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다운 나라

우리에게도 명재상이 필요하다.

從心所欲 2022. 1. 6. 17:46

조선은 500년의 역사에 수많은 인물들이 오르내리지만 그럼에도 명재상(名宰相)으로 불리는 인물은 거의 없다. 세종 때의 성세를 이루는데 기여했던 황희 정도가 겨우 거론되는 정도다. 그러나 황희가 농사개량과 국방문제에 일부 공로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명재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그의 치적(治積)때문이 아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다”는 등 거의 개인적 신상에 관한 내용들이다. 황희정승에 대해 전해지는 많은 일화들도 그 대부분은 그의 청빈함이나 관용,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 것들이다.

 

통상 삼국지로 불리는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은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역량으로 오갈 데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처지의 유비를 촉한(蜀漢)의 황제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는 촉한을 위(魏)와 오(吳)에 맞설만한 나라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유비가 죽기 전 제갈량에게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그를 돕되, 부실하다면 그대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제갈량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모자란 유선(劉禪)을 보좌하였다. 위(魏)를 정벌하려고 출병하면서 낸 <후출사표>에서도 “온 힘을 다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鞠躬盡瘁 死而後已]”라며 변함없는 우국충정의 모습을 보였다. 어느 왕이 이렇게 지혜로우면서도 충성스럽기까지 한 재상을 자신의 사람으로 두고 싶지 않겠는가!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도 그런 왕 중의 하나였다. 숙종은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라는 그림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견본채색, 164.2 x 99.4cm, 국립중앙박물관 ㅣ 제갈량은 223년 유비가 죽은 뒤 아들 유선에 의해 무향후(武鄕侯)에 봉해졌다. 줄여서 무후(武侯)로 불렸다.]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중 어제(御製) 부분]

 

승상(丞相)의 위대한 명성은
우주에 영원히 드리워졌다. 
남양(南陽) 땅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평생을 그렇게 지낼 줄 알았다.
선주(先主) 유비가 세 차례나 찾아오니
초가집의 해는 더디 지는구나
.자신을 알아주는 정성에 참으로 감격하여
한 몸을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명군(名君)과 현신(賢臣)이 만났으니
마음은 항상 서로를 지켜주었다.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도 제갈공명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구나.
태공망 여상, 이윤과는 백중지세를 다툴 만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힘을 다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늠름한 모습으로 중원을 빼앗고자
여섯 차례나 기산에서 나왔으며
팔진도가 완성되니 기기묘묘하구나.
귀신같은 계책을 누가 감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오장원(五丈原)에 가을바람이 부니
한나라의 권력이 마침내 다하였다.
아득히 흐르는 천 년의 세월 속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을 위해 슬퍼한다.
유비와 같은 군주를 만나고서도
국가건설의 큰 꿈이 어그러졌음은
재주가 짧음이 아니라
대개 시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꾸어보면 모두 그러하니
무왕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운 태공망도 역시 같았으리라.
참으로 선생께서는만세의 스승이시다.
나는 느낀 바가 있어
선생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생각한다.
윤건(綸巾)에 학창의로
선생의 풍모를 따르고 싶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함께 세상을 다스려보지 못함이 안타까워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 글 속에 싣는다.

 

끝에 을해년 음력 5월 상순[乙亥 仲夏 上澣]에 제(題)했다고 적었다. 을해년은 숙종 21년인 1695년이다.

숙종은 그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서인과 남인의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단행했다. 바로 전해인 1694년에는 인헌왕후 복위를 반대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들이 집권하는 갑술환국이 있었다. 환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숙종의 입장에서는 서인이건 남인이건 간에 믿고 의지할만한 신하들이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때에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길만했을 것이다.

 

숙종의 글 속에 나오는 관중(管仲)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을 도와 안으로는 나라를 부국(富國)으로 만들어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여러 제후들과 동맹을 맺어 제나라를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자리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중국 역사에서 재상의 본보기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악의(樂毅)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나라의 침공을 받아 거의 망할 위기에 있던 연(燕)나라의 재상이 되어 나라를 일으킨 인물이다. 또한 연나라가 조(趙), 초(楚), 한(韓), 위(魏)의 4개국과 연합하는 안을 성사시키고 자신이 직접 다섯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궤멸시키는 군공도 세웠다. 그러나 그를 신임했던 소왕(昭王)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한 뒤 제나라의 이간책에 말려 곤경에 처하자 조(趙)나라로 피신하였다. 혜왕이 뒤늦게 악의를 잃은 것을 후회하여 사죄하였지만 악의는 연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연나라에서는 악의에게 자신의 나라 재상도 맡아줄 것을 요청하여 악의는 조나라에 머물면서 조나라와 연나라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제갈량은 젊었을 때 늘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견될만한 인물로 자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은 관중과 악의가 제갈량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라고 했다. 숙종은 제갈량이 태공망, 이윤(伊尹)과 백중지세라고 하였다.

 

이윤(伊尹)은 하(夏)나라의 속국이었던 상(商)나라 사람이다. 탕왕(湯王)을 도와 학정을 펼치던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몰아내고 상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천하 백성이 요순임금 때와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중국사 최초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尚)은 흔히 강태공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성은 강(薑)이고 씨(氏)는 여(呂)이다. 그의 선조는 강(薑)이라는 성을 갖고 있었는데 우(禹)임금을 도와 치수에서 큰 공을 세워 여(呂)의 땅을 봉(封) 받아서 여씨(呂氏)가 되었다.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린 끝에 주(周)의 문왕(文王)을 만나 태사(太師)가 되었고 문왕은 매사를 그와 의논하여 정사를 펼쳐 주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여상의 계책으로 상나라가 차지했던 천하의 2/3를 주나라에 귀순하게 만드는 결과를 얻어냈다. 문왕이 죽은 뒤에는 무왕(武王)을 도와 상나라를 무너뜨렸다.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로로 여상은 지금의 산동성 동부 지역을 봉지로 받는 제후가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제(齊)나라다. 관중을 중용했던 제환공은 여상의 12대손이다.

 

왕조국가에서는 왕이 나라의 주인이었다.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대통령은 왕이 아닌 국민의 대리인일 뿐이다. 왕들이 자신의 나라를 다스릴 현명한 재상을 찾았듯이 국민도 자신의 나라를 운영할 유능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게 돌아간다. 뒤에서 나라 탓 하는 대신에 나라를 위해 헌신할 대통령을 뽑는 일에 진심이 되자. 그것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인 동시에 최소한의 도리다.

 

 

측천무후도 어제 인용 : 왕이 직접 쓴 그림에 대한 감상문(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