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숭검(崇儉)은 7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퇴거(退去)한 사람은 맛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의복을 취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검소해야 돈도 절약이 되고 복(福)도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7 ‘숭검(崇儉)’으로 한다.”
● 어록(語錄)에 이렇게 말했다.
“사치한 자는 3년 동안 쓸 것을 1년에 써버리고, 검소한 자는 1년 동안 쓸 것을 3년이 되도록 쓴다. 지극히 사치한 자는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고 아주 검소한 자는 오히려 여유가 있다. 사치한 자는 부유해도 만족하지 않고, 검소한 자는 가난해도 여유가 있다. 사치한 자는 언제나 마음이 가난하고, 검소한 자는 언제나 마음이 풍요하다. 사치한 자는 친한 사람을 좋아하므로 잘못이 많고, 검소한 자는 사람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에 화(禍)가 적다. 사치한 자가 임금을 섬기면 반드시 욕됨이 있고, 검소한 자가 임금을 섬기면 반드시 그 벼슬을 온전히 보존한다. 사치한 자는 근심이 많고, 검소한 자는 복이 많다. 검소함을 따르는 자는 천하의 통치자가 될 수 있다.” 《지비록》
● 온국 문정공(溫國文正公 : 온국은 사마광(司馬光)의 봉호(封號).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이 덮던 베 이불에는 예서(隷書)로 1백 10자가 씌어 있는데, 그 중에 ‘경인(景仁 : 범진(范鎭)의 자)이 준 것’이라 쓴 것은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 범촉공(范蜀公)이 기증한 것이란 뜻이고 또 ‘요부(堯夫)가 쓴다.’라고 한 것은 우복야(右僕射) 고평공(高平公)이 지은 것이란 뜻이다. 원풍(元豐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 온공이 낙양(洛陽)에 있을 때 촉공(蜀公)이 허(許) 땅으로부터 와서 이 이불을 주었는데 고평공이 이에 포금명(布衾銘)을 지어 학자(學者)들을 경계하였다. 공이 그 글의 뜻을 사랑하여 이불 머리에 썼는데 병이 깊게 되자 동부(東府)가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심의(深衣)로 염을 하고 이 이불을 덮었는데, 그 이불의 명(銘)에 이르기를,
“여곽(藜藿)이 꿀맛 같고 거친 베가 따뜻하네. 명교(名敎)를 지키는 즐거움과 덕의(德義)의 높음은 구하기는 매우 쉽고 누리면 언제나 편안하도다. 사치스러운 비단과 고량진미(膏粱珍味), 융성한 권총(權寵)과 번거로운 이욕(利慾)은 어렵게 얻더라도 화와 욕이 먼저 오네. 얻기는 쉽고 잃기는 어려우며 위태한 것 버리고 편안한 데로 나가는 것 우자(愚者)도 알겠거니 선비야 어찌 모르리. 안자(顔子)가 즐긴 단사(簞食) 만세(萬世)의 사표(師表)일세. 주왕(紂王)은 경대(瓊臺)에 살았으되 죽어서는 독부(獨夫)가 되었네. 군자는 검소한 것으로 덕을 삼고 소인은 사치로 자신을 망치나니, 그렇다면 이 이불이 하찮은 것이라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저 베 이불은 공손홍(公孫弘)이 장유(長孺)로부터 면박 받은 것이며, 이 베 이불은 사마광(司馬光)이 고평에게서 명을 지어 받은 것으로서, 진실과 거짓이 갈리는 길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기유림(問奇類林)》
▶고평공(高平公) : 범중엄(范仲淹)의 차자인 범순인(范純仁)의 봉호. 요부(堯夫)는 자. ▶여곽(藜藿) : 명아주 잎과 콩잎. 변변치 않은 음식을 가리킴. ▶권총(權寵) : 권세(權勢)와 임금의 총애(寵愛) ▶단사(簞食) : 대소쿠리에 담은 밥.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는 매우 가난하여 끼니 거르기가 일쑤였으나 늘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런 안회가 서른하나의 나이에 요절한 뒤 공자는 안회를 이렇게 칭찬했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거처하며 산다면, 다른 사람은 그 근심을 견디어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이후 ‘단사표음(簞食瓢飮)’은 가난한 살림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경대(瓊臺) : 옥으로 장식한 궁전과 누대(樓臺)라는 뜻으로 호화로운 궁전을 이르는 말. ▶공손홍(公孫弘)이...면박 받은 것 : 장유(長孺)는 급암(汲黯)의 자. 공손홍과 급암은 모두 한 무제(漢武帝) 때의 현신(賢臣)으로, 공손홍이 재상의 위에 있으면서도 베 이불을 사용하자 당시 친하게 지냈던 급암이 황제 앞에서 “공손홍이 지위가 삼공(三公)으로 녹봉이 많으면서도 베 이불을 덮는 것은 검소함이 거짓 꾸며 명예를 낚기 위한 것”이라고 면박하자, 공손홍은 “급암이 아니면 내 병통을 지적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여 급암의 힐책을 달게 여겼다는 고사. |
● 우수(迂叟 : 사마광(司馬光)의 자호(自號))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귀로 사물을 보고 눈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자가 드물다.”
하니, 이 말을 듣고 어떤 자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자,
“의관(衣冠)은 외모를 꾸미는 것이니 몸에 맞아야 아름다운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소리 듣기를 바란다. 어찌 이것이 귀로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식물은 맛을 보고 먹는 것이니 입에 맞는 것이 좋은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과자에 알록달록 조각을 하여 음식상을 감상하니 이것이 어찌 눈으로 먹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 대답하였다. 《공여일록》
● 나대경(羅大經 : 자는 경륜(景綸))은 이렇게 말하였다.
“검소하면 네 가지 이익 되는 것이 있고 부지런하면 세 가지 이익 되는 것이 있다. 대체로 탐심과 음란은 사치한 데서 생기지 않는 것이 없다. 검소하면 탐욕스럽지도 음란하지도 않아 덕성을 기를 수 있다. 사람의 수용(受用)은 저절로 일정한 양이 있으므로 아끼고 담박하게 쓰면 장구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니 그렇게 하면 수(壽)를 누릴 수 있다. 술에 취하거나 고기를 배부르게 먹으면 사람의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만약 소채를 먹게 되면 위장이 맑아져서 더러운 찌꺼기가 없어지니 정신을 수양할 수 있으며, 사치하면 망령되고 구차하게 이(利)를 구하느라 지기(志氣)가 비루하게 되는데, 한결같이 검약을 따르면 타인에게 요구할 것이 없고 자신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어 기(氣)를 기를 수 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반드시 굶주림을 당하게 되고, 누에를 치지 않으면 반드시 추위에 떨게 되는데, 이것이 부지런하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농민은 낮에는 힘써 농사짓고 밤에는 나른해서 단잠을 자니 사념(邪念)이 나올 곳이 없으니, 이것이 부지런하면 음사(淫邪)를 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의 지도리[樞]는 좀이 쏠 틈이 없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고 했다. 주공(周公)은 삼종(三宗)과 문왕(文王)이 수(壽)한 것을 논하면서 부지런한 것에 돌렸으니, 이것이 부지런하면 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양소윤(梁蕭允)이 말하기를,
“화(禍)는 모두 이욕에서 생기는 것이니, 진실로 이(利)를 구하지 않는다면 화가 어디로부터 생기겠느냐.”
하였고, 고희무(顧希武)는 말하기를,
“재물을 축적하면 근심을 마련하는 것이고, 근심은 또한 많은 재물에서 생기니, 재물을 축적해서 근심하는 것과 재물이 없어 근심이 없는 것과는 어느 것이 나으냐.”
했으니, 모두 명언(名言)이다. 《저기실(楮記室)》
● 옛날 사람들은 가정과 국가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 오직 농사를 귀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주(周)나라 사람은 농사짓는 어려움으로써 왕업의 근본을 삼았고, 진(秦)나라 사람은 농사를 힘껏 지어 작상(爵賞)을 받았으며 한(漢)나라 때는 농사를 힘써 지은 것으로 부름을 받았다. 옛사람들이 글자를 만든 것을 보면, 부(富) 자는 전(田) 자를 따랐으니 말하자면 ‘부’ 자는 밭 ‘전[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밭 ‘전’ 자는 한 입[一口]을 따랐으니 말하자면 전토가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또 식구가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저기실》
● 동파(東坡 : 소식(蘇軾)의 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왕 참군(王參軍)의 땅을 빌려 채소를 심었는데 땅은 반 묘(畝)가 되지 않았는데도 나와 그대가 1년 내내 채소를 포식했다. 밤중에 술이 취하여 술기운을 풀 방법이 없을 때면 채소를 뽑아서 익혀 먹으면, 미각에는 토양의 기름기를 함축했고 그 기(氣)는 서리와 이슬을 머금어서 비록 고량진미라도 나을 것이 없었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어떤 물건이기에 다시 탐심을 낼 것인가. 이어 시 네 구를 짓기를,
秋來霜露滿東園 가을 되니 상로가 동원에 가득한데
蘆菔生兒芥有孫 무는 뿌리 생기고 겨자는 싹이 나네.
我與何曾同一飽 누구와 더불어 배불리 먹을까
不知何苦食鷄豚 고기를 먹겠다고 무엇 하러 애쓰겠나.
하였다.
내가 짐짓 그 여사(廬舍)를 안소(安蔬)라 하였다.”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
▶여사(廬舍)는 오두막집, 안소(安蔬)는 편안한 나물. |
● 동파가 황주(黃州)에 있을 때 아침저녁 음식이 고작 술 한 잔 고기 한 점에 불과했고, 귀한 손님이 있으면 그렇게 세 차례 하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초대할 자에게도 이렇게 알리노니, 첫째 분수에 맞게 복을 기르고, 둘째 위장을 편안히 하여 기(氣)를 기르며, 셋째 비용을 절약하여 재산을 늘리라.” 《장공외기(長公外記)》
● 동파(東坡)의 을첩(乙帖)에 이렇게 씌어 있다.
“내가 50년을 살면서 비로소 살아가는 대요(大要)는 바로 인색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면 검소(儉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검소란 속인(俗人)들의 그것과는 같지 않아 담담한 맛이 있다. 《시경(詩經)》에 ‘크게 화목하고 크게 공경하니, 복 받으심도 매우 많으시네.[不戢不難受福不那]’라고 했으니, 먹고 싶은 입맛을 어찌 다 충족시키겠는가. 매양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 역시 복(福)을 아끼는 것이며, 수(壽)를 연장하는 길이다. 내가 경사(京師)에 가면 마땅히 이 계책을 쓰리라. 나는 산림(山林)의 사람으로서 이 계책을 일소에 붙여서는 안 된다.” 《미공십부집(眉公十部集)》
● 나대경(羅大經)이 이렇게 말하였다.
“비단옷 흰 쌀밥은 옛사람의 말에 ‘오직 임금이라야 이것을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천하에 공로가 있기 때문에 분수상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일개 선비가 한때 뜻을 얻었다고 해서 즉시 절제 없이 사치를 하고 심지어는 웃옷을 능라 같은 비단으로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가 언제 패망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곧 그 일을 직접 보는 사람들이 사치를 탐하는 경계로 삼을 만하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진신(搢紳)의 집에는, 비첩(婢妾)이 많기 때문에 여색(女色)을 탐하기에는 족하나 수명의 원천을 기르는 데는 부족하고, 노복이 많기 때문에 위엄을 부리기에는 족하나 안정(安靜)한 복을 끼쳐 주기에는 부족하고, 전택(田宅)이 많으니 사치함을 과시하기에는 족하나 권세가에게 침탈을 받아 자손이 패몰하는 화를 막기에는 부족하다. 이 때문에 무후(武侯 : 제갈량(諸葛亮))의 부인은 추물이었고, 형공(荊公 :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나귀는 절름발이였으며, 소 상국(蕭相國 : 소하(蕭何))은 담장과 가옥을 치장하지 않았으니 여러 선배 철인(哲人)들에게 질정(質正)하면 법 받을 것 아님이 없다. 여러 군자들이여 어찌하여 이를 따르지 않는가. 《임거만록(林居漫錄)》
● 주휘(周輝)가 언젠가 거공(鉅公)을 모시고 있을 때 이야기가 항산(恒産)에 미쳤는데,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전토가 없을 수 없다. 전토가 있으면 벼슬살이에 나가고 물러감이 자유로워 자기의 뜻을 펼 수가 있고, 선비는 위로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양육하고 복랍(伏臘 : 복일(伏日)과 납일(臘日). 즉 하제(夏祭)와 동제(冬祭))을 대강이나마 차릴 수 있으며 기절(氣節)을 잃기에 이르지 않으니, 전토가 있으면 복을 누릴 수 있다. 대개 ‘복(福) 자는 전(田) 자와 의(衣) 자를 따른다.’ 했는데, 비록 이 설을 인정한다고 해도 30년 동안에 끝내는 한 자의 땅도 없으니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려 해도 의식(衣食)이 부족하고 복의 기반이 미약함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마온공(司馬溫公)에게 선비의 생계에 관해 물었더니 뜻이 서로 같았다. 내가 또 일찍이 복리(福利)를 구하는 자들에게 농담 삼아 말하기를 ‘복(福) 자는 의(衣) 자와 전(田) 자를 따랐으니 겨우 한 입[口]의 일이다. 배[腹]만 먹여 살리면 된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방손지(方遜志)가 일찍이 병들어 누웠는데 양식이 떨어졌다. 집안사람이 양식이 떨어졌음을 알리자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한 달 동안에 아홉 끼니를 먹고 쌀독에는 곡식 한 톨 없던 사람이 있었는데, 곤궁한 것이 오직 우리뿐인가.”
하자, 서로 보며 크게 웃었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 송 문헌(宋文憲 : 문헌은 송염(宋濂)의 시호)이 전택(田宅)을 장만하지 않고 누가 자손을 위한 계책을 권하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하고 가멸함이 어찌 한 가정의 일인가. 나는 이 말을 유산으로 남겨주리라.”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가멸 : ‘부(富)’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 |
● 호거인(胡居仁)은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다 해진 옷에 거친 밥을 먹으며 살면서도 태연히 이렇게 말하였다.
“인의(仁義)로 몸을 윤택하게 하고 책꽂이로 집을 장식하면 만족하다.” 《명세설신어》
● 장 문의(章文懿 : 문의는 장무(章懋)의 시호)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항상 곤궁에 처하면 매양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굶어 죽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덕을 칭송한다.’라고 왼다. 그렇게 되면 문득 정신이 상쾌해져서 곤궁한 일에 동요되지 않게 된다.”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
● 장간공(莊簡公) 장열(張悅)은 소박한 것을 좋아하여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손님이 오면 머물러 두고 검소한 반찬으로 대접했다. 안주는 있는 것으로 준비했으며, 술은 있는 양대로 대접했다. 비록 새로운 친구라도 성대하게 상을 차리지 않았으며, 높은 손님이라도 가축을 잡지 않았다. 이것은 사치한 것을 경계하여 검소하게 삶으로써 살림을 오래 유지하려고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번거로운 일상생활을 면하여 생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었다.” 《공여일록》
● 장 소참 계맹(張少參繼孟)은 성품이 본디 청백 검소했는데, 서애(西涯)ㆍ포정(蒲汀) 등이 매양 고삐를 연하여 찾아오면 공은 머물러 앉히고 거친 밥에 사이사이 채소나 과일을 내오기도 하고, 술은 서너 순배만 하고는 그쳤다. 여러 노인들이 공의 집을 나와서는 이렇게들 말했다.
“우리가 장자(張子)의 인정어린 밥 한 그릇을 먹었더니 특별한 집 성대한 잔치보다 배가 부르다.” 《장설소췌(藏說小萃)》
● 유 충선공(劉忠宣公 : 충선은 유대하(劉大夏)의 시호)이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진현달(陳顯達)이 아들 상휴(尙休)가 고라니 꼬리로 만든 파리채를 가지고 있자 ‘무릇 사치하고서 패망하지 않는 이는 없다. 고라니 꼬리로 만든 파리채는 왕씨(王氏)나 사씨(謝氏) 가문의 물건이니 네가 이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고는 가져 오라고 하여 불태워 버렸다. 범 문정(范文正)은 아들 순인(純仁)이 장가를 들자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능라 같은 비단은 어찌 휘장으로 만들 물건이냐. 우리 집안은 본디 청백 검소한 집인데 우리 가법(家法)을 어지럽히려고 감히 이런 것을 가져왔느냐. 뜰에서 불태워 버림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비슷하다. 선배들이 자신을 단속하고 가정을 다스리기에 엄격하기가 이와 같았다.” 《장설소췌》
● 유 충선공은 아들들에게 독서를 하며 겸하여 농사도 힘껏 지을 것을 가르쳤다. 언젠가 우중(雨中)에 농사를 감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근면한 것에 익숙해지면 피로를 잊게 되고, 안일한 것에 길들면 나태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하는 고생은 장차 도움이 될 것이다.” 《세설신어》
● 유 충선공의 아버지 인택(仁宅)이 정통(正統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연간에 어사(御史)가 되어 서울에 있었다. 양 문정공 부(楊文正公溥)가 성묘(省墓)를 하고 조정(朝廷)으로 돌아가다가 화용(華容) 땅을 지나면서 충선공의 집을 들러 충선공에게 묻기를,
“너의 아버지 계시냐?”
하니, 대답하기를,
“여행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다시,
“너의 어머니께서는 어디 계시냐?”
하니,
“이웃집에 가루를 빻으러 가고 안 계십니다.”
하였다. 이에 집안에 있는 가재를 둘러보고 드디어는 충선공을 이끌고 침실에 가니 침상에는 오직 부들자리에 무명 이부자리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절조(節操)가 이와 같으니 어사의 직책에 알맞다.”
하고는 가버렸다. 유공이 돌아온 뒤 충선이 그 일을 아뢰자 유공이,
“이는 반드시 향선생(鄕先生) 양소보(楊少保)일 것이다. 그의 사람됨이 찬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이 지나쳐 보는 것을 자세히 관찰한 것이다.”
하였다. 상고해 보니, 문정공이 화용 땅을 지난 시기는 충선공이 이 갈 나이였다고 한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나일봉(羅一峯 : 일봉은 나륜(羅倫)의 호)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 손님이 오면 머물러 두고 밥을 대접하는데 식량이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부인이 마르지도 않은 겉곡 두어 되를 얻어다가 한편으로는 볶고 한편으로는 찧느라고 날이 저물 때까지 해도 일봉은 태평스럽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명야사휘(明野史彙)》
▶겉곡 : 겉껍질을 벗겨 내지 않은 곡식. |
● 장문의(章文懿)가 이렇게 말하였다.
“손님을 접대하는 예는 마땅히 옛사람의 뜻을 가져야 한다. 설 문청(薛文淸 : 설선(薛瑄)의 시호)의 손님 접대하는 것을 들어보니 단지 닭 한 마리에 기장밥 한 그릇이요, 술 석 잔에 밥을 먹으면 끝낸다고 했으니 이것이 법이 될 만하다.” 《세설신어》
● 문목공(文穆公) 허국(許國)은 내각(內閣)에 있을 때 녹봉을 가난한 친족에게 주어 버려,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언젠가 작은 배를 타고 오강(吳江)에 사는 신 소사(申少師)를 찾아갔는데 해진 푸른 무명베옷에 다 떨어진 일산을 가지고 방문하니, 문지기가 허공인줄 알아보지 못하여 해가 중천에 뜨도록 명함을 들여보내지 않았으되 허공 역시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소사의 아들 태복공(太僕公)이 문틈으로 보니 바로 허공이라 급히 나가 맞아들였다. 소사가 만나보고 반가워하여 술을 마시며 이틀 밤을 묵고 돌아갔는데 호사자(好事者)들이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전한다. 《이담유림(耳談類林)》
● 황헌(黃憲) 부권(副卷)은 가세가 빈한했으나 손님을 좋아했다. 손님이 오면 스스로 부엌에 들어가서 잠방이를 입고 요리 준비를 완료하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곤 했다. 주원부(周元孚)가 공(公)을 방문하니 공이 대단히 반가워하면서 담화를 하는데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자 원부가,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차렸는가?”
하고, 이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자 공이,
“그러면 그대가 직접 요리를 해 먹지.”
하였다. 같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가 방으로 들어가는데 원부가 가만히 엿보니 온 집안이 마치 절간같이 쓸쓸하였다. 원부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다행히 복희씨(伏羲氏)의 세상에서 노는 것 같구나.”
하였다. 《장설소췌(藏說小萃)》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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