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30 - 한정록(閑情錄) 임탄(任誕) 2

從心所欲 2021. 10. 2. 07:15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임탄(任誕)은 8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세속의 울타리를 벗어난 선비의 소행(所行)은 마음대로여서 법도(法度)가 없지만, 그 풍류(風流)와 아취(雅趣)는 속진(俗塵)을 씻거나 더러움을 맑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므로 제8 ‘임탄(任誕)’으로 한다.

 

● 맹만년(孟萬年 : 만년은 진(晉) 맹가(孟嘉)의 자)은 술을 잔뜩 취하도록 마시기를 좋아했는데 아무리 많이 마셔도 행동이 어지럽지 않았다. 환선무(桓宣武 : 선무는 진(晉) 환온(桓溫)의 별칭)가 일찍이 그에게,

“술에 무슨 좋은 것이 있다고 경(卿)은 즐기는가?”

하니, 맹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公)은 술의 흥취(興趣)를 모릅니다.” 《세설신어》

 

● 도연명(陶淵明 : 연명은 진(晉) 도잠(陶潛)의 자)이 한번은 9월 9일을 맞이하여 술이 없자 집 동쪽 울타리 아래에 있는 국화꽃 밭에서 국화 한 줌을 꺾어 들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흰옷 입은 사람이 오는 것이 보였는데 이는 바로 왕홍(王弘)이 보낸 술을 가지고 오는 자였다. 그래서 실컷 마셨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도 정절(陶靖節 : 정절은 도잠(陶潛)의 시호)이 군(郡)에 있는데 장(將)이 인사를 드리러 와 보니, 정절은 마침 익은 술을 머리에 쓴 갈건(葛巾)으로 거르더니, 다 거르고 나서는 다시 머리에 쓰는 것이었다.

 

왕강주(王江州 : 왕홍(王弘))는 도연명과 알고 지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연명이 한번은 여산(廬山)에 갔는데 왕강주는 도연명의 옛 친구인 방통지(龐通之)를 시켜 술을 가지고 도중의 율리(栗里)에 가서 맞게 하였다. 이때 연명은 마침 다리에 병이 있어 한 문생(門生)과 두 아이로 하여금 남여(籃輿)를 메게 하여 와서는 방통지와 둘이서 그 술을 마셨다. 조금 후 왕강주가 와서 보고는 그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하씨어림》

 

● 장사광(張思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옛날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한(恨)스럽지 않으나, 옛사람에게 나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 진훤(陳暄)은 문재(文才)가 준일(俊逸)하였으나 술이 지나쳤다. 그의 조카 수(秀)가 글을 보내 못 마시게 말렸더니, 진훤은 이렇게 답하였다.

“속히 술지게미 언덕을 만들라. 내가 이제 늙었다.” 《하씨어림》

 

● 제 신무(齊神武 : 북제(北齊) 고조(高祖))가 이원충(李元忠 : 북제(北齊) 명환(名宦))을 복야(僕射)로 삼으려고 하니, 문양(文襄 : 북제 고징(高澄)의 시호)이,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어 대각(臺閣)을 맡길 수 없다고 하였다. 원충의 아들 소(搔)가 그 말을 듣고 원충에게 절주(節酒)하기를 청하자 원충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 말하면 복야 벼슬이 술 마시는 즐거움만 못하나, 너는 복야를 좋아하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씨어림》

▶복야(僕射) : 중국에서 재상(宰相) 급의 벼슬 이름.

 

● 왕무공(王無功 : 무공은 당(唐) 왕적(王績)의 자)은 문하성 대조(門下省待詔)였는데 예부터 예(例)가 관(官)에서 매일 3되 술을 주게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대조(待詔)는 무슨 즐거움이 있습니까?”

하니, 무공은 대답하기를,

“좋은 술이 있으니 즐겁소.”

하였다. 이 말을 시중(侍中) 진숙달(陳叔達)이 듣고는 매일 1말의 술을 주도록 하니, 당시 사람들이 두주학사(斗酒學士)라 불렀다. 《하씨어림》

 

● 대악서사(大樂署史) 초혁(焦革)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었다. 왕무공(王無功)이 그 말을 듣고 대악승(大樂丞) 되기를 원했으나 이부(吏部)에서 적임이 아니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공은 굳이 꼭 하고 싶다고 청하여 마침내 제수(除授)되었다. 초혁이 죽고 그의 아내가 끊임없이 술을 보내 주었는데, 1년 남짓 만에 그의 처마저 죽고 말았다. 무공은,

“하늘이 나로 하여금 좋은 술을 못 마시게 하는가.”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유후당서(劉昫唐書)》

 

● 이백(李白)이 한번은 달빛을 받으며 최종지(崔宗之)와 함께 채석강(采石江)에서 배를 띄우고 금릉(金陵)에 이르렀는데 궁중에서 준 금포(錦袍)를 입고 배 안에 앉아서 멋대로 구경하고 웃기를 옆에 사람이 없는 듯이 하였다. 《하씨어림》

 

● 안진경(顔眞卿)이 호주 자사(湖州刺史)가 되자 장지화(張志和)가 찾아왔다. 안진경은 그의 배가 낡아 물이 새는 것을 보고 바꾸기를 청하니, 장지화는 말하였다.

“내 소원이 물 위에 뜬 배를 집으로 삼아 초계(苕溪 )와 삽계(霅溪) 사이를 왕래하는 것입니다.” 《하씨어림》

 

● 육우(陸羽)가 초계(苕溪)에 숨어 살면서 스스로 상저옹(桑苧翁)이라 칭하고는 문을 닫고 책을 저술하였다. 가끔 혼자 들 가운데를 거닐면서 시(詩)를 외고 나무를 치면서 배회(徘徊)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지금의 접여(接輿 :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은자(隱者))라고 하였다. 《하씨어림》

 

● 사공도(司空圖)가 포의(布衣) 구장(鳩杖)으로 나다니면 그의 딸집 사람 난대(鸞臺)가 스스로 그 뒤를 따랐다. 《소창청기(小窓淸記)》

▶구장(鳩杖) : 임금이 70세 이상의 노대신(老大臣)이 벼슬에서 물러날 때 내려주던 지팡이로, 손잡이 꼭대기가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 곽서선(郭恕先 : 서선은 곽충서(郭忠恕)의 자)은 성품이 방달(放達)해서 구속됨이 없었는데 속인(俗人)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송 태조(宋太祖)가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 대궐에 이르자 내시성(內侍省) 두신흥(竇神興) 집에 유숙하게 했다.

서원은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는데 하루는 갑자기 수염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신흥이 놀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염 없는 당신을 흉내 내고자 해서요.” 《하씨어림》

 

● 곽서선은 가끔 역부(役夫)나 아랫사람과 어울려 저자에 들어가 음식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귀는 사람들은 모두 그대들 같은 사람들이오." 《하씨어림》

 

● 곽서선은 얼굴이 아름다웠다. 곽종의(郭從義)가 기하(岐下)에서 진무(鎭撫)하고 있을 때 그를 맞아다가 산관(山館)에 두었다. 기(岐)에 어떤 부잣집 아들이 그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좋은 술을 내어 대접하는 등 매우 후하게 접대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후 정(情)을 표하고 또 비단을 보내왔다.

곽서선은 그 비단에다 선거(線車 : 실 감는 얼레)를 가진 어린아이가 바람에 연(鳶)을 날리되 연줄의 길이가 몇 길이 넘도록 긴 그림을 가득 그려 놓았다. 그것을 본 부잣집 아들은 크게 화를 내어 마침내 곽서선과 절교를 하고 말았다. 《하씨어림》

 

● 소장공(蘇長公 : 장공은 송(宋) 소식(蘇軾)의 별칭)이 유양(維揚)에 있을 때 하루는 손님 십여 명과 잔치했는데 모두 당시의 명사(名士)들이었다. 미원장(米元章 : 원장은 미불(米芾)의 자)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원장이 갑자기 일어나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미불(米芾)을 미쳤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자첨(子瞻 : 소식(蘇軾))의 자)에게 질정하고자 한다.”

하니, 장공(長公)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따르겠다.” 《하씨어림》

 

● 미불(米芾)은 돌에 절을 하고, 반곡(潘谷)은 이정규(李廷珪)의 먹[墨]에 절을 하고, 노정벽(盧廷辟)은 중[僧] 거가(詎可)가 벌여놓은 열 가지의 다구(茶具)를 보고 의관(衣冠)을 갖추어 절하였다. 이 세 가지 일은 마치 바보스럽고, 미친 것 같고, 고상한 듯하고 과격한 듯싶으나 한 번 없어서는 안 될 일이요, 두 번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소창청기》

 

● 오자행(吳子行)은 한평생을 완설(玩褻)로 살았다. 혹 누가 찾아와도 그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면 누(樓) 위에서 말하기를,

“나는 외출한 지 한참 되었네.”

하고는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면서 여의(如意 : 옥석(玉石)으로 만든 등 긁는 기구)를 끊임없이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하씨어림》

▶완설(玩褻) : 예(禮)에 구속되지 않고 함부로 행함.

 

● 손산인 태초(孫山人太初 : 태초는 명(明) 손일원(孫一元)의 자. 산인은 그의 별칭)가 무림(武林)에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 비 문헌(費文憲 : 문헌은 명 비굉(費宏)의 시호)이 재상(宰相)을 그만두고 돌아가면서 방문하였다. 마침 그때 손(孫)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일부러 누워서 일어나지 않다가 한참 후에 나왔으며, 또 사의(謝意)도 표하지 않았다. 대문까지 전송하면서는 머리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면서,

“바다에 푸른 기운이 일어 마침내 적성(赤城)까지 뻗쳤으니, 크게 기이하구나.”

하는 것이었다. 문헌(文憲)은 집을 나와서 그의 어자(馭者)에게,

“내 평생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하였다. 《감산당별집(弇山堂別集)》

▶어자(馭者) : 마차를 부리는 사람.

 

● 손일원(孫一元)이 서호(西湖)에 은거할 때 한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가 찾아왔다. 일원(一元)은 그를 전송하러 나와서 먼 산만 바라볼 뿐 한 번도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벼슬아치는 괴이쩍게 여겨 말하기를,

“산(山)이 좋은 것이 무엇이오?”

하니, 일원은 대답하였다.

“산이 좋은 것은 아니나 청산(靑山)을 대하는 것이 속인(俗人)을 대하는 것보다는 좋지요.” 《소창청기》

 

● 당백호(唐伯虎)와 장몽진(張夢晉)ㆍ축윤명(祝允明)은 모두 임달방탄(任達放誕)하였다. 한번은 눈이 내리는 날 걸인(乞人)의 행세를 하면서 댓가지를 두드리며 연화가(蓮花歌)를 불렀다. 그러다가 혹 돈이 생기면 술을 사서 들의 절[寺]에서 통음(痛飮)하면서 말하였다.

“이런 즐거움을 이태백(李太白)이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명세설신어》

▶임달방탄(任達放誕) : 세속적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

 

● 오문(吳門 : 중국 소주(蘇州))의 주야항(朱野航)은 시(詩)를 잘 지었다. 왕씨(王氏)의 집에 유숙하면서 주인과 함께 늦도록 술을 마시고 파하는데 마침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야항(野航)은 문득,

 

萬事不如杯在手 모든 일은 손에 든 술잔만 못하고

一年幾見月當頭 일 년에는 몇 번이나 달을 보았던가.

 

하는 시구를 읊고는 너무도 기뻐 미친 듯 외치면서 사립문을 두드려 주인을 불렀다. 주인이 일어나자 시를 읊고는 다시 술을 나누었다.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

 

● 심가칙(沈嘉則)이 금릉(金陵)에 노닐면서 날마다 호희(胡姬)의 주사(酒肆)에서 술을 마셔 취했는데, 한 마디 말을 하면 모든 호걸(豪傑)과 재준(才俊)들이 다 머뭇머뭇 자리를 피하면서 천상(天上)의 세성(歲星)이 다시 인간 세상에 귀양 왔다고 하였다. 자신 역시 그 말을 사실로 여기고 의심하지 않았다. 《명세설신어》

▶호희(胡姬)의 주사(酒肆) : 페르시아계 여성들이 접대인으로 있는 술집.

 

● 진미공(陳眉公 : 미공은 명(明) 진계유(陳繼儒)의 자)이 말하기를,

“나는 1만 권(卷)의 이서(異書)를 소장(所藏)하여 이금(異錦)으로 씌우고 이향(異香)으로 쬐면서 띳집ㆍ갈대 발ㆍ종이 창문ㆍ흙벽으로 된 집에서 평생을 포의(布衣)로 그 가운데서 시(詩)를 읊고자 한다.”

하니, 객(客)이 말하였다.

“참으로 그렇게 되면 천지간의 한 이인(異人)일 것입니다.” 《암서유사(巖棲幽事)》

 

[작가미상 <산수도(山水圖)> 中 동정추월(洞庭秋月), 지본담채, 122.8 x 50.2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동정추월(洞庭秋月)은 소상팔경(瀟湘八景) 화제(話題) 중 하나.]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