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기(律己) 제3조 제가(齊家) 13
어머니의 교훈이 있고 처자들이 계율을 지키면 이를 일러 법도 있는 집안이라 할 수 있고 백성들도 이를 본받을 것이다.
(慈母有敎。妻子守戒。斯之謂法家而民法之矣)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제가(齊家)는 그 가운데 3번째이다.
조찬(曹璨)은 빈(彬)의 아들이다. 절도사(節度使)로 있을 적에 그의 어머니가 하루는 집안 창고를 둘러보다가 돈 수천 꿰미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조찬을 불러 그것을 가리키면서,
“네 선친(先親) 시중공(侍中公)은 중외의 벼슬을 역임하였지만 이렇듯 축재(蓄財)를 한 일이 없다. 네가 네 아버지만 훨씬 못함을 알겠다.”
하였다.
▶조찬(曹璨) : 송(宋)나라 때 관리. 그의 아버지 조빈(曹彬)은 송 태종(宋太宗) 때 사람으로 지위가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되 겸손하였고,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시중공(侍中公)’은 조빈(曹彬)이 시중(侍中)을 지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
양동산(楊東山)이 오(吳)의 수령으로 있을 때 그의 어머니 나 대부인(羅大夫人)은 밭에 모시를 심고 몸소 길쌈을 해서 옷을 지어 입었다. 양동산은 달마다 월급을 떼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부인(羅夫人)이 갑자기 대단치 않은 병이 났다가 낫게 되자, 모아둔 월급을 내놓으면서,
“내가 이것을 모아두면서부터 마음이 즐겁지 않아서 병이 났다. 이제 이 돈을 모두 의원에게 사례로 주어 버리면 병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자기 젖을 먹이면서,
“유모를 두어 남의 자식을 굶겨 가면서 내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실로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양동산(楊東山) : 송(宋)나라 때의 문신 양장유(楊長孺). |
정선과(鄭善果)가 경주 자사(景州刺史)로 있을 때였다. 어머니 최씨(崔氏)가 정사(政事)를 잘 알았다. 정선과가 나가서 정사를 볼 때면 장지 뒤에 호상(胡牀)을 놓고 앉아서 살폈다. 그의 판결을 듣고 그것이 이치에 맞으면 앉으라 한 후 서로 담소하고, 처리한 일이 잘못되거나 함부로 성을 내었거나 하면 최씨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쓰고 울며 종일토록 음식을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선과는 가는 곳마다 청백리(淸白吏)로 불렸다. - 어떤 책에는 당나라 정선과가 기주(沂州) 자사로 있을 때라고 하였다.
▶정선과(鄭善果) : 수(隋)나라 문제(文帝)ㆍ양제(煬帝), 당 태종(唐太宗) 때의 관리. |
살피건대, 이 일이 진실로 좋기는 하지만, 부인의 본분은 본래 바깥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아전이나 관노 중에 죄가 있어 중한 장형(杖刑)으로 다스리려고 할 때, 혹 대부인(大夫人)이 쪽지로 너그럽게 해줄 것을 부탁하고, 수령은 그것을 참작하여 감등해서 가볍게 처리해 주면 정사에 해를 끼치지 않고 은혜는 부모에게 돌아가니 또한 좋은 일이다. 아내 이하의 가족들이 쪽지를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선배 중에 윤팔송(尹八松) 같은 분은 매양 양로연(養老宴)을 베풀 적에는 60 이상의 부인에 대해서는 대부인으로 하여금 잔치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는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윤팔송(尹八松) : 조선 문신 윤황(尹煌, 1571 ~ 1639)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
윤석보(尹碩輔)가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처자들은 풍덕촌(豊德村) 본집에 있었는데 굶주림과 추위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의 부인 박씨(朴氏)가 집에 전해오는 비단옷을 팔아서 전지(田地) 한 뙈기를 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편지를 급히 보내서 그 전지를 돌려주도록 하며,
“옛사람은 한 자 한 치의 토지를 넓힘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이제 내가 대부(大夫)의 반열에 참여하여 국록을 먹으면서 전지와 집을 마련한대서야 옳겠소. 백성과 매매하여 나의 죄과를 더욱 무겁게 하지 마오.”
하였다. 이에 박씨는 부득이 그 전지를 돌려주었다.
▶윤석보(尹碩輔) : 생년미상 ~ 1505. 본관은 칠원(漆原).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유배(流配)를 갔다가 이듬해 죽었다. |
유공작(柳公綽)이 절도사(節度使)로 있을 적에 그의 아들이 경내로 들어와도 군읍(郡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관부(官府)에 와서 출입할 때에는 항상 극문(戟門) 밖에서 말을 내렸다.
살피건대, 극문(戟門)이란 오늘날의 이른바 외삼문(外三門)이니, 걷는 거리가 몇 걸음 사이라 그리 수고롭지 않을 것이나 집안 법도는 볼만한 것이 있으니 어찌 본받지 않겠는가.
자제들이 왔을 때 정문을 여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마땅히 동협문(東夾門)으로 출입해야 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아들 된 자는 문 복판에 서지 않고 길 가운데로 다니지 않는다.”
하였다.
▶유공작(柳公綽) : 당(唐)나라 때의 관리. ▶극문(戟門) : 의장(儀仗)을 문에 벌여 세운 것으로 귀족이나 관가의 문을 칭하는 말. ▶외삼문(外三門) : 출입구를 중앙과 좌우 셋으로 한 큰 문. 관청의 정문. ▶동협문(東夾門) : 궁궐 또는 관아 등의 정면의 삼문(三門)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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