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71 - 규문(閨門)을 엄히 단속하라.

從心所欲 2021. 9. 30. 07:10

[이방운(李昉運) <빈풍칠월도첩(豳風七月圖帖)> 中 5면, 견본채색, 34.8 x 25.6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빈풍칠월도>는 주(周)나라 농민들이 농사와 길쌈에 종사하는 생활을 읊은 일종의 월령가(月令歌)인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을 그린 것이다. 이 시가는 중국의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을 위하여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 율기(律己) 제3조 제가(齊家) 9
규문(閨門)이 엄하지 않으면 가도(家道)가 문란해진다. 가정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관서(官署)에 있어 서랴. 법을 마련하여 거듭 금하되 우레와 같고 서리와 같이 해야 한다.
(閨門不嚴 家道亂矣 在家猶然 況於官署乎 立法申禁 宜如雷如霜)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제가(齊家)는 그 가운데 3번째이다.
▶규문(閨門) : 부녀(婦女)가 거처(居處)하는 안방

 

내사(內舍)의 문을 옛날에는 염석문(簾席門)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발[簾]을 쳐서 가리고 자리로 막아서 집안의 종들과 관의 노복들이 상면할 수 없었으니 이는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근세에 와서는 이 법이 문란해져서 집안 종들이 이 문을 멋대로 드나들고 관비(官婢)들도 이 문을 함부로 들어와서, 발과 자리를 걷어 치우고 서로 귀에 입을 대거나 무릎을 맞대고 소곤거려,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게 되어서 온갖 폐단이 생겨나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염석문(簾席門) : 각 고을 관아(官衙)의 안채인 내아(內衙)의 바깥문. 바깥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발이나 자리를 쳐서 가렸다.

 

염석문 밖에 한 개의 어석(棜石) - 섬돌을 어금(棜禁) 모양으로 만든 것. - 을 놓고 명령하기를,

“매일 아침에 주노(廚奴) - 관청 고지기 - 와 원노(園奴) - 원두한(園頭漢) - 가 바칠 물건을 이 어석 위에 놓고 방울 - 곧 내사(內舍)의 방울 - 을 울려 알리며, 물러서서 30보 밖에 섰으면 - 관에서 땅에 금을 그어 표를 세운다. - 내아(內衙)의 종이 방울 소리를 듣고 문에 와서 자리를 걷고 물건을 들여가 바치고는 곧 빈 그릇을 도로 그 어석(棜石) 위에 놓는다. 내아의 종이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 후에 관아 종이 그 빈 그릇을 가지고 나갈 것이요, 감히 얼굴을 보고 서로 말을 주고받는 자가 있으면 안팎 종을 모두 매로 엄중하게 다스릴 것이다.”

하라.

▶어금(棜禁) : 어(棜)는 다리가 없는 상, 금(禁)은 다리가 있는 상으로 모두 술잔을 놓는 기구.
▶원두한(園頭漢) : 채소를 심고 관리하는 사람

 

바친 물건이 정말로 고약하게 나빠서 먹을 수가 없으면 수령이 안으로 들어온 당일에 친히 자세히 살펴보아서 용서할 만한 것은 용서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한가한 시기에 수리(首吏)에게 말하여 밖에서 살펴 신칙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끝내 종들은 한 마디도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되고, 또 안식구가 사사로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해도 안 되며, 또 책객(册客) - 곧 자제(子弟)와 친빈(親賓) - 들이 이러쿵저러쿵 조금이라도 간섭하게 해서는 안 된다.

▶수리(首吏) : 각 지방 관아의 수석 아전(衙前). 호장(戶長)일 경우도 있었고 이방(吏房)일 때도 있었다.

 

만약 소용은 시급한데 들여오는 것이 매우 늦을 때는 내찰(內札)로 책방(册房)에게 알려 동헌(東軒) - 정당(政堂) - 에 전하도록 하며, 동헌에서는 수리를 불러 독촉하도록 하며 끝내 사인(私人)이 관속(官屬)을 독촉하거나 신칙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극히 작고 하찮은 일일지라도 명령이 여러 군데서 나오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법을 이와 같이 세워놓으면 수리(首吏)는 몹시 괴로워하여 그 독촉과 신칙이 반드시 엄할 것이므로 며칠이 안 가서 일이 지체 없이 잘 되어 갈 것이다.

▶내찰(內札) : 부녀자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한글 편지.

 

권일(權佾)이 수령이 되자, 그의 어머니 안 부인(安夫人)이 경계하기를,

“백성에게 임할 때는 반드시 관대하게 하여 늙은 어미가 봉양 받을 때에 부끄럽게 하지 말라. 안팎이 엄하지 않으면 뇌물을 주고받는 길이 트일 것이니, 더욱 삼가야 한다.”

하였다.

▶권일(權佾) : 조선 숙종 때 관리로,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있을 적에 선치(善治)로 표리(表裡, 옷의 겉감과 안집)를 하사받았다.

 

관기(官妓)나 관비(官婢)가 내정(內庭)에 출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잗달고 잡스러운 말들이 모두 이들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것이다.

침비(針婢)에게 시킬 일이 있으면 동헌에서 수노(首奴)를 시켜 침공(針工)을 보내게 해야 한다.

물 긷는 여종은 염석문(簾席門) 곁에 담 구멍을 뚫고 거기에다 홈통을 걸고 안으로 물을 붓도록 해야 한다.

수리(首吏)의 처(妻)를 내사에 출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무리들은 공관(空官) - 수령이 나가 자리를 비울 때를 공관이라 한다. - 의 틈을 타서 음식을 잘 장만하여 오고, 혹은 포백(布帛)이나 기물 같은 귀하게 여길 물건을 내실에 바쳐서 사사로운 안면을 친숙히 한다. 수령은 여기에 끌려서 수리를 마치 사인(私人)같이 여기게 되니 정사를 그르침이 많은 것이다.

▶침비(針婢) : 바느질을 맡은 관비(官婢).

 

매양 성대한 제삿날이 되면 제사 음식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 옛날 예법에는 훈포(煇胞)나 적혼(翟閽)에게도 은혜를 골고루 베풀었다. 그러므로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은혜가 고르면 정사가 잘 된다.”

하였다. 육방(六房)의 아전들과 시노(侍奴)ㆍ시동(侍童) 등 가까우면서 수고가 많은 자들에게 골고루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훈포(煇胞) : 훈(煇)은 가죽을 다루어 갖옷을 만드는 사람이고, 포(胞)는 가축을 잡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모두 천한 직책이다.
▶적혼(翟閽) : 적(翟)은 약을 다루는 아전이고, 혼(閽)은 문지기. 모두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맡았다.

 

호태초(胡太初)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제나 문객(門客)들은 아전들과 서로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고, 아전이나 백성의 부녀자들이 드나들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오고 가면서 서로 결탁하여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화(禍)가 담 안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 일이 규문(閨門)에 관계되면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오성가계(烏城家誡)에 이렇게 말하였다.

“자제나 친빈(親賓)은 깊이 책실(册室)에 들어 있을 것이요, 아전ㆍ향임(鄕任)ㆍ종들과 대면하여 말을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 - 전에 내 선인께서도 군현(郡縣)을 다스릴 때 이와 같이 경계하였다. - 자제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빗은 뒤 당에 올라 문안을 드려야 한다. - 곧 신성(晨省)이다. - 참알(參謁)할 때가 되면 바로 자기의 처소로 물러가야지 아버지의 곁에 서서 참알을 참관해서는 안 된다. 혹 아전들이 물러가고 뜰에 사람이 없으면 다시 올라가서 모시고 즐거워하여도 좋다. 만약 송사하는 백성이 들어오거나 죄인에게 곤장을 칠 때는 곧 자기 처소로 물러갈 것이요, 아버지의 곁에 서서 송사를 판결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

 

자제들이 서울 집으로 돌아가거나 가까운 읍으로 놀러 가거나 할 때에는 마땅히 자기 종과 자기 말[馬]을 사용해야 하는데, 매양 보면 자제들이 나들이할 적에 관(官)의 말을 타고 관의 종을 거느리고 좌우로 옹위하여 벼슬아치의 행차 모양을 차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민망히 여기게 한다.

자제들이 책실에 있을 때는 반드시 시동(侍童) - 곧 책방통인(冊房通引)이다. - 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 시동이 없으면 객지에서 손발을 놀릴 수 없으므로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리고 무지하여 아직도 입에서 젖내를 풍기는 아이로 충당하되 항상 자제들에게 주의를 주어 그를 아끼고 달래면서 글자도 가르치고,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큰소리로 나무라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제들이 혹 산사(山寺)로 놀러나갈 경우에는 시동을 데리고 조용히 걸어서 가는 것이 좋다. 절에서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값을 후하게 주어야 한다. 폐단 같은 것을 물어보아 돌아와서 아뢰도록 하고, 비록 시(詩)나 경서(經書)를 아는 중[僧]이 있더라도 부중(府中)으로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읍자(邑子) 중에서 만나자는 청이 있더라도 사양하여 만나지 말아야 하며, 갑자기 찾아와 이야기를 청하거든 온화한 얼굴로 사양하면서 ‘가훈(家訓)이 아주 엄하여 감히 환대하지 못하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 바라오.’ 하고 바로 일어나서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

▶읍자(邑子) : 고을 사람의 자제.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