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32 - 한정록(閑情錄) 광회(曠懷) 2

從心所欲 2021. 10. 4. 16:40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광회(曠懷)는 9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장부(丈夫)의 처세(處世)는 마땅히 가슴이 탁 트이도록 가져야 하니, 상황에 따라 마음을 크게 먹고 순리(順理)로써 스스로를 억제하면 인품(人品)이 고상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자연 고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9 ‘광회(曠懷)’로 한다.”

 

● 축법심(竺法深 : 진(晉) 때의 중)이 간문제(簡文帝)와 대좌(對坐)하고 있는데, 유윤(劉尹)이 묻기를,

“도인(道人)이 어찌 주문(朱門 : 권력이 있는 훌륭한 집안)에서 노는가?”

하니, 법심이,

“그대는 주문(朱門)으로 보이나 나는 봉호(蓬戶 : 빈천한 집)에서 노는 것과 같소.”

하였다. 어떤 사람은 묻는 자가 유윤이 아니고 변령(卞令 : 변(卞) 땅의 영(令))이라고도 한다. 《세설신어》

 

● 거실(居室)은 몸을 용납할 만한 것을 취하면 되고, 높고 넓은 집은 다 필요 없다. 나는 항상 양(梁) 나라 서면(徐勉 : 자(字)는 수인(修仁))을 사랑하는데, 그가 아들을 경계한 글에,

“내가 청명문(淸明門) 밖에 있는 집 서쪽 부근 선복사(宣福寺)에 시주하고 다시 잘 고치거나 수리하지 않는 것은 내 뜻으로는 그곳을 여관집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로 화려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이 집을 내 집이라고 하니 항상 이상스럽다. 이 집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호걸과 귀인이 서로 이어가며 계속 살았으니 죽은 뒤에는 이것이 누구의 집이 될지 알겠는가.”

하였으니, 이런 사람을 일러 진달(眞達)한 사람이라고 한다.

곽종의(郭從義)는 낙양(洛陽)에 집을 짓되 겨우 촛불을 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하였고, 진수공(陳秀公)은 윤주(潤州)에다 집을 지었는데 오직 견여(肩輿 : 앞뒤 두 사람이 메는 가마) 하나만이 서루(西樓)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니, 비록 사치가 당시(當時)에 으뜸이었다고 한들 필경에는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문기유림》

 

● 용주(龍州) 유개지(劉改之 : 개지는 송(宋) 유과(劉過)의 호)의 시(詩)에,

 

退一步行安樂法 한 발자국 물러섬은 안락을 누리는 방법이요

道三箇好喜歡緣 세 가지 좋은 점을 말해 줌은 기쁨을 맺는 인연이네.

 

하였는데, 진서산(眞西山 : 진덕수(眞德秀)의 호)은 그 시를 외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옳거니와, 세 가지 좋은 점을 말해 주는 것은 곧 풍속을 따르고 인정(人情)을 좇는 것인데, 그것을 옳다고 보는가.”

하므로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사람은 직도(直道)로 행하였으니, 이치가 있는 곳에는 한눈팔지 않고 곧장 행하였다. 그리하여 떠나고 벼슬하고 중지하고 오래 있고 빨리 가는 것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어찌 이른바 한 발자국을 물러섬이 있었겠는가. 후세에 오면서부터 부귀영화를 탐하고 승진을 다투어 한 계단 반 등급을 다투다가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니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한 걸음 물러서서 가는 것을 안락한 방법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옛사람들은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 하여 명백하고 정직(正直)하였으니 일찍이 무엇을 가렸겠는가. 그러나 후세로 오면서부터 정직을 미워하고 아첨을 좋아하여 바른말 때문에 번번이 재앙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세 가지 좋은 점을 말하는 것으로 기쁨의 인연이라 하게 된 것이다." 《학림옥로》

 

● 배도(裴度 : 당(唐)의 재상)가 항상 그 아들에게 훈계하기를,

“무릇 나의 자손들에게는 다만 글하는 자손[文種]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혹 공을 이루어 천자(天子)의 정승이 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천행이다.”

하였고, 또 산곡(山谷 :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호)은,

“사민(四民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 모두 세업(世業 : 대대로 내려오면서 종사하는 생업)을 지키고 있으니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은 충신(忠臣)ㆍ효제(孝悌)의 도리(道理)를 알아야 옳다. 그러나 글을 읽는 자손(子孫)을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재예(才藝)가 있는 자손이 나오면 문득 세상에 이름이 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배도의 말을 조술(祖述)하되 다만 문종(文種)을 서종(書種)으로 바꾼 것이다. 연겸선(練兼善)이 늘 책을 대하며 이렇게 탄식하였다.

“나는 늙었다. 그러니 세상에 이름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후대에 글하는 자손을 내려는 것이다. 나의 집에 ‘서종당(書種堂)’이 있는데, 이는 이공(二公 : 배도ㆍ황정견)의 말을 겸하여 취한 것이다.” 《저기실(楮記室)》

 

● 곽단(郭彖)이 말하였다.

“유 선생(劉先生)이라고 하는 사람이 형산(衡山) 자개봉(紫蓋峰) 아래 현(縣)의 저자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그는 끼니때마다 걸식하였으며, 돈을 얻으면 술을 사 마시고 취하여 돌아갔다가 낮이면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부유한 사람이 그에게 도포 한 벌을 주니 유 선생은 기쁘게 사례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수일 뒤에 만나보니 전에 입던 갈포(褐袍)를 여전히 입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자네가 누를 끼쳤네. 내가 그 전에는 암자를 나오면 아무 데서나 빌어먹을 곳이 있고 침소에 들어도 문을 또한 잠그지 않았었는데, 도포(道袍)를 얻은 뒤로부터는 그것을 입지 않고 나가면 마음이 항상 거기에 매여 편치 않았네. 그리하여 자물쇠를 한 개 사서 나갈 때면 방문을 잠그고, 혹 도포를 입고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서는 방문을 굳게 잠가 도둑을 방비하였네. 이와 같이 수일 동안 악착같이 하다 보니 내 스스로 마음이 편치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입고 저자에 갔다가 갑자기 이 한 벌의 도포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야말로 크게 웃을 일이네. 마침 앞에 지나가는 한 사람을 만났기에 벗어서 그에게 주었더니 내 마음이 비로소 편하였네. 자네가 나에게 누를 끼쳤네.’ 하였다.” 《문기유림》

 

● 오청강(敖淸江)이 말하였다.

“금계(金溪) 호구소(胡九韶)가 오강재(吳康齋 : 명(明) 오여필(吳與弼)의 호)를 따라 《주역(周易)》을 배웠는데,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집이 매우 가난하여 아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겨우 의식(衣食)을 공급하였다. 매일 포시(晡時)에 향을 피우고 호구소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이 하루의 청복(淸福)을 내려주신 데 대하여 사례하니, 그 늙은 아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루에 세끼 나물죽을 먹는데 무엇을 청복이라 부를 것이 있소.’ 하니, 호구소가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태평한 세상에 태어나서 병화(兵禍)가 없었고, 또 다행히 한 집안의 골육(骨肉)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내고 굶주리고 춥지 않게 지내며, 또 다행히 침상에는 병든 사람이 없고 감옥에는 갇혀 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청복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내가 어릴 때에 어른들이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말씀을 들으면 문득 웃어넘겼다. 그런데 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신미년(1511년)에 화림(華林)의 도적을 만나고 기묘년(1519)에 신호(宸濠)의 변을 만나 산중에서 난을 피하였는데, 그때에 기갈(飢渴)에 지쳐 쓰러져서 몸을 가눌 만한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호구소의 청복에 대한 말이 진실로 그렇구나 하고 믿게 되었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고중결(顧仲玦)이 만년에 불서(佛書)를 읽고 깨침이 있어서 드디어 머리를 깎고 ‘금속 도인(金粟道人)’이라 이르고는 그 화상에 스스로 써 붙이기를,

 

儒衣僧帽道人鞋 유자의 옷 승려의 모자에 도인의 신을 신었으니

天下靑山骨可埋 천하의 푸른 산에 뼈를 묻을 만하구나.

若說向時豪候處 만약 전에 내가 호협 부리던 곳을 말한다면

五陵衣馬洛陽街 오릉 출신으로 말 타고 노닐던 낙양 거리지.

 

하였는데, 한때 그의 광달(曠達)함을 흔상(欣賞)하였다. 《하씨어림》

 

● 두 사인(杜舍人)이 약관(弱冠)에 이름을 이루어서 제책(製策 : 과거에서 책문(策文)을 지음)에 등과하여 이름이 경읍(京邑)에 떨쳤다. 그가 일찍이 동배(同輩)와 더불어 성남(城南)에서 유람하다가 한 절에 이르니, 선승(禪僧)이 갈포를 입고 홀로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현언(玄言)과 묘지(妙旨)에 대해 말을 해보니 선승의 의표(意表)가 아주 뛰어났다. 선승이 두 사인의 성(姓)과 자(字)를 묻고, 또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곁에 있던 사람이 여러 번 등과한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돌아다보고 웃으며,

“그래요, 내가 몰랐구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 사인이 감탄하고 의아하게 여기면서,

 

家在城南杜曲傍 집은 성 남쪽 언덕 곁에 있는데

兩枝仙桂一時芳 두 차례 과거를 한 번에 급제했다네.

禪師都未知名姓 선사는 누군지 그 성명을 모르겠구나.

始覺空門意味長 이제야 불교의 의미가 깊음을 알겠네.

 

하는 시를 썼다. 《사문유취》

▶현언(玄言) :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깨끗한 담론(談論)

 

● 《녹설정잡언(綠雪亭雜言)》에 이렇게 되어 있다.

“장사(長沙) 땅에 조사(朝士) 아무가 있었는데, 고향(故鄕)에 돌아오니 의기가 넘쳤다. 그는 손님이 오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매우 시끄럽게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 마을에 집우(執友)가 한 사람 있어 그를 뵙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조사가 ‘옹(翁)은 평소에 시(詩) 외기를 좋아했으니 근래에는 어떤 시를 읽었는가?’ 하니, 집우가 ‘근래에 손봉주(孫鳳洲)가 구양 규재(歐陽圭齋 : 원(元) 구양현(歐陽玄)의 호)에게 준 시 한 수를 외었는데 매우 좋더라.’ 하고는 곧 낭랑히 그 시를 다음과 같이 외웠다.

 

圭齋還是舊圭齋 규재는 도리어 옛날의 규재일 뿐

不帶些兒官樣回 조그만 관직도 가지지 못하고 돌아왔네.

若是他人居二品 만약 이 사람이 타인처럼 이품직에라도 있었다면

門前簫鼓鬧如雷 문전에 소고 소리가 천둥같이 요란할 텐데.

 

조사가 잠잠히 시 읊는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날 손님이 오자 문정(門庭)이 조용해졌다.” 《공여일록(公餘日錄)》

▶조사(朝士) : 조정에 몸을 담고 있는 신하. 조신(朝臣).

 

● 강서(江西)의 조 상서(趙尙書)의 집이 상성원(常省元)의 동산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는 그 동산을 백방으로 가지려 했으나 손에 넣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상성원이 시(詩)와 서계(書契)를 지어 그에게 보냈다. 그 시는 이러하다.

 

乾坤到處是吾亭 이 세상 가는 곳마다 바로 나의 정자요

機械從來未心眞 사람이 만든 것 예부터 반드시 참이 아니라오.

覆雨飜雲成底事 비와 구름 번복됨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

淸風明月冷看人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사람 보길 냉랭히 하네.

蘭亭禊事今非昔 난정의 계사는 이제 옛날 일이 아니던가.

桃洞神仙也笑秦 무릉도원 신선들은 진 나라를 조소했다네.

園是主人人是客 동산이 바로 주인이요 사람은 객인데

問君還有幾年身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는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겠나.

 

조 상서가 그 시를 보고는 부끄럽게 여기며 사과하고 감히 그 동산을 받지 못하였다. 아, 상성원이야말로 진실로 통달한 사람이요, 조상서도 허물을 아는 사람 중에 들 수 있다 하겠다. 《공여일록》

 

● 양분(楊玢)이 상서(尙書)로 치사(致仕)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옛집이 강한 이웃에게 빼앗겼으므로 자제(子弟)가 관가에 소송하고자 하여 그 소장(訴狀)을 양분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분이 그 종이 끝에,

 

四隣侵我我從伊 이웃이 나를 침범한다 하여 나도 그대로 따를 것이랴

畢竟須思未有時 필경에는 모름지기 소유하지 않았던 때를 생각해야지.

試向含元殿基望 시험 삼아 함원전 터를 향해 바라보니

秋風秋草正離離 가을 바람에 가을 풀이 정말 쓸쓸하네.

 

하는 시를 썼다. 《자경편(自警編)》

 

● 왕자경(王子敬 : 자경은 진(晉) 왕헌지(王獻之)의 자)이 밤에 서재에 누웠는데, 뭇도둑이 그의 방에 들어와 물건을 도둑질하여 모조리 가져가므로 왕자경이 천천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둑아이들아, 청전(靑氈)은 우리집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니 특별히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 《세설신어》

▶청전(靑氈) : 짐승의 털로 만든 푸른색 담요

 

● 장사간(張士簡 : 사간은 양(梁) 장솔(張率)의 자)은 가무(家務)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가 신안(新安)에 있을 때에 가동(家僮)에게 쌀 3천 곡(斛)을 실려 보냈는데, 오(吳)에 돌아오는 동안 태반이 없어졌다. 장사간이 그 까닭을 물으니, 가동이 대답하기를,

“참새와 쥐가 축내어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장사간이 웃으며 말하기를,

“장하다 참새와 쥐들이여.”

하고는 다시 더 캐묻지 않았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 효렴(孝廉 : 효렴과(孝廉科) 출신) 진종(陳琮)이 별장을 읍의 북망(北邙)에 지었는데, 앞뒤에 무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진종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희롱하기를,

“눈에 매양 이 무덤들만 보이니 아주 즐겁지 않겠나?”

하니, 진종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눈으로 날마다 이 무덤들을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즐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 범효경(范孝敬 : 효경은 삼국 시대 오(吳) 범신(范愼)의 자)이 무창(武昌)에 있을 때에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장실(長室)이라 이름하고는 때로 빈객들과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그 속에 들어가 잔치하며 술을 마셨다.

또 사공(司空) 표성(表聖)이 미리 수장(壽藏 :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을 만들어 놓고 친구들이 오면 광중(壙中)으로 끌고 들어가서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혹 힐난하면 표성은,

“달인(達人)의 대관(大觀)은 저승과 이승을 마찬가지로 보는 법이다. 이 속에서 잠깐 노는 것으로 그칠 것도 아닌데 공은 어찌해서 마음이 그리 넓지 못하오.”

하였다.

통달했도다, 이 공(二公)이여, 그러나 너무 심하도다! 《문기유림》

 

● 태조(太祖 :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가 곽덕성(郭德成)을 불러 도독(都督)을 삼으니 곽덕성이 관(冠)을 벗고 울면서 말하였다.

“신은 술을 즐기고 눕기를 좋아하며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급한 일이 생기면 지위는 높고 녹은 무거우나 일은 구차하게 되고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니, 상께서는 반드시 저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정은 돈을 많이 얻고 좋은 술을 마시며 자적(自適)하며 일생을 마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명세설신어》

 

● 도현경(都玄敬)은 재거(齋居)가 조용하여 빈객(賓客)을 모시고 술을 마시며 옛이야기를 하기 좋아했는데, 하루 종일 그렇게 하려 하였다. 그리고 혹 쌀이 떨어지면 웃으면서 말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마땅히 도생(都生)으로 하여금 굶어 죽게는 안 할 것이다.” 《소창청기》

 

● 양승암(揚升庵 : 승암은 명(明) 양신(楊愼)의 호)이 벽(壁)에 다음과 같이 썼다.

“노경(老境)에 병마(病魔)가 들어 필연(筆硯)을 가까이하기가 어려워서 신명(神明) 앞에 시문(詩文)을 짓지 않기로 발원(發願)한다. 지금부터 아침에 죽 한 그릇, 저녁의 등잔불 하나로 재가 산승(在家山僧)이 되겠다.”

그리고 다닐 때는 오직 방공(龐公 : 당(唐)의 재가승(在家僧). 이름은 방온(龐蘊))의 ‘공제소유(空諸所有)’란 네 글자를 써서 지니고 다녔다. 《소창청기》

 

● 위장거(魏莊渠 장거는 명(明) 위교(魏校)의 호)가 말하였다.

“교(校)는 병이 많아 집에만 들어앉아서 다만 졸(拙)로써 자수(自修)한다. 때로 밖에 나가서 변화를 관망하는데, 우주(宇宙)를 바라보면 인온(氤氳)이 텅 비고 끝없는 넓음에 흔연히 마음이 모이며 물(物)과 나를 함께 잊는다. 헛된 명예가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건대 한가한 구름이 하늘에 있고 뜬 물거품이 바다에 있는 것과 같으니, 모였다가 흩어지고 일어났다가 없어질 뿐 여기에 어찌 상도(常道)가 있겠는가.” 《지비록(知非錄)》

 

● 진자칙(秦子敕)이 말하였다.

“옛날에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 : 요 임금 때의 은자(隱者))를 넓은 아량으로 우대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는 두 귀를 영수(潁水)에 씻었으며, 초(楚) 나라가 장주(莊周)를 예빙(禮聘)하기를 관대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낚싯대를 잡고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안씨(顔氏 : 안회(顔回))의 단표(簞瓢)를 즐기면서 글을 외고 원헌(原憲 : 공자(孔子)의 제자)의 봉호(蓬戶)에 살면서 시를 읊다가 때로는 숲 속과 물가를 거닐기도 한다. 그리하여 장저(長沮 : 공자 시대의 은자)ㆍ걸닉(傑溺 : 공자 시대의 은자)과 더불어 한 무리가 되어 원숭이의 슬픈 읊조림을 듣고 학이 우는 뜻을 구고(九皐 : 으슥한 소택)에서 살피면서 몸이 편안한 것을 낙(樂)으로 삼고 근심이 없는 것을 복(福)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공허(空虛)한 이름에 자처(自處)하고 신령(神靈)하지 못한 거북의 처지에 있을 수 있어서 나를 아는 자가 드물면 나는 귀하게 되는 것이다.” 《지비록》

 

● 경허자(敬虛子)가 말하였다.

“양자호(楊慈湖 : 자호는 송(宋) 양간(楊簡)의 호)가 말하기를 ‘사람이 한 세상 사는데, 다만 한바탕 바빠야 그 다음에 곧 쉬는 것이다.’ 하고, 또 ‘무릇 집이 있는 자가 그 가옥이 거처할 만하고, 곡속(穀粟)이 먹고 살만하고, 채소밭의 채소가 급용(給用)에 만족스러우면 이미 부(富)에 속한 것인데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족(知足)의 즐거움을 얻는 자가 적다.’ 하였다. 양자호의 ‘다만 한바탕 바빠야 그 다음에 곧 쉬는 것이 된다.’고 한 말을 나는 지족(知足)의 즐거움을 아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심한지 나는 모르겠다. 달관자(達觀者)가 만약 이 괴로움을 버릴 수 있다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더없이 통쾌한 일인데, 세상 사람들이 미혹하여 이를 깨닫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지비록》

 

[<고사인물도 10폭병풍((故事人物圖十幅屛風)> 中 1폭 백이숙제, 민화병풍, 국립민속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