋은 경치를 찾아 노래와 시를 읊고 노닐며, 산과 물을 찾아 담소(談笑)로 일을 삼으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물외사마(物外司馬)’라 불렀다. 《하씨어림》

▶물외사마(物外司馬) : 물외(物外)는 ‘세상의 속된 일이나 물정에서 벗어남’을 뜻하고, 사마(司馬)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때 벼슬로, 육경(六卿)의 하나.

 

● 소명태자(昭明太子 : 양 무제(梁武帝)의 장자(長子)로, 이름은 통(統))가 제현(諸賢)들과 함께 현포지(玄圃池)에서 뱃놀이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마땅히 여악(女樂)을 갖추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태자가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좌태충(左太沖 : 진(晉) 좌사(左思)의 자)의 다음과 같은 초은시(招隱詩)만을 외었다.

 

何必絲與竹 하필 음악이 있어야 되는가?

山水有淸音 산수에 스스로 청음이 있는 것을. 《하씨어림》

 

● 왕문해(王文海 : 문해는 양(梁) 왕적(王籍)의 자)가 회계(會稽)에 있을 때 약야계(若耶溪)에 이르러,

 

蟬噪林逾靜 매미 우는 소리에 숲은 더욱 조용하고

烏啼山更幽 까마귀 울어대니 산은 더욱 깊구나.

 

라는 시를 지어 읊었는데 사람들이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 하였다. 《하씨어림》

 

● 중장 자광(仲長子光)이 북저(北渚)에서 30년을 은거(隱居)했는데 자기 노력으로 생긴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왕무공(王無功 : 왕적(王績)의 자)이 그의 깨끗한 지조(志操)를 사랑하여 이사(移徙)하게 하여 가깝게 지냈다. 《하씨어림》

 

● 반사정(潘師正)이 숭산(嵩山)의 소요곡(逍遙谷)에 살 때 고종(高宗)이 불러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정은 대답하였다.

“신(臣)이 바라는 바는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중(山中)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씨어림》

 

 

● 하지장(賀知章)은 도량이 넓고 소탈하였으며 담설(談說)을 좋아하였다. 집안 고모(姑母)의 아들 육상선(陸象先)과 좋게 지냈었는데, 육상선이 일찍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계진(季眞 : 하지장의 자)의 청담(淸談) 풍류(風流)를 내가 하루만 보지 못하면 비린(鄙吝)함이 생기게 된다.” 《하씨어림》

▶비린(鄙吝) : 비루하게 인색함.

 

● 당 현종(唐玄宗)이 이백(李白)을 편전(便殿)에서 불러보니, 신기(神氣)가 청고(淸高)하고 명랑하며 그 출중한 기상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하씨어림》

 

● 미주(眉州)의 상이산(象耳山)에 이백(李白)이 쓴,

 

夜來月下臥酒醒 달빛 아래 드러누워 술을 깨고 나니

花影零亂滿人襟袖 꽃 그림자 어지러이 옷깃에 떨어졌네.

 

라는 시가 있는데, 이야말로 마치 빙호(氷壺)에다 넋[魄]을 씻은 듯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백(李白)이 화산(華山) 낙안봉(落雁峯)에 올라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이 아주 높아서 호흡(呼吸)하는 기운이 상제(上帝)에게 통하는데, 사조(謝眺)의 경인시(驚人詩)를 가지고 와 머리를 긁적이며 청천(靑天)에 묻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씨어림》

 

● 우적(于頔)이 양양(襄陽)을 진무(鎭撫)할 때 여산(廬山)의 부재(符載)가 편지를 가지고 우적에게 와서 매산전(買山錢) 백만금을 빌자고 하니, 우적은 즉시 주었다. 《하씨어림》

 

● 백낙천(白樂天 : 낙천은 백거이(白居易)의 자)이 스스로 자기의 묘지(墓志)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밖으로는 유행(儒行)으로 몸을 닦고, 안으로는 석교(釋敎 불교(佛敎))로 욕심을 제거하고, 옆으로는 도(圖)ㆍ사(史)ㆍ산(山)ㆍ수(水)ㆍ금(琴)ㆍ주(酒)ㆍ영가(咏歌)로 뜻을 즐겁게 했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 사마 온공(司馬溫公 : 온공은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이 독락원(獨樂園)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거기에서 쉬었다. 그러다가 숭산(崇山)의 첩석계(疊石溪)를 구경하고는 그곳을 좋게 여겨 다시 그 근처의 땅을 사서 별관(別館)을 지었다.

그러나 매번 왔다가 수일이 못 되어 돌아가 항상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를 지어,

 

暫來還似客 잠시 왔다 가곤 하니 도리어 손님 같고

歸去不成家 돌아가 버리니 집 같지 않네.

 

하였으니, 공은 참으로 가고 머무는 데 초탈(超脫)하였다. 《저기실(楮記室)》

 

● 범촉공(范蜀公 : 송(宋) 범진(范鎭))이 허하(許下)에 살 때 집 근처에다 큰 집을 짓고 장소당(長嘯堂)이라 이름했다. 앞에는 다미가(茶蘼架)가 있는데 높이와 넓이가 손님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매년 늦봄 꽃이 만발할 때 그 아래에서 손님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약속하기를,

“만일 꽃잎이 술잔 가운데 떨어진 사람은 대백(大白 : 술잔의 이름)으로 한 잔씩 마셔야 합니다.”

하였다. 담소(談笑)하고 떠드는 사이에 미풍(微風)이 지나가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잔에 빠짐없이 꽃잎이 떨어졌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영회(飛英會)라 불렀는데 사방에 전해져서 모두 미담(美談)으로 여겼다. 《패해(稗海)》

 

● 소동파(蘇東坡 : 동파는 송(宋) 소식(蘇軾)의 호)가 형 자명(子明)에게 준 편지에,

“우리 형제가 이제 다 늙었습니다. 마땅히 때때로 즐겨야지 세상일은 개의(介意)할 것이 못 됩니다. 스스로 즐긴다는 것 역시 세속(世俗)의 낙(樂)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속이 한 점 티끌도 없이 탁 트이면 천지 사이의 산천(山川)ㆍ초목(草木)ㆍ충어(蟲魚)의 유(類)가 모두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

 

[작가미상 <산수도(山水圖)>, 지본담채, 122.8 x 50.2cm, 국립중앙박물관]

 

● 소자첨(蘇子瞻 : 자첨은 소동파의 자)이 유경문(劉景文 : 경문은 유계손(劉季孫)의 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평생 동안 기쁜 일이 없었다. 오직 문장을 지을 때 뜻대로 써 내려 가다가 문맥이 많은 변화를 이뤄 뜻을 다하지 못함이 없게 되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장공외기(長公外記)》

 

● 조계인(趙季仁 : 계인은 송(宋) 조사서(趙師恕)의 자)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평생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세상 모든 훌륭한 사람을 다 알고 지내는 것이요, 두 번째 소원은 이 세상 모든 양서(良書)를 다 읽는 일이요, 세 번째 소원은 이 세상 경치 좋은 산수(山水)를 다 구경하는 일입니다.”

하기에, 나는

“다야 어찌 볼 수 있겠소. 다만 가는 곳마다 헛되이 지나쳐 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대저 산에 오르고 물에 가는 것은 도(道)의 기미(機微)를 족히 촉발(觸發)시켜 심지(心志)를 활달하게 하니, 이익이 적지 않습니다.”

하니 계인(季仁)은 말하였다.

“산수(山水)를 보는 것 역시 책 읽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 취향(趣向)의 고하(高下)를 알 수 있습니다.” 《학림옥로(鶴林玉露)》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