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다운 나라

재일동포 신순옥의 2003년 한국강연 원고

從心所欲 2021. 10. 15. 06:23

신순옥씨가 2003년 5월 한국에 방문하여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에서 강연을 한다는 자료를 본 일이 있다. 한국의 지구촌동포청년연대(Korean International Network)라는 단체에서 초청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강연회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강연회를 주최한 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의 홈페이지는 물론 뉴스에도 그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신순옥씨가 한국강연을 위해 준비했던 원고가 단체의 강혜정이라는 분의 번역본으로 KIN의 홈페이지에 자료로 남아있다. 그 원고에는 우리가 몰랐던 재일동포의 역사와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던 재일동포의 처지, 그리고 우리가 다 알지 못했던 왜놈들의 패악질들이 담겨있다. 가능한 번역자료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다듬어 옮긴다.

제목은 <2003년 5월 한국강연 자료>이다.

 

[신순옥 초청강연회 자료 표지, 지구촌동포청년연대]

 

0. 나에 관하여

내가 태어난 1959년.
당시의 재일조선인 수는 약 60만 명이었다. 한반도 남쪽 출신자가 대부분으로 전체의 97%를 점하고 있었다. 일본의 1958년도 <외국인등록 통계>에 의하면 국적은 ‘조선’이 74%, ‘한국’이 16%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법무성의 1959년도 <재류외국인 통계>에 의하면 당시의 조선인 직업은 단순노동 52.8%, 판매업 18.5%, 농림/어업 7.7%, 서비스업 6.5%, 운수업 5.9%였다. 직업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은 막노동, 일용 노동, 파친코, 폐품회수였으며, 실업률은 일본인의 8배에 달했다.


1. 최근 몇 년 일본사회로부터 제기 받는 질문

- 일본을 좋아합니까?
- 일본인을 좋아합니까?
- 일본과 북한(또는 한국)이 전쟁을 하면 어느 편을 들 겁니까?

이 모두가 사상 검증성 질문이다.


2. ‘한국 국적’이란?

‘조선’적(籍)은 국적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자의적 표기이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서 거주했던 조선인들은 당초의 ‘일본국적’ 그대로인 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1945년 말의 선거법 개정에 따라 참정권이 ‘당분간’ 정지당했고, 1947년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당분간 외국인으로 본다’는 상태에 놓였다.
재일조선인은 일률적으로 국적 란에 ‘조선’으로 기재되었다. 이는 ‘조선반도 출신자’라는 의미의 부호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기 직전, 법무성은 모든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하고, 일제히 외국인으로 만들었다. 국적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참정권을 비록한 시민권은 국적 조항을 통해 박탈되었다. 식민지하에서는 일본국민으로서 전쟁에 협력케 하고, 전범으로 처형될 때는 일본인, 군인 은급(恩給)‘을 지급할 때는 외국인으로 취급하여 배제하는 식이었다.

흔히 ‘조선’이란 국적은 북한 국적으로 오해받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조선’이라는 국적이 조총련계의 ‘북(北)’을 지지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본이 서류에 일방적으로 기재했던) ‘조선’이라는 국적을 전환하지 않았던 경우에 불과하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국적을) ‘한국’으로 바꿔 쓸 수 있게 되었으나, 그렇게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협정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조선’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는 사람이 급증했다. 현재,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은 약 50만명이다. 또한 91년 이후 조선과 한국 국적 모두 ‘특별영주’ 자격으로 통일되었다. 하지만 한국 국적이 아닌 사람들은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적으로는 무국적 상태이다.


3. 민족교육의 역사

민족교육의 역사는 동포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있다.
1945년 8월 15일. 빼앗긴 조선의 말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일본 각지에 확산되었다 - 글을 배우기 위한 식자(識字) 학급 -. 그 목적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연맹이 결성됨으로써 이 운동에 박차가 가해져 1년도 채 되지 않아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는 곧 6년제 정규학교로 발전하여 1946년 10월에는 도쿄 조선중학교가 창설되었다. 당시는 일본인 교사도 혼재된 상태에서의 교육이었다.
1948년에는 93종류의 120만부 교과서가 동포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때까지 초등학원 541개교, 중학교 7개교, 청년학원 30개교가 설립되었고, 교사 1,500명에 학생 수가 5만 명에 달했다. 글조차 배우지 못했던 1세에게 있어 조선인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긍지이자 미래에 대한 꿈이며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중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이 민족교육에 관여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인생에서 제일 큰 행복이었습니다.”

많은 1세들이 먹는 것도 아껴가며 돈을 냈고 노동력을 제공하며 민족교육을 지켰다. 그러나 그즈음 소련의 지원을 맏은 김일성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간의 긴장은 나날이 높아져가고 있었다. 그러한 정황을 배경으로 일본에서의 민족학교의 급속한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연한군 총사령부와 일본정부는 1948년 1월,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이어 1949년에는 조선인연맹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맞선 투쟁 속에서 16살 김태일도 죽임을 당하고 만다. 민족교육은 조선인의 목숨을 대가로 지켜진 것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1953년, 북한(및 중국)과 연합군(미군)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체결.
1955년 5월에 조총련이 결성되고, 재일조선인 교육기관은 그들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한국은 재일조선인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으며 오히려 군사독재정권은 재일조선인을 계속 간첩 취급하였다. 조총련이 운영을 맡게 되면서 일관되게 주체사상의 강화발전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주체’란 북한 국가건설의 기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1956년 4월, 조선대학교 창립.
1957년 이후, 북한에서 교육지원비와 장학금이 보내졌다고 한다. 실제로는 재일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학교건설을 위해 사재를 털어 각자가 보탤 수 있는 모든 것을 보탰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체력이 있는 사람은 몸으로 교육을 지탱시켰다. 이름도 없는 이들 동포의 희생 위에 결과적으로 조직이 군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의 교육 커리큘럼은 시대상을 반영하여 1977년, 1983년, 1993년 세 차례에 걸쳐 개편되었다. 학생 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데, 현재 일본 국내에는 조총련계 민족학교가 약 122개교, 한국계 민족학교는 약 11개교가 있다.
민족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가운데서도 아이에게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심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본학교에서는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닐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 공립학교 안에도 민족학급이 있으나, 이는 재일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등에 한정되어 있다.)
조선학교에는 한국국적의 아이, 조선국적의 아이, 일본국적 아이도 재적하고 있다.


4. 조선총련과 민단

- 조련에서 총련으로
패전직후 혼란스러운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에게 있어 생명의 안전과 재산의 보호, 생활지원, 귀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대책이 급선무였다. 독립조국의 재건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과제도 있었다.
1945년 10월, 자주적인 조직인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조련)이 결성되었다. 그 목적은 ‘신조선의 재건, 세계평화 추구, 재류동포의 생활안정, 귀국을 위한 편의, 일본국민과 사이좋게 지낼 것’ 이었다. 미소냉전을 반영해 조련은 좌익적 색채가 강해졌으며, 식민지하에서 일본에 협력한 민족주의적 인사를 배척하자 민족계 우파는 분열하여, 46년에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한 후 32개 단체와 합병하여 재일본 조선거류민단(약칭 민단)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력 상으로는 조련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후 1948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자 대립은 재일동포에까지 미쳤다. 민단은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으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할 것을 제1 목표로 내걸었다. 그리고 여권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등 국가 말단업무를 행함으로써 한국과의 연계를 심화시켰다. 후에 이 여권관련 업무는 목을 틀어쥐는 압력수단이 되어 많은 재일조선인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한편, 조련은 일본공산당과 연계하고 연합군총사령부와 대립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지지를 보냈다.

참고로 조련은 해방전에 보유했던 선거권/피선거권이 정지당했을 때 참정권, 시민권을 요구했는데, 이는 ‘자주 독립적인 외국인’이자 ‘외국시민’으로서 민족적 권익과 일본 민주화를 요구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민단 측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라 단정하며 현재와는 다른 입장에서 비난했다. 1949년에 ‘단체 등 규정령’으로 해산을 명령받은 조련은 ‘재일조선 통일민주전선’으로 계승되었고, 1955년 5월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총련)’의 발족에 이른다. 그 후, 남북의 대립이 그대로 투영되면서, 일본 안에서 분단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5. 9.11과 일본사회

※ ‘외국국적 주민 = 범죄자 예비군’이라는 의식의 강화

- 1970년대 ‘고쿠시칸(國士館)과의 싸움’
1963년 도쿄 시부야구 하치코동상 앞에서 고쿠시칸 대학생이 조선고교 학생의 옆구리를 단도로 찌르는 사건이 있은 이래, 조선고교 학생에 대한 습격이 70년 전후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쿠시칸 대학생이 두목이 되고 고쿠시칸 고교생이 실행부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너 마늘 냄새가 지독한 거 보니 조고생(조선고교 학생)이냐. 죽여 버려!” 하며 덤볐다.
보복전을 포함하여 이러한 충돌이 고쿠시칸대학 뿐 아니라 제경(帝京)상업을 포함한 기타 학교와의 사이에서도 벌어져, 경찰이 파악한 것만으로도 66년에서 73년 사이에 560회 이상에 달했다. 실제 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쿠시칸대학은 국가에 충성하는 ‘국사(國士)’의 양성을 내건 학교로, 당시 총장의 신조는 ‘천황주의, 대일본제국 헌법의 부활, 공산당박멸, 대동아전쟁은 성전(聖戰)’ 등 이었다.

- 1980년대 이후 사회적 압력과 강화
일본과 한반도, 아시아와의 관계가 흔들릴 때, 그들의 칼날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을 향했다.
예를 들어 2001년, 역사교과서의 왜곡문제로 일본과 중국/한국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해 7월 13일 일본 주고쿠지방의 한 지역에서 한 남자가 민족학교에 다니는 15살 여학생의 눈과 입에 테이프를 붙여 씌우고 차에 가뒀다. 여학생은 약 20분 후에 노상에 팽개쳐졌으며 남자는 그대로 도주했다. 여학생은 다행히 생명을 건졌으나 이틀 전과 사흘 전에도 같은 남자에게 복부를 얻어맞았었다고 한다.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감금과 폭행혐의로 경찰이 조사를 개시했다는 기사가 통신사 경유로 배포된 직후, 보도는 중지되었다. 관계자에 따르면 중지시킨 것은 학교 측이었다고 한다. 중지시킨 이유는 명백했다. 이것이 기사화 되자마자 모방하는 범죄가 순식간에 확산된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학생을 지킬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이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민족학교 관계자는 지칠 대로 지쳐갔다.
재일조선인 저널리스트 강성씨의 조사와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89년 ‘파친코 의혹’ 당시, 한 달 사이에 겉으로 드러나게 괴롭히거나 폭행한 사건 수는 80건이었으며, 94년 ‘미사일 의혹’ 당시는 160건이었고 그중 정부가 조사한 것은 1건뿐이었다. 98년 ‘대포동소동’ 당시는 58건, 그중 경찰이 인지한 건수는 6건이며 검거 수는 0건이다.
이런 식으로 괴롭히거나 폭행한 사건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일상화되어갔다. 국제무역센터빌딩 붕괴사건 이후, 공항 등의 보안체제 강화는 많은 이들이 체험했을 것이다.

2001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공항에서의 수하물 검사시 “탑승권을 보겠습니다. 성함을 읽어주십시오.”라고 체크하는 ‘본인확인’이 행해졌다. 젊은 검사관이 수하물 검사를 하는 입구에서 고장난 녹음기라도 되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검사관 : 탑승권을 보겠습니다. 성함을 읽어주십시오.
나 : 여기 쓰여 있잖아요.
검사관 : 성함을 읽어주십시오.
나 : 읽는 게 무슨 의미죠?
검사관 : 성함을 읽어주십시오.
나 : 이러는 게 얼마나 범죄예방이 된다고.
검사관 : 성함을 읽어주십시오.

아무리 말해도 검사관은 기계적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이름은 탑승권에 일본글자 가타카나로 써 있었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읽어야 하는가? 이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항안내소나 기내 곳곳에서 나는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몇 달 뒤, 한 지방공항에서 “외국인인지 아닌지 소리로 확인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발음이 이상한 놈은 수상하다는 발상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외국인 = 범죄 예비군’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성립된 ‘범죄예방행위’인 것이다.

일본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센징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너무나도 쉽사리 이를 믿은 민중이 ”15엔 50전이라고 말해봐!“ (역주 : 15엔 50전에 한국어 원어민에게 익숙지 않은 발음이 들어있다.)라고 강요하고는 발음이 나쁜 사람이나 도쿄방언이 아닌 사람, 수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던 것이다.
과거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죽임 당했던 기억. 아무리 건망증 사회라지만 이미 80년 전 일이 아니냐고 해도 피해자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기억은 약자에게 남겨지며 또 다시 살아난다...


6. 9.11과 재일조선인 사회

인터넷상에서는 한국 이름으로 일하는 재일동포 연예인이나 문화인의 홈페이지에 공격성 발언이 올라오고, 한국 이름으로 일본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의 부모는 “아이 얼굴을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이 아닌가?” 싶어 매일 아침 아이를 내보낼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관서지구에서는 축구 경기장에서 재일조선인 아동 팀이 경기에서 우세해지자 관객석에서 “납치, 납치”라는 합창이 울렸다. 그리고 실재하는 인물 이름을 거짓 명의 삼아 재일조선인들 집에 “너 쫑(‘조센징’을 멸시한 욕)이냐”로 시작되는 차별문서가 날아들었다. 우표가 붙여지지 않은 그 문서의 일부는 발신인으로 되어있는 사람에게 ‘반송’되었는데, 그 수만 해도 100통 가까이 됐다. 차별문서가 모두 몇 통이나 배포됐는지를 알 수는 없다. 재일조선인 1세에서 4세까지, 게다가 일본이름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집에까지 보내졌다. 차별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쫓아오는 상황. 그 편지를 뜯었을 때의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인 지방에서는 집 대문을 못 열겠다는 여성이 상담을 해왔다. 납치관련 보도가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집 앞에 개나 고양이 시체가 놓여있을 것만 같아 문을 못 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시체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열지를 못했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1세대임을 알 수 있는 조선 할머니가 집밖으로 안 나오게 됐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밖으로만 돌고 집에 있으려 하질 않았다.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티브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티브이 내용이 너무도 심해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시코쿠에서도 초등학생에 대한 폭행사건이 보고되었고, 홋카이도에서는 “일본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서 걸어 다닐 수가 없다”는 아이의 SOS가 들어왔다.

- 마음을 파괴당하다
일본국적을 취득한 사람들 또한 국적 때문에 역으로 피할 곳을 아무 데도 찾지 못한 채 조선인공격의 폭풍 속에 팽개쳐졌다.
할아버지가 한반도 출신인 한 학생의 경우,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네 할아버지는 일본사람이야”라며 새 역사를 만들어냈고 이를 믿게 하려했다. 할아버지의 뿌리를 알고 있던 그 학생에게는 이전에 “조센징!”이라며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 일에 관해 마음 정리도 못한 상태에서 가족은 필사적으로 ‘피’를 부정한다. 뿌리를 숨기고자하는 가족으로부터의 압력은 그 학생의 마음의 균형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부모가 일본국적을 취득한 후 일본인으로 태어나 자란 어느 여성은 자신의 이혼 시에 남편의 친족이 “조센징 무섭다니까...”라고 한 말이 계기가 되어 마음에 병을 얻었다. 이러한 상처 입은 사람들이 북한을 때리는 보도 속에서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한국인 교회에는 “귀화하는 게 더 나을까요?”란 상담이 연일 끊이질 않는다.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한국국적입니다”라며 북한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는 사람, 역으로 결코 그 화제를 언급하려 하지 않는 사람... 지금까지 보여지지 않았던 피차별의 ‘피’가 여기저기에서 분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일조선인 문화인 강연회도 중지되고, 재일조선인 관련 문화교류 이벤트도 ‘자주규제’란 이름하에 중지가 잇달았다. 내가 강의하러 간 대학에서는 식민지지배조차도 모르는 학생이 태반이었는데 “재일조선인이 왜 일본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돈을 벌고 싶어서“란 질문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조선인)강제연행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까지 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그럼 원폭이 투하됐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받았다.

많은 학생들이 ‘조선인 = 북한에서 온 사람’이란 인식이었다. 그리고 조선인에 대해서라면 어떤 무례함이라도 허용되는 공기가 만연해 있었다. 한 여성작가는 이렇게 외쳤다. “알카이다에 대해서는 왜 그랬을까 라며 상대에 대한 상상을 해보지만, 조선인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는 조선인에 대한 증오가 가득 찼다.”그리고 “식민지 때 조센징을 전부 죽여 놓을 걸 그랬다”는 말까지 당당하게 내뱉는 지경이 되었다.


7. 여론과 결합한 행정당국의 차별

조선학교는 ‘각종 학교’로 취급되어 운전학원 등과 같은 분류에 위치 지어져, 공적 보조도 지원도 없는 채 동포의 기부로 지탱하고 있다. 그 졸업생은 대학 입시 때,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던지, 대학수험자격을 취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부담은 크다.
2003년 2월, 국공립대학의 수험자격을 구미계열 학교 졸업생에게는 부여하지만 민족학교 졸업생에게는 부여하지 않는다는 방향에서 문부성이 검토에 들어갔다. 판단의 배경은 “지금 인정해주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여론에 떠밀린 것이었다. 변호사 인권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은 문부성 차관 가와무라씨가 “자격에는 조선학교도 포함되는 것 같다”고 발언하자마자 당일만으로도 100건 이상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 대부분이 익명의 중상이었다. 그러자 가와무라씨는 이후 발언을 삼갔으며 조선학교 관계자와의 면담도 취소했다.

일본 국공립대학의 수험자격은 해외에 대해서는 12년간이라는 교육기간에 대해 주어지게 돼있다. 즉 상대국이 공산주의든 군사독재든, 어떠한 교육과정이든 간에 12년간이라는 기간을 거쳐 온 자에 대해서는 수험자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으로부터의 유학생 경우에는 동경대학 등의 수험자격이 주어진다. 반면, 일본사회에서 세금을 내는 재일조선인에게는 수험자격이 없다는 상황이 된다. 명백한 조선인 차별인 것이다.


8. 일본인은 왜 북한만 나오면 패닉(panic) 상태에 빠지는가?

(상처 입은 민족적 우월감과 배출구로서의 재일조선인)

일본인이 북한에 관한 문제만 나오면 냉정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왜일까?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식민지 정책에 의해 심어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다. 그 차별의식으로 인해 스스로가 공포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언젠가 당한다.”... 그 공포심이 패닉을 낳는다.
과거 소련이 가상적국으로 되어있던 시절, 노샆반도 쪽으로 출장을 가면 일본 우익들이 차를 타고 놀러와 실컷 떠들고 북 치고 선물 사고 온천하고 돌아가는 광경을 곧잘 목격됐다. 가상적국으로서의 소련의 위협에 대해 현실감 있게 느낀 일본인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국이 핵실험을 했을 때도 그다지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상대가 북한일 때는 기껏 대포동을 발사한 정도만 가지고도 현실적 위기감을 느껴버리는 것일까.
아마도 자신들이 조선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내심으로는 자각하고 있어, 언젠가는 보복 당할 것이라고 스스로가 증폭시킨 공포심 때문이리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다.

또 하나는 북한 체제 속에서 일본인이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내몰아 놓은 것 - 추하다고 느끼며 잊고 싶어 하는 부분 - 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한때 일본인은 ‘천황’의 사진을 품에 안고 황국신민으로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 뒤의 패전으로 ‘야마토(大和)민족의 우월성’은 완전히 부정되고, ‘야마토 혼’은 맥없이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이웃나라 북한에서는 위대한 지도자를 정점에 모시고 언론의 자유도 없이, 또한 이에 거스르지도 못한 채 그저 두려워 떠받들고 있다. 전시 하에서의 일본 그 자체이다. 그렇듯 ‘한사람의 지도자에게 꿇어 엎드린 추한 인민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해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됐을 때 패닉상태에 빠진다. 차별의식과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는 공포. 거기에 덧붙여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이것 보라는 듯 눈앞에 들이댔을 때의 혐오감. 이 두 가지가 합해지면서 상대를 친다. 그리하여 화살은 저항하지 못하는 치마저고리의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이 아이들은 일본의 상처 입은 민족적 우월감을 보상하기 위해 얻어맞고 있는 것이다.


9. 재일조선인에게 식민지지배로부터의 해방을!

- 90%가 일본이름을 사용하는 사회 (창씨개명이 계속)
- 전후보상 문제에 관해
- 200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80주년 행사에 관해

 

마지막 9번 항에 대해서는 소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어 신순옥씨가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9번 항목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재일조선인들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지배 상태에 있으며, 하루빨리 그들이 왜놈들의 구시대적 발상과 폭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잊지 말자, 왜놈!

 

[조문주강의실 유튜브 사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라는 일본의 인식과 주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신순옥씨]

 

신순옥씨 약력

 

1959년 도쿄 출생 재일조선인 3세.

‘인재육성기술연구소’ 소장, 향과사(주) 대표

 

- 1985년 향과사(주) 설립

- 1996년 ‘신숙옥인재육성기술연구소’ 개강 (여성, 재일조선인, 마이너리티 문제 등을 중점적으로 강의. 대학, 전문학교,      비즈니스스쿨 등 공개강좌)

- 신문, 잡지 등에 칼럼 연재, TV 토론회 코멘테이터로 출연

- ‘일본교직원조합 21세기커리큘럼 위원회’ 위원

- 이시하라 도쿄도지사 퇴진하라 네트워크’ 발기인

 

- 저서

  애증의 한국어(2002, 문예춘추)

  말하겠습니다.(1996, KK베스트셀러)

  한국, 북조선, 재일코리안사회가 보이는 책(1995, KK베스트셀러)

  기업에 있어서의 에이즈 대응 매뉴얼(1993, 일본능률협회경영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