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21 - 한정록(閑情錄) 퇴휴(退休) 2

從心所欲 2021. 9. 8. 10:54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퇴휴(退休)는 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山林)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심(心)과 사(事)가 어긋나거나 공적(功迹)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또 만족하고 그칠 바를 알거나 일의 기미(幾微)를 깨닫거나, 또 아니면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4 ‘퇴휴(退休)’로 한다.

 

 

● 이강보(李疆父)가 일찍이 육화탑시(六和塔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往來塔下幾經秋 탑 아래 왕래한 지 그 몇 해이던가
每恨無從到上頭 매양 꼭대기에 올라갈 수 없음 한했었네.
今日登臨方覺險 이제 올라와 보매 바야흐로 위험함 깨달으니
不如歸去臥林丘 산림(山林)으로 돌아가 편히 눕는 것만 못하네.

 

강보(疆父)는 정승을 지내면서 청정(淸正)한 마음가짐으로 삼가 법을 지켰고, 자신의 생활은 빈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했으며, 손에는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저기실(楮記室)》

 

● 방장민(龐莊敏)이 정주(定州)를 맡고 있으면서 늙었다는 것으로 자주 물러가기를 청했다. 어떤 사람이,

“상께서 바야흐로 정치를 잘해 보려고 주력하고 있고, 또 공께서는 정력(精力)이 아직 매우 건장한데, 무엇 때문에 굳이 물러가려 하십니까?”

하니, 공이,

“반드시 근력이 쇠진하고 임금이 싫어하게 되어서야 떠나는 것은 부득이해서 떠나는 것이지, 어찌 만족함을 알아 중지하는 것이겠소?”

했다.

문충공(文忠公) 구양수(歐陽脩)가 채주(蔡州)에 있으면서 자주 치사(致仕)하기를 청했었다. 그때 문상(門生) 채승희(蔡承禧)가 틈을 타서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선생님을 중하게 대우하고 있고, 또 물러갈 연세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물러가려 하십니까?”

하니, 공이,

“내 평생의 명절(名節)은 모두 후생(後生)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니, 일찍 물러가 만절(晩節)을 온전히 해야 할 뿐이다. 쫓아내기를 기다릴 게 뭐 있겠는가. 조정에 있는 대신들은 모두 임금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후생들이 본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러니 염치의 기풍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했다. 《문기유림(問奇類林)》

 

● 조열도(趙閱道)는 기개와 도량이 청일(淸逸)했고, 그가 기뻐하거나 화내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호(自號)를 지비자(知非子)라 했다.

처음 성도(成都)에 부임했을 땐 비파 하나와 학(鶴) 한 마리를 가지고 갔었다. 다시 부임할 땐 비파와 학도 버리고 일을 돌보는 창두(蒼頭 : 하인)만 데리고 갔다. 공이 평생 동안 계속했던 일은 밤이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갖추고 밖에 나와 향불 피우고 하늘에 고(告)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할 만한 일이 없으면 감히 하지 않았다.

원풍(元豐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초에 늙었다는 것으로 사직(辭職)하고 물러와 구(瞿 : 지명)에서 살았다. 그곳은 시내와 돌,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는 승경(勝境)이었다. 여기서 중이나 농부들과 즐기면서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의 시(詩)에,

 

軒外長溪溪外山 난간밖엔 시내요 시내 너머 산이라

捲簾空曠水雲間 발 걷으니 텅 빈 하늘 물과 구름 사일러라.

高齋有問如何答 고재(高齋)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랴

淸夜安眠白晝閑 맑은 밤엔 편히 자고 낮엔 한가롭다네.

 

했다. 《유씨홍서(劉氏鴻書)》

 

● 정공(鄭公 : 정(鄭)은 부필의 봉읍) 부필(富弼)이 치사(致仕)한 뒤 맑은 마음으로 도(道)를 배우면서 환정당(還政堂)에 혼자 거처했다. 매양 아침 일찍 일어나 중문(中門)을 열고 가묘(家廟)에 들어가 예(禮)를 올렸고, 아내 대하기를 손님 대하듯 했으며, 자손들도 의관(衣冠)을 정제하지 않고서는 만나지 않았다. 《주사(麈史)》에,

“정공(鄭公)은 집을 엄정하게 다스렸으므로 자제(子弟)와 여자종들 사이라도 함께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규문(閨門)이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했다. 《저기실(楮記室)》

 

● 정공(鄭公) 부필(富弼)이 치사(致仕)하고 서도(西都)로 돌아와 있었다. 어느 날 베로 만든 도포(道袍)를 입고 나귀를 타고는 교외로 나갔다가 수남 순검(水南巡檢)의 행차를 만났다. 수남 순검은 중관(中官)인데 길을 인도하는 전도(前導)의 위의(威儀)가 매우 성대했다. 앞서서 길을 인도하던 군졸이,

“나귀 타고 가는 자는 나귀에서 내리라.”

고 고함쳤다. 그래도 공은 채찍을 휘둘러 나귀를 재촉하기만 하니, 군졸의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또 고함치기를,

“나귀에서 안 내리려거든 관위(官位)를 말하라.”

했어도, 공은 채찍만 휘두르면서,

“필(弼)이다.”

했다. 그래도 군졸은 깨닫지 못하고 순검에게 아뢰기를,

“앞에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타고 길을 가로막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위(官位)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필(弼)이라고만 합니다.”

하니, 순검은 바야흐로 상공(相公 : 부필을 가리킴)인 줄 깨닫고 말에서 내려 길가에 부복(俯伏)하고 안후 올리기를,

“수남 순검은 안후 올립니다.”

하고 공손히 읍을 했다. 그래도 공은 대답도 않고 채찍을 휘둘러 급히 가버렸다. 《패사휘편(稗史彙編)》

 

● 한지국(韓持國)이 만년에 허주 태수(許州太守)로 있었다. 그때 최자후(崔子厚)도 그 지방 고을의 원으로 있었다. 한지국의 생일날이 되자 보내온 선물들이 별처럼 벌여 있었으나, 최자후만은 이런 시를 올렸다.

 

衣錦榮名雖烜赫 비단옷에 영광스러운 명예 빛나는 것이긴 하지만

掛冠高節莫因循 봉맹(逢萌)처럼 벼슬 버리는 고상한 절개 주저 마오.

 

한지국은 차탄하며 시를 읊고 나서 한참 만에,

“그대가 아니면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겠는가.”

하고, 드디어 치사(致仕)했다. 《문기유림》

▶봉맹(逢萌) :전한(前漢) 말엽 왕망(王莽) 때 사람으로, 왕망이 자기 아들인 왕우(王宇)를 죽이자 “삼강(三綱)이 끊어졌다. 머지않아 화(禍)가 사람들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관(冠)을 벗어 동도(東都)의 성문에 걸고 나서 가족을 데리고 요동(遼東)으로 떠났다 한다.

 

● 범경인(范景仁)이 벼슬에서 물러나 경사(京師)에 있는 집에 거처하고 있었다. 여기서 오로지 글을 읽고 시 짓는 것만을 스스로 즐겼다. 손님이 오면 귀천을 막론하고 야복(野服 : 농부의 의복)으로 만났고, 다시 찾아가 사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혹 음식을 갖추어 놓고 초청하는 이가 있으면 그가 권귀(權貴)한 사람일지라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지 않으면 가서 만나지 않았다.

일찍이 남여(藍輿)를 타고 촉(蜀) 지방에 가서 친구들과 술 마시며 즐긴 적이 있었다. 그때 노자(路資)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곤 강산(江山)을 두루 구경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다 관람한 뒤 1년 만에 돌아왔다. 나이가 더욱 늙을수록 눈과 귀가 더욱 밝아졌고 신체도 더욱 건강해졌다.

아, 경인(景仁)이 자신의 도(道)를 굽혀 세상에 나가기를 희구해서 부귀를 얻고 염치를 무릅쓰고 지위를 맡고 있었더라면 오늘의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경인은 얻은 것이 많다 하겠다. 《금뢰자(金罍子)》

 

● 진우경(陳虞卿 : 우경은 진지기(陳之奇)의 자)은 훌륭한 덕이 있었기 때문에 고장 사람들이 군자(君子)라 일컬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태자 중윤(太子中允)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는데, 이때 나이 50도 못 되었다. 곧이어 평강군 절도(平江軍節度)에 제수되어 서기(書記)를 맡았으며, 다시 교수(敎授)에 임명하고 조서(詔書)로 여비를 주어 빨리 떠나보내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공은 극력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公)은 도덕으로 고장에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마을의 어린애들도 존경할 줄 알았다. 한번은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고 쟁송(爭訟)하던 자들이 노새를 타고 공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래서 공이 대의(大義)를 들어 감동시켰더니 모두 마음을 고쳤다.

처음 공이 벼슬에서 물러날 때 시랑(侍郞) 장낭(張朗)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온 천하가 모두 부귀만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경(虞卿)만은 중지할 줄을 알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혁신시켰습니다. 나는 임하(林下)에 훌륭한 사람이 있음을 기뻐합니다.”

했다. 《저기실(楮記室)》

 

● 왕 형공(王荊公 : 형공은 왕안석(王安石)의 봉호(封號))이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어떤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친 일이 있었다. 점쟁이가,

“공명과 부귀가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점을 치십니까?”

하니, 공이 정색하고,

“지금 극력 물러가기를 청해도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네. 그래서 곧 떠나게 될 수 있을지를 봐 달라는 것이네.”

했다. 점쟁이가,

“상공(相公)이시여! 임금의 신임이 두터울 때 물러가 쉬는 것이 좋다고 내가 전에 상공을 위해 말했지 않습니까. 가고 싶으면 가는 겁니다. 이는 전혀 상공에게 달린 것이지 임금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의심할 게 없는 일인데 뭣 때문에 점을 친단 말입니까.”

하니, 공은 창연(悵然)히 탄복하면서 물러갈 뜻을 드디어 결정했다.

아, 지금 물러갈 시기가 지났는데도 스스로 임금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핑계대면서 끝내는 장안(長安)에서 객사(客死)하고 마는 사람들이여! 왜 이 점쟁이에게 가서 한번 점쳐보지 않는가. 《저기실》

 

● 양성재(楊誠齋 : 양만리(楊萬里))는 비서감(祕書監)에서 시작해 강동 조운부사(江東漕運副使)를 맡았었고, 나이 70도 안 되어 남계(南溪) 가에 물러와 쉬었다. 겨우 비바람을 가릴 수 있는 낡은 집 한 채에 늙은 하인 3 ~ 4인이 있을 뿐이었다. 서영휘(徐靈暉)가 시를 보내기를,

 

淸得門如水 청백한 가문 물같이 깨끗하고

貧唯帶有金 가난하기는 허리띠의 쇠고리뿐.

 

했는데, 이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도 총명하고 강건하게 16년 동안 청한(淸閑)한 복을 누렸다.

 

영종(寧宗) 초에 주 문공(朱文公 : 문공은 주희(朱熹)의 시호(諡號))과 함께 부름을 받았었다. 그때 문공은 나아갔지만 공(公)은 나가지 않았다. 주문공이 공에게 보낸 편지에,

“다시 하늘을 즐기고 천명을 아는 즐거움 때문에 사람들과 걱정을 같이한다는 그 걱정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우유(優遊)와 은둔(隱遁)을 지나치게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나는 그래도 이 세상에다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했으나, 공의 고상한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일찍이 공이 스스로 찬(贊)하기를,

 

江風索我吟 강바람은 나에게 시를 읊게 하고

山月喚我飮 산의 달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하네.

醉倒落花前 취해서 꽃밭 앞에 쓰러지니

天地爲衾枕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리구나.

 

했고, 또 찬하기를,

 

淸白不形眼底 청백은 눈에 나타나는 게 아니고

雌黃不出口中 나오는 대로 읊으니 수정이 필요 없네.

只有一罪不赦 단지 용서 못할 당돌한 게 있다면

唐突明月淸風 그지없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라네.

 

했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구만경(裘萬頃)이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그를 천거한 사람이 있어 불려가 억지로 사직(司直)에 임명되었다. 조정에 있으면서 시를 짓기를,

 

新築書堂壁未乾 새로 지은 서당 벽 채 마르기도 전에

馬蹄催我上長安 나를 실은 말발굽 장안으로 달리누나.

兒時只道爲官好 아이 적엔 벼슬이 좋은 거라고 했었는데

老去方知行路難 늙어가면서 바야흐로 어려운 줄 깨닫겠네.

千里關山千里遠 천리나 먼 고향 산 한없이 아득하기만 한데

一番風雨一番寒 비바람 몰아칠 적마다 그지없이 춥구나.

何如靜坐茅簷下 아무래도 띠풀 처마 밑에 조용히 앉아

翠竹蒼梧伃細看 푸른 대나무 싱그런 오동잎 보는 것만 못하네.

 

하고는, 드디어 바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여일록(公餘日錄)》

 

● 관산재(貫酸齋 : 산재는 관운석(貫雲石)의 호(號))가 한림시독학사 지제고 동수국사(翰林侍讀學士知制誥同修國史)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문득 탄식하기를,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거하는 것은 옛 성현이 숭상한 바이다. 내가 전에 사양한 군자(軍資 : 직명(職名))의 벼슬이 이제 이 한림의 청요직(淸要職)과 어느 것이 더 높은 벼슬인가. 사람들이 나를 이러쿵저러쿵 평할 것이다.”

하고, 어버이가 병들었다 핑계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남(江南)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전당(錢塘)의 시중으로 다니면서 약(藥)을 팔았으나, 성명을 바꾸고 옷도 바꿔 입었으므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우연히 양산(梁山)의 낙수(濼水)를 지나다가 갈대꽃으로 짠 옷을 입고 있는 어부를 보고 비단과 바꾸자고 했다. 그랬더니 어부는 이상한 사람이라 의심하여 일부러,

“당신이 내 옷을 갖고 싶으면 다시 시(詩) 한 수를 지어야겠소.”

하니, 즉석에서 붓을 들어 시를 짓고는 어부의 옷을 가져갔다. 세상에서는 이 시를 노화피시(蘆花被詩)라고 떠들썩하게 전하고 있다. 그가 의연히 숨어서 세상을 하찮게 여긴 일에는 이런 유가 많았다. 《철경록(輟耕錄)》

▶노화피(蘆花被) : 솜 대신 갈대의 꽃을 넣어 두툼하게 만든 이불. 여기서는 옷을 가리킨다.

 

[고사인물도 8폭 병풍(故事人物圖八幅屛風) 中 <동강수조(桐江垂釣)>, 지본담채, 국립민속박물관]

 

● 양철애(楊鐵崖 : 철애는 양유정(楊維楨)의 호)가 이런 말을 했다.

“내 나이 70이 못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구봉(九峯)의 삼묘(三泖)에 있은 지 거의 20년이다. 그런데 경치를 즐기며 자연스럽게 노닌 것은 백낙천(白樂天 : 백거이(白居易)의 자)보다 나았다. 이오봉(李五峯)ㆍ장구곡(張句曲)ㆍ주이치(周易癡)ㆍ전사복(錢思復)은 나와 글을 주고받는 벗이고, 도엽(桃葉)ㆍ유지(柳枝)ㆍ경화(瓊花)ㆍ취우(翠羽)는 나를 위하여 노래하는 기생이다. 단지 지대(池臺)와 화월(花月)에 진공(晉公 : 배도(裴度)의 봉호) 같은 주인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동쪽 지방 태수에 이월주(李越州)ㆍ장오흥(張吳興)ㆍ한송강(韓松江)ㆍ종해감(鍾海監) 같은 이들이 고연(高宴)을 베풀고 성악을 울릴 때 그들의 윗자리에 앉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지대(池臺)의 주인도 없는 것은 아니다.

경치 좋은 날 봄물에 배 띄우고 오월(吳越) 사이로 달려 호사자(好事者)를 초치, 옛사람들의 수선방(水仙舫) 고사(故事)를 본받아 노닐면, 섬 모습이 거꾸로 비친 호수의 푸른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는데 모두들 나를 바라보면서 철룡선(鐵龍仙)이라 부른다. 잘은 모르겠지만 향산노인(香山老人 : 백거이의 호)에게 이런 것은 없었으리라.”

▶수선방(水仙舫) 고사(故事) : 도잠(陶潛)의 손자인 도현(陶峴)이 곤산(崑山)에 살면서 배를 타고 강호(江湖)를 유람했었다. 도현은 스스로 세 개의 배를 만들어 맹언심(孟彦深)ㆍ맹운경(孟雲卿)ㆍ초수(焦遂)와 함께 타고 즐겼으므로 당시에 이들을 수선(水仙)이라 불렀다. 

 

객(客) 가운데 소해생(小海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공에게 축하 올리기를,

“강산풍월(江山風月)에 신선 복인(神仙福人)이십니다.”

하고, 공의 노안(老顔)을 그리고 시를 써,

 

二十四考中書令 스물네 번 고시(考試) 맡았던 중서령과

二百六字太師銜 이백여덟 자의 태사 직함(職銜)도

不如八字神仙福 강산풍월 신선복인이란 여덟 자로

風月湖山一担擔 호산(湖山)의 풍월을 누리는 것만은 못하네.

▶스물네 번 ... 중서령 :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가 중서령으로 스물네 번 고시(考試)를 주관했었던 일.

 

했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왕 문단(王文端 : 문단은 왕직(王直)의 시호(諡號))이 치사(致仕)하고 집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나이 80이 넘었어도 늘 부인과 따로 견여(肩輿)를 타고 농지를 순행했다. 또 자손들이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올리면서 장수(長壽)를 축원하니, 만복(萬福)을 고루 누렸다.

어느 날 자리에 앉아 맑은 강물이 불어나 흐르는 것을 구경하다가 자손들에게,

“처음 동리 선생(東里先生 : 양사기(楊士奇))이 나와 같이 내각(內閣)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그때는 마음속으로 불평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대로 벼슬에 있었더라면 천순(天順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초에 제일 먼저 화(禍)를 당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오늘 어떻게 너희들과 물 구경하면서 즐길 수 있었겠는가.”

하고 타일렀다. 《미공비급》

 

● 전당(錢塘)의 왕기(王琦)가 50세에 치사하고 돌아와 산업에 힘쓰지 않았다. 그래서 깊은 겨울 큰 눈이 내린 때면 주려 쓰러져 문 밖도 나오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지금 요직에 있는 이들이 공을 매우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입만 한번 떼면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뭣 때문에 이런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하니, 왕기는,

“나는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춥고 배고파도 즐겁지 않은 것이 없다네.”

했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 고소(姑蘇)의 좌 태참 문석(左太參文席 : 태참은 직명(職名))이 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글만 지으면서 살았으므로 아는 사람이 적었다.

마침 윤 총재(尹冢宰)가 공과 동년(同年)이었으므로 고소 태수에게 공을 찾아보도록 부탁했다. 그래서 골목골목 뒤져 짚신에 더러운 모자를 쓴 노인 하나를 찾아냈는데, 모습은 담박했다. 어떤 사람이 공(公)에게 태수(太守)가 오고 있다고 알려주니, 공은 피해버렸다. 《명세설신어》

 

● 장성중(蔣性中)은 급사(給事)로 치사했으며, 성품이 매우 청개(淸介)했다.

한번은 작은 배를 타고 성(城)으로 들어가던 중 낙조(落潮)를 만나 배가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노복이 밧줄을 메워 배를 끌고 장성중이 몸소 노를 저었다. 그러나 다른 배들에게 몹시 밀려 곤욕을 당하자 두 노복이 소리치기를,

“이 배는 장 급사(蔣給事)님의 배다. 너희들은 앞을 가로막지 말라.”

하니, 장성중이 노복들을 꾸짖으면서,

“사람들을 속이지 말라. 이곳에 장 급사가 있을 리가 있겠느냐.”

했다. 《명야사휘(明野史彙)》

 

● 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연간에 조정에서 삼원(三原)의 단의공(端毅公) 왕서(王恕)를 기용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때 여남(汝南)의 강경명(强景明)이,

 

八十耆年二品官 이품 벼슬의 팔십 노인

歸來淸節雪霜寒 맑은 지조 눈서리처럼 차구나.

雖然海內歸心在 비록 해내(海內)로 돌아가고픈 마음 있으나

可奈君前下拜難 임금에게 하직인사 드리기 어렵네.

鷗鷺恐疑威鳳起 갈매기는 위엄스러운 봉새인가 의심하고

風雲長護老龍蟠 풍운은 늙은 용의 기운을 보호한다네.

三公事業三槐傳 삼공의 사업 삼괴(三槐)에 전하니

留取完名久遠看 완전한 이름 얻으려면 먼 장래를 보라.

▶삼괴(三槐) : 송(宋) 나라 때 왕우(王祐)가 뜰에다 세 그루의 괴목(槐木)을 심고 자손들 가운데 삼공(三公)의 지위(地位)에 오를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豫言)했다. 그런데 그 아들 왕단(王旦)이 삼공에 올랐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당(堂)을 건립하고 삼괴당(三槐堂)이라 이름했다 한다. 

 

하는 시를 보내왔다.

공은 이 시를 받고 매우 기뻐하여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시를 부친 사람이나 시를 읽고 따른 사람이나 모두 다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 《명야사휘》

 

● 장풍산(章楓山 : 장무(章懋)를 가리킨다)이 첨헌(僉憲)으로 고적(考績 : 관리의 근무성적 평가)을 받아 승진하게 되자, 드디어 사직(辭職)하고 물러가기를 청했다. 그때 총재(冢宰) 윤민(尹旻)이 만류하면서,

“공은 직무를 감당치 못한 것도 없고 탐욕이나 잔혹한 일을 한 적도 없었고 늙고 병든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물러가려 하십니까?”

하니, 선생이,

“옛사람은 조정에 벼슬하면서 안색을 엄정히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못했으니 이는 직무를 감당치 못한 것이 많은 탓이고, 옛사람은 하나라도 의(義) 아닌 것은 취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렇게 못했으니 이는 탐욕이 많은 탓이고, 옛사람은 백성을 다친 사람 보살피듯 했는데 나는 그렇게 못했으니 이는 잔혹한 짓이 많은 탓이고, 나이 50도 안 되었지만 수염과 머리가 일찍 세었으니 또한 늙고 병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윤민이 감동했다. 《패사휘편(稗史彙編)》

 

● 장풍산(章楓山)은 벼슬이 좨주(祭酒)에 이르렀었다. 뒤에 조정에서 시랑(侍郞)과 상서(尙書)로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집에 20묘(畝)의 전지(田地)가 있었고 식솔은 하인과 집안의 남녀를 합쳐 10인뿐이었다. 한 사람 당 하루 식량이 1승(升)이었으므로 1년의 필요량은 36석(石)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금화(金華 : 지명)에서 거두어들일 수확이 흉작이 든 때면, 세입(歲入)이 필요량의 반에도 차지 못했다. 또 찾아오는 손님들이 예(禮)로 주는 선물도 풍산이 늘 받지 않았으므로 손님들도 선물 가져가는 것을 잊어온 터였다. 그래서 때로 식량이 모자라면 보릿가루를 죽반(粥飯) 속에 넣어 먹었다.

오일원(吳一源)이 젊을 때 풍산에게 가서 공부했으므로 수시로 가서 배알했다. 풍산은 구레나룻 수염이 많아서 식사 뒤엔 반드시 수염을 닦고 나왔었다. 그래도 미처 닦여지지 않은 보릿가루가 수염 끝에 붙어 있었다. 이는 오일원이 직접 본 일이다.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

 

● 박암(朴庵) 장증(章拯)은 장풍산(章楓山)의 조카다. 처음 벼슬하여 급사중(給事中)이 되었고, 뒤엔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깨끗한 절조와 순박한 마음은 대략 풍산과 같았다.

장증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봉급에서 남은 돈이 4 ~ 5백금(金)이나 되었었다. 풍산이 이를 알고,

“네가 이번 걸음에 한바탕 매매 행위를 해 가지고 왔더라면, 큰 이문을 얻을 수 있었겠구나.”

하니, 박암이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우재총설》

 

● 여중목(呂仲木 : 중목은 여남(呂枏)의 자)이 병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인(門人)들이 길에서 맞이하면서,

“선생님께서 경사(京師)로 가신 지가 1년밖에 안 됐는데 또 돌아오시니,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으십니까?”

하니, 여중목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직위(職位)만 지키면서 공으로 먹는 관(官)의 술과 안주가, 남산(南山)의 거친 나물밥처럼 감미롭지는 못하더란 말일세.”

했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