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60 - 자신이 베푼 덕을 드러내지 말라.

從心所欲 2021. 7. 18. 07:22

[전 김홍도(傳 金弘道)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中 택견(擇繭 : 고치고르기), 33.6 x 25.7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는 송나라의 누숙(樓璹)이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참고하여 농업과 잠업의 일을 순서에 따라 묘사하여 황제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조선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하며, 청나라 때의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와 함께 왕에게 올리는 감계화(鑑戒畵)로 제작되었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15

무릇 받지 않고 내어놓는 것이 있더라도 공공연히 말하지 말고 자랑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말고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말며, 전임자(前任者)의 허물도 말하지 말라.

(凡有所捨 毋聲言 毋德色 毋以語人 毋說前人過失)

 

매양 보면, 청렴하되 덕이 부족한 사람은, 혹 잘못된 전례로 생긴 재물을 내어놓아 공리(公理)에 따라 사용하기도 하고, 자기의 봉록(俸祿)을 떼어내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도 하는데, 그 일이 착하기는 하지만 바야흐로 그것을 내어놓을 때에는 반드시 기를 내어 큰소리치기를,

“사대부로 어찌 이런 물건을 쓸 수 있겠는가.” 하고,

아전들이 혹 전례에 의하여 말하면 반드시 꾸짖거나 곤장을 쳐서 자기의 청렴함을 나타낸다.

또,

“봉록의 남은 것으로 내 어찌 돌아가서 전지(田地)를 살 수 있겠는가.”

하면서, 큰소리로 과장하며 잘했다는 기색이 있어, 백성을 대할 때나 손님을 대할 때나 항상 자랑하니, 그의 마음에는 수백 냥 돈을 가지고 큰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식자(識者)가 곁에서 보면 어찌 비웃지 않겠는가.

 

무릇 재물을 내어놓고 봉록을 떼어낼 때에는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해당 아전에게 분부하고 다시는 끄집어내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묻는 사람이 있으면,

“이번에는 그렇게 내어놓았지만 다음에는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라고 답하고 화제(話題)를 돌려 딴 일을 이야기하여 다시는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 것이 좋다.

전임자가 전례를 따른 일은 본래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재물을 내어놓는 일은 혹은 명예를 얻자는 의도에서 나오기도 한 것이니, 자신의 작은 은혜를 가지고 남의 상례(常例)로 하는 일을 비방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절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두연(杜衍)이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살이의 첫째 요건은 청렴이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 진실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 동료 중에 근신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참소하고, 윗사람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화를 당하기에 알맞을 뿐이다. 오직 묵묵히 실행하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 좋다.”

▶두연(杜衍)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하는 것은 사군자(士君子)의 당연한 일이다. 청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청렴함을 나타내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며, 자기의 청렴을 믿고 남을 핍박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은 벼슬살이하는 본분이지만, 도리어 자기의 청렴을 자랑하고 탁한 자에게 오만하여서는 안 된다. 근신(謹愼)은 벼슬살이에서 세심히 해야 할 것이지만 도리어 큰 일만 삼가고 작은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근면은 정치하는 실지이니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끝에 가서 게으르면 안 된다.”

 

호위(胡威)의 아버지 호질(胡質)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었다. 호위가 서울에서 형주로 가서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려 하니, 호질이 비단 1필을 주어 행장을 차리도록 하였다. 무제(武帝)가 호위에게,

“경의 청렴이 경의 아버지의 청렴에 비해 어떠한가?”

하니, 호위가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는 청렴하되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신은 청렴하되 남이 모를까 두려워하니, 신이 아비만 훨씬 못합니다.”

하였다.

▶호위(胡威), 호질(胡質) : 호위(胡威)는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이고, 호질(胡質)은 삼국(三國) 위(魏)나라 때 사람이다. 부자가 함께 청렴하고 근신하기로 유명하였다. 본문의 고사는 『삼국지(三國志)』 권27에 나온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일찍이 어느 사람에게,

“내가 수령과 감사를 지낼 때 어찌 흠이 없었겠는가. 다만 부인이 집안 살림을 잘하지 못하여, 내 의복과 음식과 거처에 쓰이는 물건이 남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는 자들이 나를 청렴하다고 인정하였으니, 나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으니, 선배들이 실지를 따르며 명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정재륜(鄭載崙)의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에 있다. -

▶이안눌(李安訥) : 조선 문신(1571 ~ 1637).
▶정재륜(鄭載崙) : 1648 ~ 1723. 효종의 사위로,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 공주(淑靜公主)와 결혼하여 동평위(東平尉)가 되었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