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27 - 한정록(閑情錄) 숭검(崇儉) 1

從心所欲 2021. 9. 29. 04:12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숭검(崇儉)은 7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퇴거(退去)한 사람은 맛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의복을 취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검소해야 돈도 절약이 되고 복(福)도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7 ‘숭검(崇儉)’으로 한다.”

 

● 안자(晏子)가 제 나라 재상으로 한 벌의 여우 갖옷[狐裘]을 30년 동안이나 입었다. 《권계총서(勸誡叢書)》

 

● 손숙오(孫叔敖)는 초 나라 영윤(令尹)이 되어 사슴 갖옷[鹿裘]으로 조회하였으며 그가 살고 있던 가옥은 띠로 지붕을 덮은,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집이었다.  《권계총서》

 

● 오고대부(五羖大夫 : 백리해(百里奚))는 피곤하여도 탈 것을 타지 않았으며 더워도 일산(日傘)을 펴지 않았다. 《권계총서》

 

● 소하(蕭何)는 궁벽한 곳에다 전택(田宅)을 장만하고 살았으며, 자기 집을 위하여 담장이나 가옥을 꾸미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손 중에 어진 자가 나면 나의 검소한 것을 본받을 것이고 어질지 못한 자가 나더라도 권세가에게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권계총서》

 

● 왕량(王良)은 대사도(大司徒 : 한 나라 때 교육을 맡은 책임자)가 되어 무명옷을 입고 질그릇을 사용하였다. 사도(司徒)의 관리인 포회(鮑恢)가 일이 있어 그의 집에 들렀다가 대사도 부인이 무명치마를 입고 땔나무를 끌며 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권계총서》

 

● 범사운(范史雲 : 범염(范冉)의 자)은 솥에서 먼지가 날 정도로 청빈(淸貧)했다.  《권계총서》

 

● 범선(范宣)은 마음씨가 깨끗하고 행동이 검소했다. 한 예장(韓豫章 : 예장 태수를 지낸 한백(韓伯))이 비단 1백 필을 주어도 받지 않고 반으로 감하여 50필을 주어도 받지 않았다. 이와 같이 반감하여 드디어는 1필에까지 이르렀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뒷날 한 예장이 범선과 같은 수레를 타고서 그 안에서 옷감 2장(丈)을 끊어 범선에게 주면서,

“사람으로서 어찌 자기 부인에게 홑치마 하나 없도록 할 수야 있겠는가.”

하니, 그제야 범선이 웃으면서 받았다. 《세설신어(世說新語)》

 

● 도연명(陶淵明 : 도잠(陶潛)의 자)은 매우 대범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진(晉)ㆍ송(宋) 시대에 으뜸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굶주린 것으로 말하면 끼니가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고, 항아리에는 저장된 곡식이 없었으며, 추울 때에도 짧은 옷을 누덕누덕 기웠으며 갈포옷을 겨우내 입었고, 거처로 말하면 둘레가 쓸쓸하고 가옥은 햇빛이나 바람을 가리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그 곤궁함이 극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팽택영(彭澤令)으로 있을 때 공전(公田)에 모두 차조[秫]를 심으면서,

“나는 술에 실컷 취하게만 되면 족하다.”

하니, 그의 아내가 메벼[秔]를 심을 것을 굳이 청하므로 1경(頃)을 나누어 50묘(畝)에는 차조를 심고 50묘에는 메벼를 심었다. 그 자서(自敍)에도,

“공전의 이(利)로 술을 마련하기 충분하겠기로 벼슬을 구하여 곡식이 익기만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더니 중추(仲秋)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지 80여 일에 즉시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으니 이른바 메벼건 차조건 맛보지를 못했다.”

했으니, 슬프다.

 

유유간(庾幼簡)은 조용하게 은거하기를 좋아하여 외부와의 교제가 없었다. 임천왕(臨川王)이 고을에 부임하여 특별히 유간을 중히 여겨 보리 1백 곡(斛)을 보내 주니 유간이 심부름 온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는 미록(麋鹿)과 짝하여 나무를 하고, 끝내는 그 털갈이한 털로 옷을 해 입으며, 일월과 짝하여 세월을 보내고, 스스로 농사지어 녹(祿)을 먹으니 대왕(大王)의 은혜가 이미 깊다고 하겠습니다.”

하면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씨어림(何氏語林)》

▶미록(麋鹿) : 고라니와 사슴.

 

● 진원용(陳元用)은 집이 극히 부요(富饒)하고 책 모으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치산(治産)에는 힘쓰지 않았다. 누가 치산에 대해 묻기라도 하면 원용은,

“재물 모으기를 좋아하는 자손이 있다면 전장(田莊)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장만할 것이고, 좋아하는 자손이 없으면 비록 전장을 남겨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뒷날 세 손자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청빈한 것을 스스로 지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선인(先人)의 격언(格言)을 잊을 수가 없다.” 《공여일록(公餘日錄)》

▶치산(治産) : 생활(生活)의 수단(手段)을 세움. 가업에 힘씀.

 

● 이의염(李義琰)이 정침(正寢 : 가장이 거처하는 본채)이 없으므로 아우 의진(義璡)이 형을 위하여 집 재목을 사서 보냈더니, 의염이 사양하고서 받지 않았다. 이에 의진이,

“무릇 승위(丞尉) 벼슬만 해도 큰 집을 가지는데, 지위가 높으시면서 어찌 아랫사람처럼 사십니까?”

하고 물으니, 의염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말에 ‘일이란 두루 좋을 수는 없고, 사물은 다 같이 흥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미 고귀한 벼슬자리에 처하고, 또 넓은 집에 거처한다면, 훌륭한 덕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필연코 재앙을 받을 것이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이항(李沆)이 집을 짓는데, 봉구문(封丘門) 내청사(內廳事) 앞이 겨우 말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협소하였다. 어떤 사람이 너무 협착(狹窄)하다고 하니, 이항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거처하는 집은 당연히 자손에게 물려줄 것인데, 이 집이 재상(宰相)의 청사라면 실로 협소하다. 그러나 대축(大祝)으로 예를 받드는 자의 청사로는 이미 넓은 것이다.”

하였다. 누추한 거리에 있는 집이 중문(重門)도 없으며 담과 벽이 퇴락했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마루 앞의 난간이 허물어졌는데, 그 아내가 집 관리하는 사람에게 수선하지 말도록 하고 항(沆)을 시험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항은 아침저녁으로 보면서도 끝내 아무 말도 없다가 그 동생 유(維)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이것으로써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

하였다. 집안사람이 매양 가옥을 건사하라고 권하면, 이항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후한 녹을 먹고 때로는 하사품도 있으니 주머니 속을 계산하면 역시 집을 치장할 만도 하다. 그러나 불전(佛典)에 의하면 이 세상을 허망한 것이라 했는데 어찌 원만하게 뜻대로 마음에 맞기를 바라겠느냐. 지금 새 집을 사서 한번 수리한다고 해도 조석으로 어찌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영구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새가 수풀 한 가지에 깃들 듯 애오라지 스스로 만족할 뿐이다. 어찌 훌륭한 집을 일삼을 것인가.”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 장문절(張文節)은 재상이 되어서도 서기(書記)로 있을 때와 같이 하인들의 수발이 없이 자기 스스로 생활해 나갔다. 어떤 사람이 혹 그것을 간하면 공은 탄식하기를,

“검소한 데서 사치한 데로 들어가기는 쉽고, 사치한 데서 검소한 데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오늘의 녹봉(祿俸)이 어찌 항상 그대로 있을 것인가. 하루아침에 오늘의 처지에서 달라진다면 사치한 생활이 오래되었는지라 갑자기 검소하게 살기는 불가능하여 반드시 낭패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벼슬을 하거나 벼슬을 버리거나, 살아 있거나 죽거나 하루같이 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명신언행록》

 

● 두기공 연(杜祈公衍)은 손님을 접대할 적에 채색한 칠기(漆器)를 많이 사용하였다. 어떤 손님이 면대해서 이러한 행위를 칭찬하여,

“공은 재상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청빈하게 사십니다.”

하면, 공은 시중드는 자들에게 명하여 백금(白金)으로 된 연회용 그릇들을 가져오게 해서 앞에 진열하고는,

“내가 이러한 물건들이 궁핍해서가 아니라 우아한 것을 내 스스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저기실(楮記室)》

 

● 송(宋) 나라의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나의 선군(先君)이 군목 판관(群牧判官)이 되었을 때 손님이 오면 언제나 술상을 차려 대접했는데, 세 순배나 다섯 순배를 돌리고, 많아야 일곱 순배를 넘지 않았고, 술은 시장에서 사온 것이며, 과일은 배ㆍ밤ㆍ대추ㆍ감 등에 불과했고, 안주는 포(脯)ㆍ육장[醢]ㆍ나물국 등이며, 용기(用器)는 자기(瓷器)나 칠기(漆器)였다. 당시 사대부들이 모두 그러했으되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았다. 모이는 횟수가 잦을수록 예가 더욱 근실해지고, 음식물이 박하되 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런데 근일의 사대부는 모두 그렇지 않아서, 술이 집에서 담근 것이 아니거나, 과일이 먼 지방에서 온 진귀한 것이 아니거나, 음식물이 여러 품목이 아니거나, 음식을 담은 그릇이 온상에 가득 차지 않으면 감히 모임을 만들지도 않고, 반드시 여러 날을 준비한 뒤에야 초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혹 이렇게 하지 않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다투어 가면서 비난하여 인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치한 풍속을 따르지 않는 자가 드물다. 이와 같이 풍속이 퇴폐해졌으니 관직에 있는 자로서 차마 이러한 풍속을 조성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공이 낙(洛) 땅에 있을 때, 문 노공(文潞公 :문언박(文彦博))ㆍ범 충선공(范忠宣公 : 범순인(范純仁)의 시호)이 서로 약속하고 진솔회(眞率會)를 베풀었는데, 거친 밥 한 그릇에 술이 두어 순배로 그것도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진솔회(眞率會) : 귀천을 불문하고 참석한 순서에 의하여 자리에 앉아 친목을 도모하는, 형식을 초월한 연회

 

문 노공이 시를 짓기를,

 

啜菽眞甘顔子陋 콩을 씹는 좋은 맛은 안자가 즐긴 바요

食鮮不愧庾郞貧 음식이 약소하니 유유간(庾幼簡)의 가난도 부끄럽지 않네.

 

하니, 범공이 화답하기를,

 

蓋簪旣屢宜從簡 벗들이 자주 모이나 간소함을 따르고

爲具雖疏不愧貧 장만한 것 하찮으나 가난을 부끄러워 않네.

 

하니, 공이 또 화답하기를,

 

隨家所有自可樂 가세 따라 있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니

爲具更微誰笑貧 갖춘 것 없다고 그 누가 가난하다 비웃으리.

 

하여, 제공(諸公)들은 기필코 당시의 폐풍을 구제하려 하였다. 이것을 본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어찌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복(福)을 낭비하지 않고 재물을 늘리는 일은 일상의 작지 않은 일이므로 내가 갖추 기록하여 여러 동지들에게 주려 한다. 《자경편(自警編)》

 

[작가미상 <산수도(山水圖)> 中 산시청람(山市晴嵐), 지본담채, 122.8 x 50.2cm, 국립중앙박물관 ㅣ 산시청람(山市晴嵐)은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한 화제(話題)이다.]

 

● 온공(溫公)이 낙(洛) 땅에서 여러 노인들과 더불어 진솔회를 열고, 스스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우리들 무리 중에 허례(虛禮)를 숭상하는 이 없어, 오는 손님 맞이하지도 않고, 가는 손님 전송하지도 않네. 손님과 주인은 스스럼이 없어 줄지어 앉은 자리 차서(次序)가 없네. 진솔(眞率)한 것으로 언약을 삼고, 간소한 것을 다 갖추었네. 있는 술로 또한 잔 돌리다가 술 다하면 그만 그치네. 청아한 거문고 소리 한 곡조요 좋은 향 한 심지, 한가로이 고금의 일 이야기하다 조용히 산수(山水)를 완상(玩賞)하네. 남의 옳고 그름 말하지 않고 관아(官衙)의 일은 논하지 않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형식에 구애 없이 뜻대로 행동하네. 담담(淡淡)한 가풍(家風)은 자연의 맑은 운치며, 도의(道義)의 사귐은 이와 같을 뿐이네. 비린내 나는 고기를 줄지어 벌여 놓고, 굽어보고 우러러보느라 분주하게 읍하고 절하며, 내심으로 진정이 아니면서도 겉으로는 한갓 거짓만을 꾸미고, 한결같이 이해에 얽매여 반목(反目)으로 서로 질시(嫉視)하니 이러한 것들은 세속의 사귐이라 나로서는 모두 버리는 바일세.” 《지비록(知非錄)》

 

● 자첨(子瞻 :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이 황주(黃州)에 있을 때 그와 이웃하여 왕래하던 자들 역시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스스로 말한 삼양(三養)이 있는데,

“분수에 편안하여 복을 기르고, 위장을 편히 해서 기(氣)를 기르며, 비용을 절약하여 재물을 늘린다.”

는 것이 그것이다. 섭석림(葉石林 : 석림은 섭몽득(葉夢得)의 호)이 말하기를,

“산 속에서 사니 반찬은 언제나 얻을 수 있고, 내가 또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이 두 가지를 같이 취하여 참작해서 행하겠다.”

하고, 농담 삼아 손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빈객을 대접하던 예로는 연(燕)과 향(享)이 있었는데, 향은 약간 감쇄하는 것이니 베푸는 데는 각각 마땅함이 있다. 이제 우연히 모였을 경우에는 자첨이 행한 향으로 하고, 때가 아닌데 특별히 모였을 경우에는 온공(溫公)이 행한 연을 베풀어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쓰리라. 필시 먼저 고한다고 해서 비록 손님들이 모두 웃을 것이지만 역시 내 뜻은 꺾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지비록》

 

● 두기공(杜祈公 : 기공은 두연(杜衍)의 봉호)의 어록에 공은 재상이 되어서도 집에서 식사할 때는 오직 국수 한 그릇 밥 한 그릇뿐이었다. 누가 그 검소함을 칭찬하기라도 하면 공은 말하기를,

“나는 본디 일개 서생(書生)이었을 뿐이다. 명예와 직위, 의복과 기용(器用)은 모두 국가의 소유이다. 녹봉의 나머지를 가난한 친족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음식이 남아날까 두려워서인데, 감히 혼자 먹을 수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명위(名位)와 작록(爵祿)을 국가에서 빼앗아 간다면 즉시 일개 서생이 될 것인데, 장차 어떻게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

하였고, 황정견(黃庭堅)은 말하기를,

“내가 의주(宜州)에 유배가 있을 적에 관아에서 성중에 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므로 이불을 안고 성 남쪽에 가서 묵는데 내가 간 곳에는 비바람을 막을 만한 것도 없고 저자의 시끄러운 소리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본업이 농상(農桑)이니 내가 진사(進士)가 되지 못했다면 들 가운데의 농가가 이러했을 것인데 이것을 참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했다. 그러므로 선비는 부귀할 때를 당해서 어려울 때를 걱정하고 항상 스스로 반성하여 살아가는 데는 정(定)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구태연(仇泰然 : 태연은 구여(仇悆)의 자)이 사명(四明)의 태수로 있을 때에 한 막하(幕下)의 관리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그에게 묻기를,

“공의 집에서는 하루에 쓰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식구가 열인데 하루에 1천 전(錢)을 씁니다.”

하였다. 구태연이 놀라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가?”

하니, 그가,

“아침에는 육류를 조금 갖추고, 저녁에는 나물국을 먹습니다.”

하였다. 이에 구태연이,

“나는 태수가 되었어도 평소에는 감히 육류를 먹지 못하고 채소만 먹는데 공은 소관(小官)으로서 육류를 상식하니 진정 청렴한 선비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이 뒤부터 소원하게 대했다. 나는 일찍이 생각했다. 백성이 복을 받는 것은 관리의 청렴에서 나오는 것이고, 관리의 청렴은 검소함을 달게 여김으로써 이며 검소함은 꿋꿋하게 참는 절조(節操)에서 생기는 것인데, 의리로 욕심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이렇게 할 수 있다.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저기실(楮記室)》

 

● 악양자(樂羊子)가 언젠가 길을 가다가 금 한 덩어리를 주워서 집으로 돌아와 그의 아내에게 주었더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저는 들으니 지사(志士)는 도천(盜泉)의 물도 마시지 않고, 청렴한 사람은 무례한 태도로 주는 음식은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주운 물건을 가지고 이(利)를 구하여 행동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하매, 양자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 금덩이를 들에 버렸다. 《하씨어림》

▶지사(志士)는 ... 마시지 않고 :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공자가 도천(盜泉)이라는 곳을 지날 때, 샘물이 ‘도둑의 샘물’이라는 뜻이라 몹시 갈증이 났지만, 그곳의 샘물에 눈길 한번 던지지 않고 그곳을 지났다. 또한 공자가 승모(勝母)라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을 때, 이미 해는 저물고 사방이 어두워졌으며, 배도 고픈 상태였다. 그러나 마을 이름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공자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지친 발길을 재촉하였다는 고사(古事)가 전한다.

 

● 진현달(陳顯達)이 아들 상휴(尙休)가 진불(塵拂 : 고라니 꼬리로 만든 파리채)을 가지고 있자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무릇 사치하고서 패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라니 꼬리로 만든 파리채는 바로 왕씨(王氏)나 사씨(謝氏) 집안의 물건인데 네가 이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면서 가져다가 불태워 버렸다.

▶왕씨(王氏)나 사씨(謝氏) :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이후 여러 호족 세력이 등장했는데, 그중에서도 왕씨와 사씨는 명문(名門)으로서의 명성을 계속 누렸으므로 이들 두 성씨가 명문(名門)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범 문정공(范文正公 :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 아들 순인(純仁)을 장가보내 며느리를 맞으면서 경계하기를,

“고운 비단이 어찌 휘장을 만드는 물건일까 보냐. 우리 집안은 본디 검소한 것으로 가풍을 삼는데 어찌 감히 우리 가법을 무너뜨리려고 이런 것을 가지고 왔느냐. 뜰에서 태워 버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것은 경우가 같은 것들이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사현(謝玄)이 어릴 때 자색 비단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 좋아하자 그의 숙부인 사안(謝安)이 그것을 걱정했으나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장난으로 구경하는 체하면서 가져다가 불태워 버렸으니 사치한 물건은 왕씨(王氏)나 사씨(謝氏) 역시 경계한 것인데, 하물며 그들만 못한 사람들이겠는가.

주백년(朱百年)의 아내 공씨(孔氏) 역시 고귀한 지조가 있었다. 백년이 산중에서 졸하자 채흥종(蔡興宗)이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어 쌀 1백 곡(斛)을 보내 주자 공씨는 노비를 보내 군아(郡衙)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고, 양홍(梁鴻)의 아내에 비유하였다.  《하씨어림》

▶양홍(梁鴻)의 아내 : 이름은 맹광(孟光). 나이 30이 넘도록 결혼을 거부하다가 31세에 당시 어질기로 유명했던 양홍에게 시집을 가서 정성껏 섬겼으므로 현처로 소문이 났다. 양홍은 후한(後漢)의 대학자로 장제(章帝)가 누차 불렀으나 성명을 고치면서까지 은둔하고 나가지 않았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