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35 - 한정록(閑情錄) 명훈(名訓) 2

從心所欲 2021. 10. 20. 06:33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명훈(名訓)은 11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고인(古人)의 짤막한 말이나 대구(對句) 같은 것 중에 속된 것을 치유하거나 세상을 훈계할 만한 것이 있는데, 한거 중에는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제11 ‘명훈(名訓)’으로 한다.”

 

● 천하에 가련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가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가련하게 보이지 말라 하는 것이다. 천하에 아끼는 물건은 남들도 모두 같이 아끼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남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지 말라 하는 것이다.

 

'물은 도랑에 이르러 모여지고 오이는 익어야 꼭지가 떨어진다[水到渠成瓜熟帶落].' 이 여덟 자는 일생 애용할 만한 말이다.

 

이지언(李之彦)이 말하였다.

“일찍이 ‘전(錢)’ 자의 편방(偏傍)을 장난삼아 보았는데, 위에도 과(戈) 자가 붙었고 아래에도 과(戈) 자가 붙어 실로 사람을 죽이는 물건인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두 개의 창[戈]이 재물[貝]을 다투는 것이 어찌 천(賤 : 조개 패(貝)는 재물, 오른쪽 편방은 창이 위아래로 두 개다)하지 않겠는가. 《미공비급(眉公祕笈)》 

 

● 왕십붕(王十朋)이 말하였다.

“글을 잘하지 못하는 자는 의당 글하는 사실을 공개하지 말 것이며,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자는 바르게 글씨를 쓸 것이며,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는 간략하게 해야 한다.”  《공여일록》

 

● 글을 하는 데 온 세상 사람이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 글 한다는 것을 슬프게 여기고, 사람됨이 온 세상 사람이 다 자기를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 사람됨을 슬프게 여긴다. 《소창청기》

 

● 담담자(甔甔子)는 매번 사람들에게 착한 정신을 기르라 가르쳤고, 지암자(止菴子)는 매번 사람들에게 살기(殺機)를 없애라고 가르쳤는데, 이 두 마디 말은 나의 스승이다.

 

진(晉) 나라 사람의 청담(淸談 : 위진(魏晉) 시대 고절(高節) 달식(達識)의 선비들이 노장(老莊)의 청정무위(淸淨無爲)를 담론하던 일)과 송(宋) 나라 사람의 학도(學道)는 호용(互用)되지는 않으나 때로는 서로 도움이 되어 필요하다. 즉 소위 떨어지면 둘 다 상하고 합해지면 둘 다 좋은 격이다. 우리들이 행신(行身)하는 것은 곧 진 나라와 송나라 중간을 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 나라 사람의 풍류(風流)를 송나라 사람의 도학(道學)으로 묶으면, 인품(人品)과 재정(才情)이 겨우 세상에 들어맞을 것이다.

▶고절(高節) 달식(達識) : 높은 절개와 사리에 밝은 식견(識見)

 

예장(豫章)의 장 상공(張相公)이 말하였다.

“빈곤해도 검소를 자랑 말고, 부유해도 청렴을 자랑 말라. 권세 있는 요로(要路)에 있을 때는 벼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지 말고, 산림(山林)에 있을 때는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책임진다는 말을 하지 말라.”

좋은 복(福)은 하느님이 아끼고 잘 주지 않는 것인데 경거망동하여 분주하면 복(福)을 감쇄하며, 좋은 명성은 상제가 기피하고 잘 주지 않는 것인데 비방을 얻으면 이름을 더 얻기 어렵게 된다. 《미공십부집》

 

● 진희이(陳希夷 : 희이는 송(宋) 진단(陳摶)의 사호(賜號))가 말하였다.

“좋아하는 곳은 오래 연연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곳은 두 번 가지 말라.”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

 

● 산에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거기에 미련을 가지고 연연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는 것과 같고, 서화(書畫) 감상이 고상한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거기에 탐욕을 내면 서화 장사나 마찬가지이며, 술을 마시는 일이 즐거운 일이긴 하나 조금이라도 남의 권유에 따르면 지옥과 마찬가지고, 손님을 좋아하는 것은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일이지만 속된 무리에게 한번 끌리면 고해(苦海)와 같다. 《감주사부고(弇州四部藁)》

 

● 시(詩)란 성미(性味)에 맞으면 되니 두보(杜甫)의 고음(苦吟 : 시를 잘 짓기 위하여 이리저리 생각하는 것)이 우습고, 술이란 마음을 화락하게 하자는 것이니 도연명(陶淵明)의 지나친 기주(嗜酒)도 싫어한다. 만약 시로써 질투하고 쟁명(爭名)하면 어찌 성미에 맞는다 하겠으며, 만약 술로써 미치고 욕질하면 어찌 마음을 화락하게 한다 하겠는가.  《소창청기》

 

● 소탈함은 혜 중산(嵇中散 : 진(晉)의 혜강(嵇康))같이, 담박하기는 도율리(陶栗里 : 도연명을 말함)같이, 호방하기는 소자첨(蘇子瞻 : 소식(蘇軾)의 자)같이, 다정다감(多情多感)하기로는 백향산(白香山 : 백거이(白居易)의 호) 같이, 사람의 좋고 나쁜 것을 평하지 않는 것은 완사종(阮嗣宗 : 완적(阮籍)의 자)같이 하라. 《소창청기》

 

● 양자운(揚子雲 : 한(漢) 양웅(揚雄)의 자)이 현정(玄亭)에서 호사자(好事者)가 와서 노[橈]를 멈추고 글자를 묻게 한 것이나, 도연명(陶淵明)이 국화 핀 집에 술을 가지고 찾아와 그를 부르게 한 것은 모두 번거로운 일임을 알겠다. 이것은 저 장중울(張仲蔚)의 쑥 덤불 속의 은거나 원안(袁安)이 세속의 누(累)에 얽매이지 않고 고와(高臥)한 것보다 못하다. 《소창청기》

▶양자운(揚子雲)이 ... 한 것이나 : 한(漢)나라 양웅이 고문기자(古文奇字)를 알고 있었던 까닭에 호사자(好事者)가 술을 가지고 와서 물었다는 고사.
▶도연명(陶淵明)이 ... 부르게 한 것 : 도연명은 술을 좋아하여 항상 술친구가 끊이지 않았다.
▶장중울(張仲蔚)의 ... 은거나 : 후한(後漢)의 장중울이 궁벽한 데 살아 그 집이 쑥이 우거져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고사. 
▶원안(袁安)이 ... 고와(高臥)한 것 : 후한(後漢)의 원안이 벼슬하기 전 낙양(洛陽)에 살 때에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걸식(乞食)을 하고 다녔으나 그는 굶주림에 흔들림이 없이 편안히 누워 있었다는 고사.

 

● 평생 내가 아무 탈 없이 잘 있기를 바라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청산(靑山)ㆍ고인(故人)ㆍ장서(藏書)ㆍ명훼(名卉)가 바로 그것이다. 《소창청기》

 

● 문을 닫고 불서(佛書)를 읽는 일, 문을 열고 가객(佳客)을 접대하는 일, 문을 나가 산수(山水)를 찾는 일, 이 세 가지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소창청기》

 

● 향(香)은 멀리서 피워야 되고, 차[茶]는 짧은 시간 동안 끓여야 되고, 산은 가을에 올라가야 된다. 《소창청기》

 

●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고, 시내는 흐르고 돌은 서 있고, 꽃은 새를 맞아 웃고, 골짜기는 초부(樵夫)의 노래에 메아리치니, 온갖 자연 정경(情景)은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소란하다. 《소창청기》

 

● 당시(唐詩)에,

 

行到水窮處 걸어가다 보니 시내 상류에 이르렀고

坐看雲起時 앉아 있으니 구름이 피어나는 것이 보이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의취가 있다. 희로애락(喜怒哀樂) 미발(未發)의 기상(氣象)과 발(發)하여 절도에 맞는 단서(端緖)를 모두 이로써 상상할 수 있다. 《소창청기》

▶희로애락(喜怒哀樂) ... 상상할 수 있다 : 희로애락은 인간의 감정이다. 미발의 기상이란 이 감정이 발로되지 않을 때의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다는 것은 이 감정이 발로되어 중도(中道)에 맞는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에 있는 말이다. 당시(唐詩)가 담고 있는 뜻이 「중용(中庸)」구절의 지취(旨趣)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뜻.

 

● 이태백(李太白)이,

 

淸風無閒時 맑은 바람이 계속 부는데

蕭灑終日夕 청정(淸淨)하게 하루를 보내네.

 

라고 하였는데, 그 마음의 기상의 오묘함이 왕유(王維 : 자는 마힐(摩詰))의 ‘중의 옷이 산색(山色)에 비치어 푸르네[空翠上人衣]’라고 한 시(詩)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형공(荊公 : 왕안석(王安石))이 ‘이웃집 닭이 정오의 적막을 깨뜨리니, 사람으로 하여금 소리로써 깨닫게 하네.[隣鷄報午寂差足嗣響覺]’라고 한 시(詩)는 고요[靜]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소창청기》

 

● 오직 독서(讀書)만이 유리(有利)하고 무해(無害)하며, 오직 산수(山水)만이 유리하고 무해하며, 오직 풍월(風月)과 화죽(花竹)만이 유리하고 무해하며, 오직 단정히 앉아 고요히 말없이 있는 것[端坐靜黙]이 유리하고 무해한데, 이러한 것들을 지극한 즐거움[至樂]이라 한다. 《미공비급》

 

● 진미공(陳眉公 : 명(明) 진계유(陳繼儒))이 말하였다.

“창을 닫고 향을 피우면 좋은 복(福)이 이미 갖추어졌다. 복이 없는 자는 다른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되고, 복이 있는 자는 독서로써 보충할 것이다.”

항상 병날 때를 생각하면 더러운 마음이 점점 없어지고, 항상 죽을 때를 예방하면 도심(道心)이 자연 생긴다. 풍류(風流)와 같은 만족스러운 일은 일단 지나고 나면 처량한 마음이 문득 생기고, 맑고 깨끗한 적막(寂寞)의 경지는 오래될수록 오히려 맛이 증가한다.  《소창청기》

 

● 청산(靑山)은 문(門)에 있고, 백운(白雲)은 창에 있으며, 밝은 달이 창가에 이르고 시원한 바람이 자리를 스칠 때 이같이 경치 좋은 곳은 모두 백옥(白玉)과 같은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이니, 이렇게 그것을 택할 줄 이제 알았다. 《소창청기》

 

● 문을 닫고 거절함을 당하는 것은 산새가 사람을 알고 부르는 것만 못하고, 뜻을 굽혀 동정을 받는 것은 들꽃이 길손을 오만하게 대하는 것보다 못하다. 《소창청기》

 

● 차[茶]가 익고 향이 맑은데 객(客)이 문(門)에 이르니 기쁜 일이요, 새는 울고 꽃은 지고 인적이 없으니 한가한 일이다. 천 년 만의 기묘한 인연은 좋은 책과 만나는 것만한 것이 없고, 일생의 좋은 복(福)은 유사(幽事)가 계속 있는 것만한 것이 없다. 《소창청기》

 

● 부처에게 기도하여 만약 죄를 참회할 수만 있다면 형관(刑官)의 권한은 없어지고, 신선(神仙)을 찾아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하느님[上帝]이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달인(達人)은 나에게 있는 것 곧 본심(本心)을 다한다. 지성(至誠)이 자연(自然 : 교사작위(巧邪作爲)의 인위가 없이 천지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르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다. 《소창청기》

 

● 소자유(蘇子由 : 자유는 소철(蘇轍)의 자)가 말하였다.

“질병이 많으면 도가(道家)를 배우는 것이 좋고, 근심 걱정이 많으면 불교를 배우는 것이 좋다.” 《지비록(知非錄)》

 

● ‘지웅수자(知雄守雌)’ 네 자는 일생 동안 음미하고 활용해도 끝이 없다.

▶지웅수자(知雄守雌) : 「노자(老子)」에 “웅(雄: 수컷)을 알고서도 자(雌 : 암컷)를 지켜 천하의 골짜기가 되라.”는 구절이 있다. 사나이다움을 이해하면서, 연약한 여자 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뜻으로 유약(柔弱)의 도를 지켜 이기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

 

● 송 경문(宋景文 : 경문은 송기(宋祁)의 시호)이 말하였다.

“장주(莊周 :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그대를 보내는 자는 모두 강가에서 돌아오니, 그대는 여기서부터 멀어지네.’라고 하였는데, 매번 여기에 이르면 사람으로 하여금 쓸쓸히 세상을 버리는 듯한 뜻을 가지게 한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구양공(歐陽公 : 구양수(歐陽脩))이 일찍이 한 승려에게,

“옛날의 고승(高僧)은 생사(生死)에 초연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이와 같은 경우가 드뭅니까?”

하자, 고승은,

“고인(古人)은 생각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에 있으므로 임종에 어찌 마음이 어지럽겠는가. 지금 사람은 생각이 산란(散亂)하니 임종에 어찌 마음이 안정되겠는가.”

하였다. 구양공이 정말 그렇다고 하였다. 《하씨어림》

 

● 풍당세(馮當世 : 당세는 송(宋) 풍경(馮京)의 자)가 만년에 불교를 좋아하였는데, 병주지(幷州知)를 할 때 왕평보(王平甫 : 평보는 송(宋) 왕안국(王安國)의 자)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문(門)마다 노래와 춤이 묘하고 아름다우나, 눈을 감고 그것을 보지 않고 날마다 선(禪)을 담론(談論)하면서 이것을 최상으로 여겼다.”

하니, 평보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말은 아직 선(禪)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눈을 감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하나의 중요한 공안(公案 : 선(禪)에서 방법상 정신 집중을 위하여 내는 문제)이다.” 《하씨어림》

 

● 귀ㆍ눈ㆍ입 세 가지는 꼭 막고 열지 말라. 진인(眞人 : 도가(道家)에서 도(道)에 통한 사람)은 잠잠하기가 깊은 못과 같고, 세속인(世俗人)은 법도(法度) 속에 매여 있다.  《참동계(參同契)》

 

[<고사인물도 10폭병풍((故事人物圖十幅屛風)> 中 5폭, 민화병풍, 국립민속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