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33 - 한정록(閑情錄) 유사(幽事) 1

從心所欲 2021. 10. 8. 05:19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유사(幽事)는 10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한가한 곳에서 혼자 살면서 담박하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일상 생활하는 일이야 그 일을 당하면 역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10 ‘유사(幽事)’로 한다.”

 

 

● 산림(山林) 선비들의 교제는 저자나 조정 사람들과는 다르다. 예절은 간략함을 귀중히 여기고, 말은 정직함을 귀중히 여기고, 숭상하는 바는 청렴함을 귀중히 여긴다. 착한 일은 반드시 서로 추천하고 과오는 반드시 서로 규계(規戒)하고, 질병은 반드시 서로 구료(救療)한다. 편지[書尺]에는 반드시 정직하게 사실을 말하며, 호칭(呼稱)은 아호(雅號)나 자[表字]를 쓰지 관직(官職)을 쓰지 않고, 강론[講問]할 적에는 반드시 아는 것과 들은 것을 착실하게 말하고 당시의 정책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술과 음식은 마련된 대로 하되 모임의 좌석 차례는 귀천(貴賤)과 나이 차례대로 하며, 주량(酒量)대로 마시고 생각나는 대로 시(詩)도 짓는다. 좌기(坐起)는 자연스럽게 하나 좌석에서 나가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심부름을 할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직접 사역을 한다. 초청을 하면 반드시 기약대로 가지만 부르지도 않는데 가는 짓은 않는다. 볼일이 있으면 사실대로 말해야 하지만 돌아와서 반드시 사례할 것은 없다. 무릇 충효(忠孝)나 우애(友愛)에 관한 일은 마음을 다해서 한다. 부질없이 선배들을 미워하지 말고 모름지기 후학(後學)들과 상접(相接)하여 인도하여 함께 옛 풍속을 추구해야 한다. 《패해(稗海)》

▶좌기(坐起) : 행동거지(行動擧止)

 

●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 마치 백구과극(白駒過隙)과 같은데, 비 오고 바람 부는 날과 근심하고 시름하는 날이 으레 3분의 2나 되며, 그 중에 한가한 때를 가지는 것은 겨우 10분의 1정도밖에 안 된다. 더구나 그런 줄을 알고 잘 누리는 사람은 또한 백에 하나나 둘이고, 백에 하나나 되는 속에도 또한 허다히 음악이나 여색으로 낙을 삼으니 이는 본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경지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지 못해서이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이 당초부터 여색에 있지 않고 귀에 듣기 좋은 것이 당초부터 음악에 있지 않는 법이다. 밝은 창 앞 정결한 탁자 위에 향(香)을 피우는 속에서 옥을 깎아 세운 듯한 얌전한 손님과 서로 마주하여, 수시로 옛사람들의 기묘한 필적(筆迹)을 가져다가 조전(鳥篆)ㆍ와서(蝸書)와 기이한 산봉우리, 멀리 흐르는 강물을 관상(觀賞)하고, 옛 종과 솥[鍾鼎]을 만지며 상(商)ㆍ주(周) 시대를 친히 관찰하고, 단계연(端溪硯) 먹물이 암석(巖石) 속의 원천 솟듯 하고, 거문고[焦桐] 소리가 패옥(佩玉)이 울리듯이 한다면, 자신이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음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청한(淸閑)한 복을 누린다는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산가청사(山家淸事)》

▶백구과극(白駒過隙) : 문틈 사이로 흰 망아지가 달려 지나가는 모습을 보다. 세월의 빠름을 비유
▶조전(鳥篆)ㆍ와서(蝸書) : 고대 중국의 서체

▶단계연(端溪硯) : 중국에서 생산되는 벼루로 마묵(磨墨)이 곱게 되고 오래도록 마르지 않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청한(淸閑) : 청아(淸雅)하고 한가(閑暇)함.

 

● 향리[故山]의 물가에 터를 잡아, 가시나무[荊棘]를 둘러 심어 울타리를 하고서 간간이 대나무를 심고, 남은 터에는 부용(芙蓉) 2백 68그루를 심어 부용이 두 길쯤 되게 하고, 매화 8그루를 둘러 심는데, 매화는 세 길 남짓하다. 겹 울타리 밖에는 토란과 밤나무 같은 과일나무를 심고, 안에는 거듭 매화를 심는다. 앞은 띠, 뒤는 기와로 팔각을 지어 ‘존경각(尊經閣)’이라 이름 하여 고금의 서적을 저장하며, 왼쪽에는 자손을 가르칠 글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도원(道院)을 마련하여 손님을 대접한다. 전사(前舍)가 셋이니, 침실 하나, 독서실(讀書室) 하나, 약재실(藥材室) 하나요, 후사(後舍) 둘을 지어, 하나는 술과 곡식을 저장하고 농구(農具)와 산구(山具)를 두며, 하나는 복역(僕役)들의 방, 주방(廚房)ㆍ욕실을 알맞게 배치하여, 사동(使童) 하나 종[婢] 하나 원예사[園丁] 두 사람이 있게 한다. 앞에는 학옥(鶴屋)을 마련하여 학을 기르고, 뒤에는 개 한두 마리와 나귀 한 마리, 소 두 마리를 기른다. 손님이 오면 채소에 밥과 술 및 과일을 마련한다. 틈이 나면 독서하고 농사일을 보며, 괴롭게 시(詩)를 짓지 않고, 타고난 여생을 편안히 지낸다. 《옥호빙(玉壺氷)》

▶고산(故山) : 고향(故鄕).

 

● 솔과 대나무가 길에 우거지고 뜰에 꽃이 둘러 피면, 산인(山人)의 옷을 걸치고서 지팡이 끌며 책을 낀 채 흥얼거리고 다니면서, 숲이 울창한 속에서 세월을 보낸다. 옛 이랑이나 새 이랑의 농작물과 급료와 휴가ㆍ진퇴(進退) 따위는 무릎 괴고 앉아 긴 휘파람으로 넘겨버리고, 혼인[婚嫁]은 유무(有無)대로 하는 것이어서, 모두 쓸쓸하고 정신없는 꿈속의 일 같은 것이다. 오직 명성 있는 좋은 선비를 흔연히 맞이하여 함께 담담한 면(麵)을 먹으면서, 유(儒)와 불(佛) 두 가지가 이합(離合)한 데를 이야기하여, 성명(性命)의 참다운 곳이 마치 물속의 소금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님 같음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옥호빙》

 

● 집[軒] 두어 칸이 당옥(堂屋) 뒤에 있는데, 인간사(人間事)도 미치지 않는 곳이요, 빈객(賓客)이나 종유(從遊)하는 사람도 오지 않는 곳이다. 가끔 혼자 여기서 노닐며 반석[盤礴]에다 옷을 벗어놓고 호상(胡床) 위에 걸터앉아 붓을 적셔 시를 쓰고, 등에 햇볕을 쪼이며 글을 열람하면서, 언짢은 기분을 푼다. 《옥호빙》

▶종유(從遊) : 학식이나 덕행(德行)이 높은 사람을 좇아 같이 따라 놂.

 

● 한지국(韓持國 : 지국은 송(宋) 한유(韓維)의 자)의 허창(許昌)에 있는 사제(私第)의 냉방[涼堂]이 깊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매양 여름에도 오히려 있을 수가 없다고 했었다. 상영사(常潁士)가 마침 교외(郊外)의 살던 곳에서 오자, 따라서 묻기를,

“교외에 있으니 시원하던가?”

하니, 상영사가,

“시원했습니다.”

했다. 지국이 그 까닭을 묻자,

“들판 사람들은 처마가 긴 큰 집이 없으므로, 일찍 일어나도 거마(車馬)의 진애(塵埃)에 시달릴 것이 없습니다. 가슴속에 다른 잡념 없이 몸뚱이를 내놓고 부채를 들고서 나무 걸상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 나무 그늘을 보아 동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따라가고 서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따라갑니다.”

하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지국이 급히 제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네 그만 말하게 내 속이 다 시원하네.” 《피서록화(避暑錄話)》

 

● 사강락(謝康樂 : 사영운(謝靈運))이 말하였다.

“좋은 계절[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구경하고 싶은 생각[賞心], 마음 즐거운 일[樂事] 등 이 네 가지를 겸하기는 어렵다. 한위공(韓魏公 : 한기(韓琦))이 북문(北門)에다 사병당(四幷堂)을 지었었는데, 공은 공명(功名)과 부귀(富貴)를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즐기지 못한 때가 없었다. 내가 사방에 다니며 노닐던 젊은 시절에는 대개 네 가지가 얻기 어려운 것임을 알지 못했었다. 그 후 허창(許昌)에 있을 적에 고로(故老)들이 말하는 것을 듣건대, 한지국(韓持國)이 원으로 있을 때 매양 봄이 되면 날마다 서호(西湖)에다 손님 10명과 먹을 것을 마련해 놓고서, 일찌감치 고을 일을 요리(僚吏)들에게 맡기고 바로 서호 가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나가는 대부(大夫)가 있으면 손님 아홉이 찰 때까지 맞이하여 곧장 그들과 종일토록 즐겁게 마셨다. 그래서 증존지(曾存之)가 일찍이 공에게 묻기를 ‘이런 일을 하심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하니, 공이 ‘자네는 젊은 사람인데 어찌 이를 알겠는가. 나는 늙었는지라 다시 몇 번이나 봄이 있을지 알 수 없네. 만일 함께 마실 만한 사람을 기다렸다 상종하려 한다면, 내가 즐길 날이 얼마 없을 것이고 봄 역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네.’ 했다고 한다.” 《피서록화》

 

● 신기질(辛棄疾 : 자는 유안(幼安). 송(宋)시대 사람)이 말하였다.

“인생은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고, 우선 농사에 힘써야 하는 것이 마땅한 까닭에 아호를 ‘가헌(稼軒)’이라 했다.” 《소창청기(小窓淸記)》

▶가헌(稼軒) : ‘(곡식을) 심는 집’이라는 의미.

 

● 유대하(劉大夏 : 자는 시옹(時雍) 명(明) 나라 사람)는 아들에게 글 읽기를 가르치고, 아울러 농사일에 힘쓰도록 했다. 일찍이 비가 내리는데도 밭 갈기를 재촉하면서 말하였다.

“부지런함이 몸에 익숙해지면 피로를 잊게 되나, 안일함이 몸에 젖어지면 게으름뱅이가 되는 법이다. 내가 이토록 피곤하게 일을 시키는 것은 장차 유익하게 하려는 때문이다.” 《소창청기》

 

● 서적(徐勣)이 그의 아들 숭(崧)에게 훈계하였다.

“조그마한 포전(圃田)을 만들어 가꾸는 것이, 원예(園藝)를 선전하여 이익을 꾀하려는 것이 아니라, 곧 못[池]을 파고 나무를 심어서 다소나마 관상(觀賞) 거리를 삼으려는 것이다.” 《소창청기》

 

● 농가[田家] 월령(月令)을 마땅히 묘당(茆堂) 좌우로 붙여놓고, 담장[牆屋] 수리는 방향을 잃지 않고, 몸가짐[起居]의 조섭은 절도를 잃지 않고, 물자[物料]의 손질이 정상을 잃지 않고, 화초와 나무의 이식이 철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공비급(眉公祕笈)》

▶농가[田家] 월령(月令) : 농가(農家)에서 달(절기)에 따라 해야 할 일.

 

● 우리 가문이 오릉(於陵) 및 화산(華山) 처사(處士)와는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오탁(五濁)에 교착(膠着)되어 일생을 묶여 지내니, 매양 청송(靑松) 백석(白石)의 맹세를 생각할 적마다 어찌 큰 한탄이 날 뿐이겠는가. 정유년(丁酉年)에 비로소 이릉(二陵)의 유지(遺址)에 완련초당(婉戀草堂)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長者爲營栽竹地 어른들이 대[竹] 심을 땅을 마련했는데

中年方愜住山心 중년에야 비로소 산에 살고 싶던 마음을 이루었네.

 

하는 시구(詩句)를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산중(山中)이라도 또한 도가(道家)들처럼 보련(保鍊)ㆍ토납(吐納)을 하여 여년(餘年)을 아끼는 짓을 할 수는 없고, 곧 대장경[佛藏] 6천 권을 읽다가 쉬다가 하며, 오직 이웃 늙은이나 절의 중들과 즐거이 꽃나무 접붙이기, 과일나무 심기, 차조 심기, 복령(茯苓 : 한약재) 깎는 법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 나머지 시간은 한결같이 본래의 면목(面目)에 안정되어야 할 뿐이다. 틈나는 시간에 이런 말을 모아 《암서유사(巖棲幽事)》를 만들어 토실(土室)에 간수한다. 아아, 이런 것이 이윤(伊尹)ㆍ여상(呂尙)ㆍ설(契)ㆍ후직(后稷)의 사업은 아니지만, 세상의 소위 대인 선생(大人先生)들은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암서유사》

▶대인선생(大人先生) : 도가적 철리(哲理)를 체득한 사람들.

 

● 의리(義理)를 말한 글을 읽고, 법첩(法帖)의 글씨를 익힌다. 맑은 마음으로 고요히 앉아 유익한 벗과 청담(淸談)을 한다. 몇 잔 술로 얼근해지면 화초에 물을 주고 대나무를 심는다. 거문고를 듣다가는 학(鶴)을 애완(愛玩)하고, 향을 피우다 차도 끓인다. 배를 띄워 산수(山水)를 구경하고 장기와 바둑에도 뜻을 붙인다. 비록 다른 낙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바꾸지 않으리라. 《옥호빙》

 

● 새 집이 낙성되었는데 시가(市街)의 소음이 귀에 들리지 않고, 속인(俗人)들의 수레가 문간에 닿지 않고, 손님이 찾아오면 자리를 권한다. 문 앞에는 푸른 산이 서 있고 흐르는 개울이 왼쪽에 있다. 곧장 세상일을 이야기하다가는 바로 큰 술잔[大白]을 띄워본다.  《옥호빙》

 

● 손이 뜻대로 움직일 때 대나무를 다듬어 낚싯대를 만들고, 맑은 물에 배를 띄워 푸른 숲이 우거진 언덕배기에 제멋대로 앉아 낚시질을 하노라면, 정말 인간의 잡념을 잊어버리게 된다.

사강락(謝康樂)의 이른바 ‘북고산(北固山) 밑에 큰 고기가 많이 있기에, 한 번 낚시를 드리우자 마흔 아홉 마리를 낚았다.’ 하였으니, 이때의 흥취야말로 어찌 엄릉(嚴陵 엄광(嚴光))만 못하랴. 《소창청기》

 

● 한가로이 지내기란 달관(達官)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성현들의 글을 볼 때 군부(君父)를 대한 것처럼 하고, 역사를 볼 때는 공안(公案)을 보는 것처럼 하며, 소설을 볼 때 광대[優伶]를 보는 것처럼 하고, 시(詩)를 볼 때는 가곡(歌曲)을 듣는 것처럼 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 낙이 어찌 달자(達者)와 다르랴. 《소창청기》

 

● 잠명(箴銘) 얼마쯤은 누구의 소작인지 알 수 없는데, 그 글[詞]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술은 적게 마시고 죽은 많이 먹으며, 채소는 많이 먹고 고기는 적게 먹는다. 입은 적게 열고 눈은 자주 감으며, 머리는 자주 빗고 목욕은 적게 한다. 떼 지어 있기는 적게 하고 혼자 자기를 많이 하며, 서적은 많이 수집하고 금옥은 적게 모은다. 명성은 적게 취하고 굴욕은 많이 참으며, 착한 일은 많이 하고 녹(祿)은 적게 구한다. 편리하다고 다시 가지 말라. 좋은 일도 없음만 못한 법이다.” 《공여일록(公餘日錄)》

▶잠명(箴銘) : 잠(箴)과 명(銘)은 한문 문체로 잠(箴)은 타인이나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고, 명(銘)은 금석이나 기물 같은 데에 새긴 글로 그 내용은 경계, 송축 등 다양하다.

 

● 산에서 사는 것이 도시[城市]보다 낫다. 대개 여덟 가지 덕이 있으니, 까다로운 예절을 책망하지 않게 되고, 생소한 손님을 만나지 않게 되고, 술과 고기를 혼식(混食)하지 않게 되고, 전택(田宅)을 다투지 않게 되고, 세태[炎涼]를 묻지 않게 되고, 곡직(曲直)을 다투지 않게 되고, 글빚[文逋]을 받지 않게 되고, 벼슬의 이동[仕籍]을 말하지 않게 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라면, 곧 소 흥정하는 가게이고 말 매매하는 역(驛)이다. 《소창청기》

▶글빚[문포(文逋)] : 남에게 글을 지어 주기로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빚.

 

● 어떤 손님이,

“산에서 살려면, 권속(眷屬)이 곤란하고 산중 이웃이 곤란하고 산중 벗이 곤란하고 산중 심부름꾼이 곤란하다.”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면 산당(山堂) 앞의 풀이 한 길이나 되게 자라날 것이니, 집안일을 끊도록 단속하는 것만 못하다. 즉 두서너 동자(童子)들을 가려서 데리고 가, 그 중에 힘센 놈에게는 밥하고 불 때고 나무하고 김매게 시키고, 약한 자에게는 청소[洒掃]하고 서사[鈔寫]하도록 한다. 그러면 자손 중에 이 뜻을 잘 체득한 자는 공양(供養)할 것을 보내주게 되고, 벗들 중에 잘 생각하는 사람은 선물을 보내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이외의 다른 도리는 모르겠다.” 《암서유사》

 

● 낙빈왕(駱賓王)의 시에,

 

書引藤爲架 책은 등나무를 끌어다 시렁을 만들고

人將薜作衣 사람은 벽산 가져다 옷을 지었도다.

 

했는데, 이러한 경지(境地)는 독서할 만도 하고 늙음을 잊을 만도 할 것이다. 《암서유사》

▶벽산(碧山) : 풀과 나무가 무성한 푸른 산.

 

[<고사인물도 10폭병풍((故事人物圖十幅屛風)> 中 2폭, 민화병풍, 국립민속박물관 ㅣ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은 약초를 캐러 가셨다 하네. 이 산 속에 계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구름이 짙어 어디 계신지는 모른다하네).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라는 시.]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