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31 - 한정록(閑情錄) 광회(曠懷) 1

從心所欲 2021. 10. 3. 06:01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광회(曠懷)는 9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장부(丈夫)의 처세(處世)는 마땅히 가슴이 탁 트이도록 가져야 하니, 상황에 따라 마음을 크게 먹고 순리(順理)로써 스스로를 억제하면 인품(人品)이 고상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자연 고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9 ‘광회(曠懷)’로 한다.”

 

● 조화옹(造化翁)이 사람에게 공명(功名)과 부귀(富貴)를 아끼지는 않으나 ‘한가한 것[閒]’만은 아낀다. 천지 사이에는 천지 운행의 기틀[機]이 발동하여 돌고 돌아 한 순간도 정지하는 때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지도 한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 서랴.

그러므로 높은 벼슬에 많은 녹을 받는 사람이나 청직(淸職)이나 현직(顯職)에 있는 사람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염퇴(恬退 : 조용히 세속적인 데서 떠남)를 즐기는 자는 매우 적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는 날마다 재산을 모으고 좋은 집을 지으려는 생각뿐이나 한 번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고 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집에서 먹고 지낼 수만 있다면 정말 한가한 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돈 전대만을 꼭 간수하려고 손을 벌벌 떨고, 금전 출납부만을 챙기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먹고 있으니 어찌 낮에만 분망하겠는가. 밤 꿈에도 뒤숭숭할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다면 좋은 산수(山水)와 좋은 풍경(風景)에 대해서야 어찌 일찍이 맛을 알겠는가. 그리하여 부질없이 생(生)을 수고롭게 하다가 죽어도 후회할 줄 모른다. 이들은 실로 돈만 모을 줄 아는 수전노(守錢奴)로서 자손을 위하여 소나 말과 같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수전노보다도 더 심한 자가 있으니, 그들은 자손을 위하여 거의 독사나 전갈(全蠍)같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不是閑人閑不得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閑人不是等閑人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라는 시구가 있다. 《문기유림(問奇類林)》

▶조화옹(造化翁) : 조물주(造物主).

 

 

● 호무평(胡武平 : 무평은 송(宋) 호숙(胡宿)의 자)이 그 기상이 고상(高爽)하고 의논(議論)이 참신하며,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너그러우며 성실(誠實)하고 정성스러운 것이 원래 자연적으로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평생 도(道)를 지키고 진퇴(進退)를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 문관(文館)에 있기 20여 년, 그는 후진(後進)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은 천명(天命)에 달렸으니, 선비는 마땅히 몸을 닦고 명을 기다릴 뿐이요, 조물주(造物主)의 비웃음을 당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어떤 중[僧]이 산에 머물러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쫓아내려고 모책하였다. 그러자 중이 짚신 한 짝을 방장(方丈 : 수행도량의 가장 높은 중 또는 그가 거처하는 곳) 앞에 걸어두고 시를 써 놓기를,

 

方丈前頭掛草鞋 방장 앞에 짚신을 걸어 놓았으니

流行坎止任安排 내쫓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게나.

老僧脚底從來闊 늙은 중이 다닐 곳은 예부터 넓은 법이니

未必骷髏就此埋 내 해골이 이곳에 묻힐 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네.

 

하였다 한다. 나는 생각하건대 사대부(士大夫)의 거취(去就)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본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옛날에 경윤(京尹)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성명은 잊었다. 하여간 그는 부임할 때에 가솔을 거느리고 가지 않고, 짐이라고는 다만 낡아빠진 상자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매양 새벽에 일어나면 장막을 치우고 자리를 거두며, 밥을 먹고 나면 밥그릇을 씻고 수저를 거두어 두고는 지팡이로 낡은 상자 짐을 청사(廳事) 앞에 받쳐놓곤 하였다. 이는 나그네가 항상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두려움 없이 세력 있는 토호(土豪)들과 환시(宦寺)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양성재(楊誠齋 : 성재는 송(宋) 양만리(楊萬里)의 호)가 입조(立朝)하던 때에는 날마다 집에 돌아갈 때에 드는 여비를 계산하였으며, 돌아갈 때 짐에 부담이 될까보아 한 가지의 물건도 사지 못하게 하고는 날마다 짐을 묶어 놓아 마치 행장(行裝)을 재촉하듯이 하였으니 바로 이와 같은 뜻이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당(唐) 나라 배진공(裴晉公 : 배도(裴度))은 술수(術數)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닭고기든 돼지고기든 물고기든 마늘이든 닥치는 대로 먹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때가 오면 그대로 따른다.”

하였다.

수(隋) 나라 위세강(韋世康)이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하는 뜻이 있었다. 그는 자제들에게 말하였다.

“녹(祿)을 어찌 많은 것을 기다리랴. 기한이 차면 물러가야 하고, 나이는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몸이 병들었으면 사퇴해야 한다.” 《문기유림》

 

● 저공(褚公 : 진(晉) 저부(褚裒))이 장안령(章安令)으로, 태위기실참군(太尉記室參軍)에 천직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이미 드러났으나 지위가 미미하여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공(公)이 언젠가 동으로 출행할 때 장사꾼 배를 타고 고리(故吏) 두어 사람을 전송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당정(錢塘亭)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오흥(吳興)의 심충(沈充)이 현령(縣令)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손님을 전송하려고 절강(浙江)을 들르게 되었다. 그때 손님이 오자 정리(亭吏)가 공(公)을 쫓아내어 소외양간으로 옮기게 하였다.

조수(潮水)가 밀려들자 심충이 일어나 이리저리 거닐다가 소외양간 아래 있는 사람을 보고는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리(亭吏)가 말하기를,

“어제 한 창부(傖父 : 천한 사람)가 와서 정중(亭中)에 기숙하고 있었는데, 존귀한 손님이 있어서 임시로 그곳에 옮겼습니다.”

하였다. 그때 마침 현령이 술기운이 거나하여 멀리서 묻기를,

“창부야 보리떡을 먹고 싶은가? 그리고 성명은 무엇인가? 너와 말을 나누고 싶다.”

하니 저공(褚公)이 손을 들어 대답하기를,

“하남(河南) 사는 저계야(褚季野)로, 멀고 가까운 곳에서 공(公)의 이름을 알고 있은 지 이미 오래되었소.”

하였다. 그러자 현령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감히 공을 오라 하지 못하고 소외양간에서 자기 명함을 써서 공에게 인사하고, 다시 짐승을 잡아 진수성찬을 차려 공의 앞에 차려 놓았다. 그리고는 정리(亭吏)의 종아리를 쳐서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와 더불어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 언동과 안색이 평시와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였다. 나중에 현령이 공(公)을 전송할 때에 현계(縣界)까지 나왔다.  《세설신어(世說新語)》

 

● 송(宋) 나라 청헌공(淸獻公 : 조변(趙抃)의 시호)이 성도(成都)의 전운사(轉運使)가 되었는데, 부내(部內)를 출행할 때에는 오직 한 마리 학(鶴)과 한 대의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앉으면 거문고를 타면서 학을 보았다. 그리고 항상 청성산(靑城山)을 찾았는데, 눈을 만나면 여관에서 쉬었으나 주인이 그가 조변인 줄을 알지 못하고는 혹 거만을 부리면서 업신여겼지만 공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거문고를 탈 뿐 따지려들지 않았다.

 

사마온공 광(司馬溫公光 : 온공은 봉호(封號)임)이 서경유대(西京留臺)가 되었으나 매양 출행할 때는 전구(前驅 : 말을 타고 행렬의 앞에서 인도함)가 삼절(三節)에 지나지 않았고, 나중에 관궁사(官宮祠)가 되었을 때는 말을 타면 혹 일산을 펴지 않고 자기가 든 부채로 햇볕을 가렸다. 그러자 정이천(程伊川 : 송(宋) 정이(程頤))이 말하기를,

“공이 출행할 때에 뒤따르는 기병(騎兵)이 없어 거리의 사람들이 혹 공인 줄을 모를 것이니 편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온공이 말하였다.

“나는 오직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를 바라네.” 《문기유림》

 

● 여형공(呂滎公 : 형공은 송(宋) 여희철(呂希哲)의 봉호(封號))이 만년에 숙주(宿州)ㆍ진양(眞陽) 사이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그때 의식(衣食)이 넉넉하지 못하여 수일 동안이나 양식(糧食)이 떨어진 적이 있었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방에 들어앉아 가사(家事)를 일체 묻지 않고 털끝만큼도 주현(州縣)에 부탁하지 않았다. 그가 화주(和州)에 있을 때 일찍이 시를 짓기를,

 

除却借書沽酒外 나에게는 책 빌려오고 술사는 일뿐

更無一事擾公私 공사간에 시끄러운 일이라곤 없네.

 

하였다. 《저기실(楮記室)》

 

● 요유(姚儒)가 말하였다.

“《서경(書經)》에 ‘그 마지막을 삼가라’ 하였고, 《시경(詩經)》에 ‘처음엔 좋지 않음이 없으나 그 끝을 잘 맺는 이는 드물다.’ 하였다. 그렇다면 군자(君子)란 완전한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은 만년에 있으니, 조심조심하여 스스로를 잘 지켜 나가더라도 오히려 뜻밖의 잘못이 있을까 두려운 것이다.

만에 하나 늙어 죽을 날이 가까울 때에 처첩(妻妾)과 자손(子孫)의 장래를 도모하기 위하여 이해득실을 걱정해서, 자기 스스로 더럽게 행동하여 나쁜 인상을 준다면, 사람들의 조소와 욕이 뒤따를 것이니, 이것이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늙어 혈기(血氣)가 이미 노쇠해진 때에 경계할 것은 탐욕(貪欲)에 있다.’ 고 한 것이다.” 《지비록(知非錄)》

 

● 한위공(韓魏公 : 위공은 송(宋) 한기(韓琦)의 봉호(封號))이 일찍이 말하기를,

“초년의 절조는 보존하기 쉬워도, 만년의 절조는 보전하기 어렵다.”

하고, 구월(九月) 구일(九日)에 여러 사람과 잔치할 때 지은 시에,

 

莫嗟老圃秋容淡 가을철 늙은 농부의 모습 담담하고

要看黃花晩節香 국화꽃은 가을이 깊어 더욱 향기 나네.

 

하였는데, 이언평(李彦平 : 언평은 송(宋) 이형(李衡)의 자)은 이 말을 공경하여 곧 큰 글씨로 벽에 써 붙이고 스스로의 규범으로 삼았다. 《사문유취(事文類聚)》

 

● 범 충선공(范忠宣公 : 충선은 송(宋) 범순인(范純仁)의 시호)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섭생(攝生)의 이치로 서로 권면하는 것은 사람이란 원래 오래도록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지 못해서이다. 가령 정영위(丁令威 : 한(漢) 요동(遼東) 사람으로, 도(道)를 배워 학(鶴)이 되었다 함)와 같이 1천세에 학으로 화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그때의 성곽(城郭)과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자기가 있을 때의 성곽과 사람들이 아니라면 자기만이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견문수옥(見聞搜玉)》

 

● 육평천(陸平泉 : 평천은 명(明) 육수성(陸樹聲)의 호)이 말하였다.

“문장(文章)과 공업(功業)에 뜻을 둔 선비가 세상에 바라던 것이 만족하게 이루어지면 왕왕 좋은 약을 구하여 먹으면서 오래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산 운수(運數)가 이미 많으면 조화옹(造化翁)의 아끼는 바가 될까 두려우니, 오직 검약으로 큰 일을 대처하고, 좋은 것은 조금 취(取)하고 적게 향유하여 그 여생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다.

옛날에 백향산(白香山 : 향산은 백거이(白居易)의 호)이 충주 별가(忠州別駕)가 되었는데, 명(命)이 내리자 그 이튿날 단조(丹竈 : 술사(術士)가 단약(丹藥)을 만드는 곳)를 부수었으니, 대체로 세간법(世間法 :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출세간법(出世間法 : 도교(道敎)나 불교(佛敎)처럼 이 세속을 떠나 사는 방식)은 양립(兩立)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다.”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

 

● 소식(蘇軾)이 별가(別駕)로 담주(儋州)에 안치(安置)되자 처음 도착해서는 관사(官舍)를 세내어 거처했는데, 유사(有司)가 안 된다고 하자 드디어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담주 사람들이 돌을 운반하고 삼태기에 흙을 담아 나르며 도왔다. 그는 날마다 어린 아들 과(過)와 그곳에서 글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고, 때로는 큰 바가지를 짊어지고 밭이랑 사이를 다니면서 노래를 하였는데, 70세 된 엽부(饁婦 : 농부에게 들밥을 해다 주는 아낙네)가 있어 그에게 말하기를,

“내한(內翰 : 송(宋) 한림 학사(翰林學士))의 옛날 영귀(榮貴)가 한바탕 봄꿈이었습니다.”

하니, 소식이 정말 그렇게 여기고 인하여 엽부를 ‘춘몽파(春夢婆)’라고 호하였다.

그때에 왕정국(王定國 : 정국은 왕공(王鞏)의 자)이 소식의 당(黨)에 연좌되어 침주(郴州)로 폄관(貶官)되어 있었는데, 소식이 북(北)으로 귀향할 때 왕공(王鞏)과 작별하였다. 그러자 공이 시아(侍兒)인 유노(柔奴)에게 술을 내오게 하니, 식이 유노에게 묻기를,

“영남(嶺南)이 응당 좋지 않을 것이다.”

하자, 유노가,

“이 마음이 편안한 곳이 곧 내 고향입니다.”

하였다. 식이 이로 인하여 유노에게 정풍파(定風波)란 사(詞) 한 편을 지어 주었다. 엽부와 유노는 참으로 달자(達者)요, 초야(草野)에 묻힌 여류(女流)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설에 춘몽파를 정풍파(定風波)라고도 하는데, 마침내 그 사(詞)가 천고(千古)의 쾌담(快談)이 되었다. 《문기유림》

▶달자(達者) : 널리 사물(事物)의 도리(道理)에 통(通)한 사람

 

● 범 충선(范忠宣 : 충선은 송(宋) 범순인(范純仁)의 시호)이 영주(永州)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이런 편지를 어떤 사람에게 부쳤다.

“이곳의 양면(羊麪)이 북방(北方)의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매일 문을 닫고 들어앉아 박탁(餺飥 : 떡의 종류)만을 먹고 있으니 몸이 먼 지방에 와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겠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 소동파(蘇東坡)가 널리 천하의 선비를 사랑하여 어진 자나 불초한 자나 가리지 않고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위로는 옥황대제(玉皇大帝)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비전원(卑田院 : 빈궁한 백성을 구제하여 기르는 곳)에서 빌어먹는 아이도 모실 수 있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유(子由 : 동파의 아우 소철(蘇轍)의 자)가 조금 틈이 있으면 늘 동파에게 사람을 가려서 교제할 것으로 경계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동파는 말하기를,

“내 눈앞에 보이는 천하에는 한 사람도 좋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하나의 병이다. 《철경록(輟耕錄)》

 

● 부귀(富貴)란 사람에게 있어서 조물주(造物主)가 아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부귀는 젊은 시절에는 있지 않고 항상 늘그막에야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젊을 때의 부귀도 없으란 법은 없으나 대개 그런 경우는 드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늘그막에 이르러 부귀를 얻더라도 그것은 큰 저택을 마련하고 기생이나 첩을 팔고 사며 자기 평생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을 보상하는 꼴이 됨을 면치 못한다.

백낙천(白樂天)의 시(詩)에,

 

多少朱門鎖空宅 대궐 같은 많은 집 빈 채로 잠겨 있고

主人到老不曾歸 주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구나.

 

라고 한 것이나, 또 사공서(司空曙)의 시에,

 

黃金用盡敎歌舞 황금을 탕진하여 노래 춤 가르치지만

留與他人樂少年 타인에게 주어 타인의 젊음을 즐기게 하네.

 

한 것과 같다. 이 두 사람의 시를 읽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게 만든다. 그러니 실로 이것도 할 만한 것이 못된다. 《저기실(楮記室)》

 

● 당(唐) 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시에,

 

昨日流鶯今日蟬 어제는 꾀꼬리 소리더니 오늘은 매미 소리로다.

起來又是夕陽天 일어나 가려 하니 또 하루해가 저무는구나.

六龍飛轡長相窘 여섯 말이 끄는 수레처럼 세월은 빠른데

更忍乘危自着鞭 거기다 위험을 타고 스스로 앞서가서야 되겠는가.

 

하여, 색(色)은 자기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 경계하였다. 그리고 양성재(楊誠齋)는 해학(諧謔)을 잘하였는데, 항상 호색(好色)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일찍이 그대를 부르지 않는데, 자네가 곧 스스로 가까이 가기를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였으니, 그 말이 바로 이 시의 뜻이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한위공(韓魏公 : 위공은 송(宋) 한기(韓琦)의 봉호)이 승상부(丞相府)에 있을 때 집에 20여명의 여악(女樂)이 있었는데, 최씨 부인이 사망하게 되자 어느 날 그들을 모두 후하게 재물을 주어 내보냈다. 그러자 같은 반열의 사람들이 그냥 머물러 두었다가 노년의 환락(歡樂)거리로 삼으라고 하자 공(公)이 말하였다.

“즐거운 때가 얼마나 된다고 늘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하니 무엇이 나의 간결하고 고요한 즐거움만 같으리오.”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

 

● 백낙천(白樂天)은 치사(致仕)하자 곧 가사(家事)를 정리하고 경비(經費)를 회계하고 우물(尤物 : 값진 물건 혹은 아름다운 여자)을 정돈하였다. 그런데 기생 중에 번소(樊素)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는 20여 세로 노래와 춤을 멋지게 잘했다. 특히 양류지(楊柳枝)를 잘 불렀으므로 사람들이 곡(曲)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자가 많아 그가 낙양(洛陽)에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백낙천은 이미 치사하고 또 풍증(風症)에 걸렸으므로 그녀를 놓아 보내려 하니, 번소가 슬피 울면서 차마 가지 못하였다.

그것을 본 백낙천은 가엾게 여겨 드디어 자기가 떠날 때에 그녀와의 정을 잊지 못하는 시를 읊었다. 그리고 고황(顧況)이, 의성(宜城)이 금객(琴客)을 놓아 보낸 데 대해 지은 시가 있으니, 금객은 의성의 애첩(愛妾)이었으나 의성이 치사(致仕)를 청하게 되자 애첩도 출가(出嫁)시켰다.

인욕(人欲)을 금하여 자기 이목(耳目)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달자(達者)이다. 《문기유림》

 

● 두소릉(杜少陵 : 당(唐) 두보(杜甫)의 자호(自號))의 시(詩)에,

 

莫笑田家老瓦盆 농가의 묵은 질그릇 동이를 보고 웃지 마라.

自從盛酒長叟孫 여기에 술을 담아 마시면서 자손을 키웠다네.

傾銀注玉驚人眼 은대를 기울이고 옥배로 마실 때는 사람 놀라게 했지만

一醉終同臥石根 함께 취하여 돌 뿌리에 눕기는 한가지라네.

 

하였으니, 대개 질그릇 동이에 술을 담아 마시는 것이나 은대(銀臺 : 좋은 술잔)를 기울이고 옥배(玉杯)에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이나 한번 취하는 건 마찬가지이고, 소나무 침상에 왕골자리나 비단 장막에 옥베개나 한번 잠자는 것은 마찬가지임을 말한 것이니, 이 이치를 안다면 빈부와 귀천을 하나로 볼 수 있다. 《학림옥로》

 

[작가미상 <산수도(山水圖)> 中 착조한강설(擉釣寒江雪), 지본담채, 122.8 x 50.2cm, 국립중앙박물관 ㅣ 통상의 소상팔경(瀟湘八景) 겨울 화제(話題)는 강천모설(江天暮雪)이었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